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8
108 피날레
* * *
피아노가 매우 강한 어조로 아르페지오(Arpeggio, 펼침화음)를 연주한다.
자유로운 분산화음.
곧바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트릴(trill, 해당음과 2도 높은음을 교대로 빨리하는 연주)이 ⌜황제⌟의 서막을 알린다.
옥타브를 넘나들며 장대한 스케일을 표현한다.
그 웅장함이.
그 화려함이.
이 연주자의 수준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황제⌟ 도입부에서 피아노의 첫 번째 카덴차는 그리 길지 않다.
잠깐 동안의 독주.
본격적으로 ⌜황제⌟에서 피아노가 진면목을 드러내는 건 ‘전개부’부터였다.
그런데 저 아이의 피아노는 ‘도입부’부터 코다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연주에 거침이 없는 수준이 아니었다.
⌜황제⌟를 이렇게 강렬하게 시작해버리면, 그 끝은 대체 어떻게 끝낼 생각이란 말인가.
3악장에 가서 피아노를 망치로 내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텐션으로··· 정말로 끝까지 연주할 수 있다는 거야?’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건 가능한 연주가 아니었다.
한평생을 피아노에 헌신하신 저기 앉아 있는 거장들이라면 모르겠다.
쇼팽과 차이콥스키, 퀸 엘리자베스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고서.
수백, 수천 번의 공연을 마친 저분들이라면 충분히 이런 연주를 해낼지도 모른다.
허나, 이 에틀링겐은 청소년 콩쿠르 아닌가?
하물며 저 아이는 만 13살이다.
이 콩쿠르의 막내가.
역대 최연소 참가자가.
모든 참가자 중에서 가장 강렬한 ⌜황제⌟의 도입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최선영은 소년의 연주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혹시 어린아이의 치기일까 봐.
아니면 해석을 어설프게 했을까 봐.
만약 도입부에서 100이라는 연주를 보여줬다면, 그다음 부분엔 150, 마지막엔 200의 연주를 보여주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클래식 음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과연··· 저 소년이 마지막까지 이 텐션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심장이 뛰었다.
손에 땀이 났다.
그런데 만약에.
진정으로 이 긴장감을 끝까지 이어갈 수만 있다면?
소년의 ⌜황제⌟는 에틀링겐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다.
독보적.
압도적.
그런 수식어가 어울릴 것이다.
최선영은 무심결에 침을 꼴깍 삼켰다.
4/4박자로 이어지는 피아노의 도입부가 끝나자, 오케스트라가 피아노에 상응하는 목소리를 낸다.
강렬했던 피아노에 걸맞은 강렬한 오케스트라였다.
현 5부가 일제히 같은 음을 낸다.
금관과 목관이 힘차게 도약한다.
팀파니의 리듬이 따라붙으며 거침없이 행진한다.
그 거대한 소리에 최선영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다들 미쳤어······. 13살짜리 애를 두고서······.’
베토벤은 이 곡에 모든 것을 담았다.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화려함의 끝을 보여줬고, 관현악법의 정수를 ⌜황제⌟에 압축했다.
영웅적인 면모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알려진 내림 마장조(E flat major)로 베토벤은 ⌜황제⌟를 만들었다.
베토벤의 의도만 본다면 이 해석이 맞을 것이다.
연주자 개개인의 실력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의도’만 본다면 말이다.
오케스트라가 영웅적인 모습을 뽐낸다.
곧이어.
숨을 죽이고 있던 피아노가 서서히 다시 등장한다.
오케스트라의 당당한 선율들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게.
전쟁통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황제를 보는 것처럼.
그 격차에 소름이 돋아났다.
‘다이내믹 표현이······ 이렇게 디테일하네.’
피아노는 멈추지 않았다.
화성의 변화와 함께 배치의 반전을 꾀한다.
막 잦아들기 시작한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상반되도록.
소년은 있는 힘껏 피아노 건반을 타건했다.
다리에 힘을 준 채로 상체의 힘을 이용해 피아노를 연주한다.
조금 전 오케스트라의 위용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
황제의 행진에 제일 앞에 서겠다는 듯.
그 위용을 당당히 보여준다.
화려함 속에 엿보이는 숭고함.
소년은 진정한 ⌜황제⌟를 연주해나갔다.
“······.”
최선영은 할 말을 잃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평가는 무의미했다.
콩쿠르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에틀링겐의 파이널 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이미······ 이런 연주를 보여주고 있는 연주자에게.
콩쿠르가 무슨 소용이고, 등수가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그저 소년의 ⌜황제⌟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순수하고 순수한 음악의 가치.
무대 위의 소년은 그러한 음악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2층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은 깊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던 여성.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미소가 절로 나온 것이다.
‘지난 연습 때보다도 나아졌네. 피아노도, 오케스트라도, 지휘도, ⌜황제도⌟. 그리고 그 모든 걸 만들어낸 건, 저 아이겠지.’
클로에 로랑은 소년을 바라봤다.
‘내 본능까지 건드린 ⌜황제⌟라······. 놀랍기만 하네. 근래에 저 정도 연주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이를 떠나서 말이야. 나도 다음 레파토리를 ⌜황제⌟로 선택해볼까? 재미있겠어.’
소년의 음악은 여러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황제⌟는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잘하고 못하고의 범주를 뛰어넘어버렸지.’
마치 거장처럼.
음악을 듣는 개개인에 따라 호(好)와 불호(不好)로 나누어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 저 소년의 연주를 듣고, 연주 자체에 비정한 평가를 내리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에틀링겐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클로에 로랑의 평가와 비슷했다.
‘환상적이군! 저 아이, 자신의 1, 2차 연주조차 아득히 뛰어넘었어.’
‘설마 이 콩쿠르 중에 연주 실력이 늘었나? ⌜템페스트⌟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아이의 ⌜황제⌟는 감탄밖에 안나오는군.’
‘에틀링겐의 오케스트라가 최선을 다할 줄이야······. 13살의 아이가 저들을 움직이게 할 줄은 몰랐어.’
‘하우저와 리히터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보통의 참가자들은 피아노만 연주하기도 바빴을 텐데.’
‘황제의 행군. 말 그대로 소년은 ⌜황제⌟를 연주하고 있구나.’
“······.”
안나 베커의 스승인 요나스 브란트는 심사를 하다 말고 궁전의 창문을 바라봤다.
아치형 모양의 창 안으로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그 햇빛이 무대 위에 내려앉는다.
화답이라도 하듯 검은색 피아노가 반짝인다.
오케스트라의 금관이 다채롭게 빛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황제⌟도······.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음악이란 이런 것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은 감탄한다.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햇빛에 미소 짓는 에틀링겐의 꽃들처럼.
모든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얻게 된 축복 중 하나.
이에 거짓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요나스 브란트 역시, 소년의 음악을 알아봤다.
안나 베커의 스승으로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속으로 소년의 ⌜황제⌟를 평가했다.
‘······ 아름답군. ······ 무척이나.’
감점 요소를 따지거나 해석의 가치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소년의 음악은 아름다웠다.
그 단어면 충분했다.
에틀링겐 콩쿠르의 마지막 공연을 보기 위해, 모든 파이널 진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무대 위에 있는 소년을 제외한 9명의 파이널 진출자.
그들은 미소를 짓기도, 인상을 쓰기도, 웃기도, 울기도 하며 무대를 바라봤다.
금발의 여자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무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안나 베커의 눈가는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1악장이 끝나고, 우아한 선율이 시작되는 2악장.
조성의 변화를 받아 고조된 악상을 피아노가 연주하면서부터.
소년이 표현하는 애절한 선율은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건, 곧이어 맞이할 이별과 결부되며 소녀의 감정을 북받쳐 오르게 만들었다.
‘이제 마지막 악장······.’
‘나는 네 음악을 더 듣고 싶은데······.’
‘너와 음악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조금만······.’
‘조금이라도 더 길게 연주해줘······.’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 있다면, 소녀는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음악은 흘러가기에 아름답다.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기에 가치가 있다.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는 녹음된 음악과 다르게.
연주자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직접 듣게 되는 날 것의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 고유했고,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났다.
안나 베커는 조금 전, 한서진과 악수하던 때를 떠올렸다.
‘잊지 못할 콩쿠르······.’
안나 베커는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영원히.
* * *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60여명이 내는 오케스트라 소리에 내 심장이 반응한다.
내 손은 멈추지 않았고, 지휘자의 지휘봉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곧 2악장이 끝난다.
⌜황제⌟의 2악장과 3악장은 쉼 없이 진행된다.
이건 내 해석이나 의지로 결정한 사항이 아닌, 베토벤의 지시사항이었다.
베토벤은 피아니스트를 극한으로 내몰았다.
오케스트라 역시 극한으로 내몰았다.
2악장이 끝나자마자 3악장이 바로 시작됐다.
6/8박자의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
피아노의 선율이 폭발하듯 펼쳐진다.
하강 음형과 딸림화음이 화려하게 ⌜황제⌟를 장식한다.
베토벤은 이 곡을 직접 초연하지는 못했다.
앞선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이 곡만큼은 다른 피아니스트의 손을 빌려야 했다.
청력 이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
과연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심지어 베토벤은 ⌜황제⌟를 작곡할 당시 전쟁을 겪었다.
그 전쟁 때문에 후원도 끊기게 된다.
청력 문제는 항상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대곡을 만들어냈다.
불굴(不屈).
⌜황제⌟는 그의 신념이 엿보이는 곡이었다.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멋진 인물이지. 그러니까 서진이 너도 그의 음악에 더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해. 언젠가 네가 큰 무대에서 베토벤을 연주하게 됐을 때,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그래야 관객들도 네 연주를 이해해줄 테니까.’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결국엔 구조대가 안 오네. 그럼 배를 만들자. 너랑 나 둘이면 못 할 것도 없어. 멋지게 이곳을 탈출하는 거야.’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서진아. 너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인생이란 그 자체로 빛나는 거니까. 네 성과와 상관없이 너는 이미 훌륭한 음악가야. 내가 보증하마. 이 마크 밀러가.’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나 혼자라면 이곳에서 오래 못 버텼을 거야. 네가 있어서 수월했지. 네가 음악을 하는 아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야. 음악. 우리는 음악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봐.’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 이 망망대해도 언젠간 끝이 보일 거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이 세상 어디에나 길은 있어. 쇼팽 콩쿠르에서 좌절한 내가 다시 음악 공부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이곳을 나갈 수 있어.’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너와 만나 즐거웠다. 내 영원한 동료. 내 영원한 이해자. 내 영원한 친구. 서진아. 앞으로 네게 찬란한 길이 열리길 바라마.’
무인도에서 나와 작은 나무배에 실려 하염없이 무풍지대에 갇혀 있을 때.
내가 더위에 지쳐 잠들어있을 때.
밀러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의 말이 무심결에 떠올랐다.
내 영원한 동료.
내 영원한 이해자.
내 영원한 친구.
밀러 아저씨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바다에서.
나와의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그런데도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노래를 불러줬다.
그 노래가 선명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 아직 남아 있었다.
밀러 아저씨의 음악이 내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밀러 아저씨 안에도 다른 사람의 음악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다른 사람도 또 다른 사람의 음악이 깃들어 있었겠지.
베토벤의 음악은 그렇게 나에게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한다.
나는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한다.
그때, 오케스트라의 현 5부가 거칠게 등장했다.
‘······ 리히터 선생님.’
드레스덴의 선율은 나를 봐주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주도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밀러 아저씨가 내게 음악을 알려줄 때처럼.
나를 동료이자, 이해자이자, 친구로 생각했던 음악가 마크 밀러처럼.
막스 리히터는 나를 한 명의 음악가로 봐줬다.
나는 그에 응답했다.
⌜황제⌟의 숭고한 걸음은 언제나 피아노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나는 에틀링겐의 오케스트라보다 한 걸음 앞서나가야 한다.
이로써 베토벤의 음악이 완성될 것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된다.
⌜황제⌟의 종장을 향해서.
나는 강렬하게 건반을 두드렸다.
.
.
.
‘그래. 그렇게 해야지.’
막스 리히터는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에틀링겐 오케스트라의 악장은 활을 강하게 내리그었다.
그에 따라 현 5부가 동시에 웅장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경쟁한다.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 긴장감 속에서 긴밀함이 만들어진다.
리드미컬하게 트릴을 연주하는 피아노.
그에 맞춰 오케스트라가 론도 주제를 서서히 마무리해갔다.
레온 하우저의 지휘봉이 크게 움직이며 코다의 시작을 알렸다.
막스 리히터는 소년을 쳐다봤다.
그의 작은 등을 바라봤다.
믿기 힘든 연주를 보여주는 아이.
믿기 힘든 연주를 보여줬던 친구.
둘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래서 막스 리히터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과거의 상실에 슬퍼하지 않았고, 현실의 놀라움에 집중했다.
‘밀러. 자네를 닮은 아이가 나와 함께 연주하고 있다네. 이곳 에틀링겐에서.’
리히터는 눈을 감았다.
아이가 연주하는 ⌜황제⌟의 걸음이 저 앞까지 나아간다.
‘자네와 언젠가는 함께 ⌜황제⌟를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었지.’
마크 밀러는 젊은 나이에 피아노에서 손을 떼게 됐다.
그래서 함께, 규모가 큰 곡을 연주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작게나마 한을 풀게 됐네. 이 아이는 자네를 닮았네. 자네의 음색을 닮았어. 이제 이건 확실하다네.’
아이의 음색이 밀러의 음색과 100% 일치한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밀러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그 음색의 일부가 아이에게 깃들어 있었다.
저 아이는 그걸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보고 있는가? 자네의 음악이 이곳에 남아 있다네. 치유를 연주할 수 있는 아이가 유럽에 나타났네.’
아이의 피아노가 거대한 스케일을 일순간에 표현한다.
저음부터 시작된 선율이 순식간에 고음까지 올라간다.
피아노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로 화려한 피날레.
아이의 손이 마침내 건반에서 떨어졌다.
피아노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막스 리히터는 활을 최대한 강하게 당겼다.
⌜황제⌟의 위용을 낱낱이 보여준 저 연주자를 위해.
에틀링겐의 오케스트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금관과 목관, 현 5부와 팀파니가 같은 음을 연주한다.
레온 하우저가 지휘봉을 절도 있게 흔든다.
팀파니가 마지막을 알린다.
현이 일제히 멈춘다.
6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소년의 등이 작게나마 들썩인다.
찰나의 정적이 공간을 채운다.
⌜황제⌟는 화려한 음악이다.
명쾌함과 밝음이 돋보이는 협주곡.
그렇기에 관객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에틀링겐에서 최고의 연주를 보여준 건.
바로 이들이라는 사실을.
⌜황제⌟의 음악보다 거대한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누구도 눈치를 보지 않았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음악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얻게 된 축복 중 하나다.
이걸 굳이 이해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연주자의 마음이 전해졌다.
감정이 전달됐다.
아이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모든 건 명확했다.
레온 하우저가 지휘대에서 내려가 아이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손을 높게 들어 올린다.
에틀링겐의 악장은 아이의 곁으로 가서, 어깨 위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관객들의 끝없는 환호 속에서.
마침내 피아니스트가 된 소년은.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을 말없이 바라봤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