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주머니칼
아델라인은 잠시 얼빠진 얼굴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그래서 제가 나이아를 물린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무 힘이 없는 그녀는 쉽게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도리어 알렉스가 이 방의 주인 같았다.
아델라인은 차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알렉스가 한 말을 부정했다.
“아, 아니. 아니에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를 들어 보지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황태자, 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혈육을… 더군다나 친모를…….”
“…권력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건.”
“…….”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황가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지요. 그 대다수는 귀하신 분들의 피고. 뭐, 그중의 1할 정도만 정사에 남았지만.”
아델라인의 얼굴에는 오만 감정이 묻어 있었다. 세이드와 황태자의 관계는 나빴지만, 그래도 여주인공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는 힘을 합쳤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분명, ‘처음’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은 뒤,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왜, 왜 황후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외척 세력을 직접 손에 넣고 싶은 것이겠지요. 황후를 배출한 드라무스 후작가를 통해 의회에도 손을 뻗을 수 있고. 황후는 일종의… 억제기이지요. 외척 가문을 손에 쥔 상태이니.”
아델라인은 너무나 칼 같은 그의 말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 별장에 머무는 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일 듯합니다.”
“…왜죠?”
“머물 곳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계속 신세 지는 것도 실례일 테니, 오늘 오후에 나갈 생각입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말에, 아델라인도 따라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머물 곳은 계속해서 찾던 중이었습니다.”
“…….”
“만약, 진짜 사건이 터질 거라고 믿으신다면.”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크 하사. 아니, 안드레이 레이크만큼은 곁에 두고 계십시오.”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 아델라인이 그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말했다.
“보통 그리들 말하죠. 기병대가 전설 속의 마검이고, 포병대가 대성당에 모셔진 성검이라면, 부사관들은 주머니칼이라고.”
그가 미소를 띠었다.
“날이 좀 상하기는 했지만, 쓰는 데는 무리 없을 겁니다. 그럼.”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숙인 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간 자리를 보며, 아델라인은 그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미소.
그건 확실한 미소였다. 가식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미소.
* * *
“…뭐였을까, 그건.”
다그닥, 다그닥.
흔들리는 마차 안, 아델라인은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미소. 그 미소는 며칠이 지나 무도회 전날이 되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 말인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가요.”
나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항상 계속해서 무언가를 읽었다. 신문, 책, 잡지. 나중에 가서는 그녀의 시간을 뺏는 게 미안해, 제가 말을 걸어도 앉아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줬다.
나이아가 읽은 내용은 그대로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었다.
소설 속에 뚫린, 그리고 생략된 부분을 채워 나가야 했다. 소설의 내용이 그대로 전개된다는 그 무형의, 마음속의 안전망이 한 가닥씩 끊겨 나가는 기분이 계속해서 느껴졌기에, 그녀는 나이아에게 어느새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뭐에 대해서 읽어?”
아델라인이 묻자, 나이아는 책을 잠시 덮고 그녀에게 말했다.
“회고록입니다.”
“회고록?”
“네.”
“누구 이야기인데?”
“전 육군본부장인 알베르데 그리보발 마일즈 원수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육군본부장, 리안 필즈먼 대장의 전임자이기도 하지요.”
소설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름.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 어쩌다가 읽게 되었는데?”
“마일즈 원수가 육군 중장으로 야전 사령관에 부임한 기간의 마지막 즈음에, 라이플여단이 투입된 전쟁이 있어서요. 오라버니가 참전했는지는 모르지만… 오라버니는 통 군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니까요.”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바라봤다. 이 마차는 각종 오락거리가 많았지만, 그중에 아델라인이 흥미를 느낄 법한 건 없었다. 나이아의 이야기는 유익하기도 하고 꽤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말재주도 있었으니 최고였다.
아델라인이 나이아를 응시하자, 눈빛에서 그녀가 원하는 걸 알아낸 나이아는 책을 덮고 그녀를 바라봤다.
“직접 읽어 보시는 게 나을 텐데요.”
“직접 읽는 것보단 나이아의 이야기가 훨씬 들을 만해서. 마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게 쉽지도 않고.”
“아직 얼마 읽지는 못 했지만…….”
그러자 나이아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잠시 가다듬은 뒤,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호더빌이라는 지역에 있던 요새를 공략하던 이야기인데…….”
* * *
알베르데는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지금껏 수많은 전장을 헤쳐 왔다 자부하는 그였지만, 눈앞의 성형 요새에서 벌어진 참극에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외벽 앞과 해자, 그리고 경사로에는 육군의 붉은 제복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그 병사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요새의 내부에서 쏟아지는 총포탄은 살아 있는 자의 발마저 죽은 자 곁에 묶어 두었다.
곧이어, 전령들에게서 소식을 전달받은 참모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세 번째 돌격이 실패했습니다.”
“선봉대가 붕괴하였습니다. 더는 공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부대는 많았지만, 이번 공세로 소모할 수 있는 병력은 한정적이었다.
강력한 한 수. 강력한 한 가지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라이플여단장을 맡고 있던 리안 필즈먼 준장이 손을 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라이플여단을 보내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알베르데는 순간 강력한 유혹에 빠졌다.
라이플여단. 필즈먼 준장이 육성한 경보병대는 지금까지 만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산병전은 기본이고 전초전과 방어전에서도, 그리고 대회전에서도 그 능력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유혹을 뿌리쳤다. 전부 보낸다면 승리할 수도 있지만, 이후에 이어질 전투는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 * *
“역시 전쟁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니네. 그나저나 그때도 라이플여단은 꽤나 유명했나 봐?”
아델라인은 손을 들어 이야기를 멈추고는, 나이아에게 질문을 했다. 물론 이야기는 들을 만했지만, 역시 소재가 소재다 보니 아델라인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유명하기도 하고, 다르게 말하면 악명이 높다고도 할 수 있죠.”
“왜?”
“라이플여단의 경보병들은 항상 장교들만 노렸거든요.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장교들 대부분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니까요.”
“지금도 그런 거 아니야? 절반 정도는 귀족이라고 그러던데.”
아델라인은 황태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나이아는 고개를 저으며 친절하게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지금이야 평민에게도 문은 열려 있지만, 그때는 특별히 전공을 세우지 않는 한 대부분 귀족만이 장교로서 복무할 수 있었어요.”
“아하. 그런데 라이플여단에서는 장교들만 저격하니…….”
“악명이 높아진 거죠. 장교들은 전장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던 만큼, 그때까지만 해도 장교만을 노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자, 황태자의 말이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왜 이 이야기를 고른 거야?”
그러자 나이아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때 제2 황자가 전사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황후 마마께서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시지도 않으셨고요.”
그러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산산조각이 난 채로 가라앉아 있던 소설 내용 중 일부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여주인공에게 자신의 동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자신 대신 동생이 전장에 나가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황태자로서 전장에 나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무심코 혼잣말을 해 버렸다.
“그게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어쩌다가 전사하신 건지는 잘 모르려나?”
아델라인이 묻자, 나이아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뒤지더니 다시 책을 펼쳐 그 부분을 찾아냈다.
“아, 여기 나오네요.”
나이아가 아델라인이 잘 볼 수 있도록 책을 돌리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나이아가 가리킨 부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내성에 돌입하자, 적들이 곳곳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그들에게 동원된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을 따라다니는 종군 가족들은 물론이고, 요새 주변의 민가에서 살다가 소개령에 의해 요새 내부로 들어오게 된 민간인들도.그러나 이미 수많은 전우를 잃은 아군은 순간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빠져들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통제해야 할 부사관들도, 그들을 지휘해야 할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누군가의 총성을 시작으로 일방적인 학살극이 자행되었다.
라이플여단 중, 공성전에 투입된 1대대는 그 광기에 물들지 않은 유일한 부대였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학살을 멈추게 하려 노력했다.
이윽고 1대대의 보고를 듣고 투입된 예비대가 상황을 진정시켰으나, 그 혼란 중에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중에는 4차 돌격대로 편성한 제17 보병 연대에서 복무하던 제2 황자, 미드라스 헤르만 베르크 중위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요. 아군의 폭주를 막다가 혼란 속에서 전사하셨다는 소식에 모든 사교 활동이 추모 기간 동안 멈췄고요.”
“그런 일이 있었지…….”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자연스러운 반응을 꾸며냈다. 소설에서 읽었던 황태자의 이야기가 조금 더 보강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황태자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제 동생의 전사에 대한 진실을 알아보고 싶네요.’
진실.
아델라인의 직감이, 그 단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진실이라…….”
그녀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는 조용히 그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그녀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마차는 착실히 수도를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