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decided to become a star RAW novel - Chapter 72
72. 드라마는 어디로
“아이고 형님. 뭘 이렇게 일찍 오셨어. 후배들 불편하게.”
“뭘, 누가 요즘에 그런 걸 따진다고. 일찍 와야 이렇게 동생도 보고 얘기도 나누고 하지.”
“허허. 사실 나도 그래서 일찍 왔어요. 형님 그럴 것 같아서.”
대본리딩이 있을 회의실에서 만난 중년의 두 남자 배우가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누었다.
“근데 나, 대본리딩이 이렇게 설렌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왜요. 걔 주인공 애 때문에?”
“아니, 진짜 듣도 보도 못한 애가 갑자기 KBC 홍길동전 주연을 맡았다고 하니까. 궁금하잖아. 너도 잘 아시다시피 홍길동전이 어떤 드라마냐.”
벌써 몇 회째 홍길동전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 그에게 홍길동전 참여는 나름의 자부심이었다. 듣고 있던 배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18살이라던데. 걔 나온 드라마 봤어요?”
“좀 보려고 하긴 했는데, 그게 뭐 애들 드라마라 오래는 못 보겠더라.”
“나도 그래요. 허허.”
“그래도 뭐 뉴스 보니까. 연기 천재라고 막 그러던데.”
“아휴. 기자들 말이야 뭐. 다 연기 천재지.”
진혁에 대한 기대감과 우려가 섞인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을 때였다.
“어이, 다들 일찍 왔네?”
“아휴, 형님!”
두 배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홍길동전 출연자 중에 가장 선배인 배우 윤창수가 들어온 까닭이었다.
그렇게 윤창수의 입장을 시작으로 꽤 여러 중견 배우들이 회의실로 줄줄이 들어왔다.
“아이고 동생 잘 지냈는가?”
“형님, 오랜만입니다.”
“언니, 반가워.”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러 작품에서 워낙 오래 함께 작품 활동을 했던 이들이라, 금세 이런 저런 근황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화두는 홍길동전 캐스팅으로 돌아왔고.
“걔 직접 본 적 있어?”
“아뇨. 작품 하나 한 앤데 어디서 봐요.”
“드라마 같이 찍은 동숙이 말로는 애가 어마어마하다는데. 그냥 18살로 생각하면 안 된대요.”
“그래?”
호기심과 기대감 어린 대화가 오가는가 하면.
“너무 파격 아니에요?”
“그러게. 파격이 아니라, 파탄이 아닌가 걱정이네.”
“에헤이. 시작 전부터 그 무슨.”
“솔직히 언니도 걱정 되죠? 차라리 걔 정지안인가 하는 애가 주연한다고 하면 이렇게까진 걱정 안 하지.”
진혁의 캐스팅과 드라마에 대한 염려까지.
연배가 연배인지라 하이스쿨이나 진혁에 대해 생소한 배우들이 많았기에 호기심이나, 걱정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직은 베일에 싸여 있는 진혁에 대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을 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진혁이 들어왔다. 순간 일제히 시선이 진혁에게로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우진혁입니다.”
진혁이 깍듯이 먼저 도착해 있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했다.
사실 말이 선배지, 까마득한 나이 차의 배우들이 많았으니, 비슷한 연배들이 주축이었던 하이스쿨2 때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흘렀다.
“아후야. 비주얼이 뭐. 쟤는 이번 드라마 잘 되면 CF는 아주 다 쓸어가겠다.”
“벌써 CF 많이 찍었어요.”
“야… 나 장동준이 처음 봤을 때도 안 놀랐는데. 쟤는 이 봐라. 팔에 소름 돋은 거.”
데뷔 이후 더욱 비주얼이 만개한 진혁의 외모에 대한 중견 배우들의 놀라움이 터져 나왔다.
“그래 네가 진혁이구나.”
진혁이 자리에 앉자, 그중에서도 가장 선배인 배우 윤창수가 입을 열었다.
“첫 주연이라 많이 긴장되겠지만, 마음 편히 해. 여기 다 너 도와주는 사람들이니까.”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 분명 진혁을 편하게 해주려는 말이었겠지만, 이 정도 중량감을 갖춘 원로급 배우의 말이라는 게 당연히 마냥 편할 리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삼촌, 이모, 혹은 부모 나이 이상의 중견 연기자들의 시선도 마찬가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진혁의 자세에는 주눅이 든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예의를 갖추지만 당당함이 서려 있는 자세, 그리고 눈빛.
드라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들 사이에서도 진혁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그래. 역시 우리 주인공. 눈빛이 좋다.”
윤창수 역시 기분 좋은 눈빛을 반짝였다.
내심 걱정을 한 부분도 있었다. 혹시라도 애가 주눅이 들거나 하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하지만 윤창수가 보는 진혁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아이였다.
분명 18살이라고 했는데….
자신의 손주와 동년배의 나이. 하지만 손주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어린 나이에 성공을 경험한 풋내기들의 감추지 못하는 오만방자함도, 혈기에서 나오는 치기 어린 당당함도 아니었다.
윤창수가 진혁에 대해 느끼고 있는 건, 인생사 산전수전 다 겪은 배테랑의 차분함, 그리고 당당함이었다.
역시 KBC 국장이 홍길동전 부활의 선봉장으로 내세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녀석 자알 생겼다. 꼭 내 젊을 때를 보는 것 같네.”
윤창수와 동년배인 한 배우의 말에 윤창수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내가 치매에 걸리고 나면 해야지. 안타깝게도 아직은 내가 자네 젊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아휴. 형님은 참.”
진혁으로 인해 잠시간 돌았던 묘한 긴장감이 조금은 풀려가려고 하는 때, 주요 배역들이 속속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정지안, 민서연, 그리고 여주인공 남수현까지.
진혁과는 달리 정지안과 남수현은 상대적으로 이미 중년 배우들이 잘 아는 배우들이었고, 서연마저 “장순이는 못 말려”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만났다.
젊은 배우들과 중견 배우들의 분위기가 좀 더 편안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정두일 PD와 한유경 작가가 입장했다. 이제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
“아니, 홍길동이란 놈이 여간 신출귀몰한 게 아니랍디다. 이번에는 충주 감영까지 털어갔다는 소문이….”
“어허. 이 사람이. 입조심하게! 무슨 치도곤을 치르려고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가.”
오랫동안 숱한 작업을 함께 해온 베테랑 연기자들답게 능숙하게 대사를 맞춰 가는 배우들.
“다들 왜 이리 서성대고 있는 겐가.”
여주인공 남수현 역시 경험 많은 배우답게 편안하게 녹아들어갔고.
드디어 등장부터 강렬한 주인공 진혁의 첫 씬.
백성의 고혈을 짜는 지방 탐관오리 관리의 집을 습격해 터는 장면이었다.
홍길동 패거리가 방비하고 있던 바깥 사병들을 제압하고 안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의관을 정제하고 홍길동을 기다리던 양반이 길동을 향해 노호를 발했다.
“네 이놈! 홍가야!”
“아이고, 깜짝이야! 영감, 밤이 깊습니다. 사방이 조용한데, 살살 얘기해도 다 들리오.”
진혁이 시크한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익살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당연히 하이스쿨2에서 보여준 이미지와도 완전히 다른 모습.
정지안의 입가가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삐죽거렸다.
평소의 진혁을 아는 정지안과 민서연이 가장 먼저, 그리고 하이스쿨2에서 진혁이 보여준 연기를 본 사람들이 그다음으로 놀랐다.
그냥 넉살 좋은 홍길동을 흉내 낸 연기가 아니었다. 이 연기만 본 사람이라면 진혁의 본래 캐릭터를 오해할만한 연기였다.
“네 놈이 혹세무민하여, 그 나름 의적 행세를 하는 모양이다만, 그래 봐야 도적은 도적일 뿐. 남의 것을 털어 구휼한다 하여 그게 과연 참된 정의겠느냐!”
“정의요? 으하하! 아이고야. 영감께서 뭔가 대단히 오해하신 모양이오.”
저거였구나.
민서연은 얼마 전 진혁이 처음으로 먼저 장난을 쳤던 세린의 뮤비 촬영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엔 제법 감동을 했더랬다. 그만큼 자신과 세린을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구나. 해서.
하지만 이제 와 드는 생각은. 그건 배역 때문이었겠구나.
늘 과묵하고 시크한 진혁에게 이미 넉살맞은 홍길동의 캐릭터가 스며들어 버린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홍길동의 모습은 마치 진혁의 본래 모습처럼 자연스러웠으니.
“소인 이리 넉넉한 집안을 터는 건 딱히 무슨 정의로움 따위가 아니요.”
“그럼, 무슨 이유란 말이냐?”
“그저, 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오.”
“뭐라? 오냐. 네 놈이 이제야 의적도 아니요, 정의도 아니요. 그냥 도둑놈임을 실토하는구나.”
진혁이 마치 대본리딩이 아니라 실제 연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입가를 비틀었다.
“내가 도둑놈인 건 맞는데. 진짜 도둑놈한테 도둑놈 소릴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소.”
“뭣이라!”
“영감은 백주대낮에 도둑질해서 혼자 다 처먹지 않소. 하여 다 같이 먹고 살자고 내 이리 겸손히 밤에 나섰는데. 너무 그리 빡빡하게 굴지 마시오.”
진혁의 연기가 얼마나 능글맞았던지, 상대하던 중견 배우의 표정이 파르르 떨렸다.
진혁의 연기에 빨려든 나머지 정말 조롱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런 표정이었다.
“영감이 그리 흠모하시는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길 ‘나눠 먹어야 탈이 없다’고도 하셨소.”
“네, 네 이놈! 네 놈이 옛 성현을 모독할 참이냐? 공자께서 어디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게냐!”
“어디 있을 텐데. 그런 말씀이 없다고?”
진혁이 빙그르르 미소를 굴리다가는. 순식간에 차가운 얼굴로 돌변하자마자, 조소하듯 툭 말을 내던졌다.
“없음, 말고.”
순간, 어지간한 연기에는 놀라 일이 없는 중견 연기자들의 입에서 신음 같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
상대 연기자 뿐 아니라, 주변의 공기까지 전부 빨아들이는 연기였다.
차가운 표정으로 얼어있던 진혁이 얼음을 깨 내듯 피식하고 상대를 비웃었다. 그리곤 다시 펼쳐내는 해학.
“자자, 얘들아. 여기 영감님 좀 매달아 드려라. 바로 앉아서는 생각이 안 나시는 모양이니, 거꾸로 달려 계시다 보면 혹 아느냐? 옛 성현의 말씀이 생각이 날지.”
진혁이 손바닥 뒤집듯 180도 돌변해서 펼치는 넉살에 현장의 배우와 관계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킥킥킥.”
원로 배우 윤창수도.
남수현과 대화를 나누던 중년의 여배우도.
캐스팅에 의구심을 표하던 다른 배우들도.
이 순간 꼭 같은 생각을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진혁의 상대 배우, 누구 못지않은 경력을 가진 중견 배우가 자기 호흡을 뺏겨 버렸다.
천재다. 저 아인 연기 천재야.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 어떤 씬이든, 그 씬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 버리고 마는 주인공의 자질. 그게 눈앞의 아이에게 있는 진짜 능력이었다.
대본리딩장의 연기자들이 진혁이 연기하는 동안 대본이 아니라, 진혁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증거였다.
하이스쿨2에서 주인공을 능가하는 씬스틸러로 이슈의 선두에 선 것은 단지 운이 좋았거나, 혹은 배역이 잘 맞았던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주인공으로 태어난 아이. 그 이유였다.
모두가 진혁의 연기에 놀라고 있을 때, 정지안은 홀로 참을 수 없는 흥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흠흠.”
참을 수 없이 삐져나온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찾아온 정지안의 차례.
평소 반쯤 풀려있는 정지안의 눈, 늘 나른한 듯한 그 표정이 순간 돌변했다.
“모두 들으라! 우리 활빈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들을 처단하고, 그 재산을 빼앗아, 빼앗긴 백성들에게 돌리려 함에 그 첫 번째 목적을 두었다.”
포효하는 듯 내어 뱉는 정지안의 대사.
“하여. 그 누구보다 올곧고 정의로운 신념을 가지고, 우리의 힘이 불의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소 어눌한 듯한 말투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완벽한 발성. 마치 현장에서 연설을 듣고 있는 듯한 몰입감.
“자신의 힘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운 자들이 있다 하니, 그 어찌 용서를 바라겠는가!”
“두목! 용서해 주시오! 배가 고파서 그랬소!”
한 템포의 쉼. 하지만 그 순간에 배인 서늘함을 현장의 모두가 느꼈다.
“배고픔에 무너지는 신념 따위, 배고픔에 무너지는 정의. 그것을 과연 정의라 부르겠느냐.”
참을 수 없는 광기와 분노를 억누르는 서늘한 음성.
“무너진 정의는 존재가치가 없는 법. 더 이상 정의를 모욕하지 말고.”
나직이 이를 가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살기를 내뱉었다.
“죽어라.”
한 마디 대사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현장의 모두가 자신의 가슴을 칼에 베인듯한 서늘함을 느꼈다.
모두가 이제야 실감했다.
두 천재의 격돌.
이 말이 단순히 드라마 마케팅을 위한 문구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 둘은,
이 드라마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