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47
147 최고의 친화력
* * *
싱가포르 국립병원.
그곳의 9층 병동은 조금 시끌벅적했다.
“내일 여기 잠깐 들린다고 그랬나?”
“인사부터 하러 오겠다고 한다네. 린 선생님께서 그렇게 들었대.”
“그런데 그 아이가 피아니스트가 됐다는 게 믿겨져? 완전 작은 아이였는데 말이야.”
“나도 그 말 듣고 엄청 놀랐었잖아.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괜히 흐뭇해지는 거 있지?”
“나도. 나도. 엄청 기특하게 느껴지더라!”
“빨리 보고 싶네. 요즘 그 아이 생각하고 있다 보면 일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니까?”
“그러면 여러분들. 간호기록지 정리부터 서둘러 주시는 건 어떨까요? 곧 인계 시간도 다가오는데 말이죠~”
지나가다가 한마디를 스윽 던지는 수 간호사 린.
간호사 데스크는 “네~”라는 대답과 함께 조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907호.
예전에 서진이가 지냈던 병실.
하지만 지금은 ‘엠마 우드’라는 이름표가 문에 꽂혀있었다.
똑똑. 노크를 한 뒤 들어가자 침대 위에 있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린다.
린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찍 일어났네? 책 보고 있었어?”
“네. 그런데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엄마가 올 때 물어봐야 할까 봐요.”
“어떤 책인데?”
아이가 책 제목을 슬쩍 보여주자 린은 큭큭 웃었다.
“그러게. 7살한테 고전이라니. 너무 어려운 책이다.”
“그렇죠? 가끔씩 이상한 책을 골라오신다니까요. 그냥 재미있는 책이면 충분한데 말이에요.”
린은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능숙하게 체온과 혈압을 체크했다.
남아 있는 수액을 보고 시간을 기록했고, 아이의 상태도 직접 물어봤다.
“저는 괜찮아요. 늘 똑같아요.”
“너무 좋네. 이러다 보면 금방 퇴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정말이라니까? 엠마도 이제 내 성격 잘 알지 않아? 나는 거짓말도 잘 못 해. 거기에다가 나는 사실만 말하는 ‘수 간호사’잖아?”
“······.”
유쾌하게 말하는 린.
엠마는 별말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남색 커튼이 치마처럼 흩날리나 싶더니 미지근한 공기가 얼굴에 그대로 쐬어진다.
린은 창문 쪽으로 가서 커튼을 활짝 열었다.
“내가 이야기했었나? 이 병실에서 지내던 한 아이가 있었는데······.”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고 실종됐는데도 살아남은 희망의 아이. 혼수상태로 입원한 그 아이는 하루 만에 회복했고, 이 병원을 나갈 수 있을 만큼 금방 건강해졌다는 이야기요?”
“맞아. 내가 해줬었나 보네?”
“아뇨. 다른 선생님들한테 들은 이야기에요. 지금까지 7번은 들었던 것 같아요.”
“큭큭. 그랬구나. 그러면 그 아이가 피아니스트가 된 이야기는?”
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들었어요. 그런데 저랑은 관련이 없는 이야기예요. 저는 피아노를 잘 모르거든요.”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병원에서 나간 그 아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됐는지.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말이야.”
“저는······.”
엠마의 눈치를 살피던 린이 병상에 걸터앉는다.
그러곤 스마트폰으로 한 영상을 찾아 보여줬다.
CNN에 올라온 한서진 피아니스트의 인터뷰 영상.
재생 바를 뒤로 넘기자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을 들으며 린이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 연주를 직접 들어본 건 나도 딱 한 번밖에 없어. 이곳 로비에서 ⌜트로이메라이⌟라는 곡을 연주했었거든. 그런데 그 연주가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말이야.”
“······.”
“이 연주도 그렇지 않아? 라벨의 ⌜거울⌟이라는 곡이래. 엠마도 곧 그 아이의 공연을 직접 볼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나중에 엠마가 병원을 나가게 되면······.”
린은 창밖을 바라봤다.
“엠마도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알았지?”
“······.”
엠마는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토끼 인형을 끌어안았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아름다운 선율.
어딘가 뭉클해지는 것 같은 감정.
엠마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금방 시선을 사로잡혔다.
화면 속의 연주가 아쉬운 듯 끝이 났을 때.
엠마는 린의 얼굴이 미소 지어질 만한 말을 했다.
“저기······. 린 선생님. 이 연주 한 번만 더 들어봐도 돼요?”
“물론이지. 그리고 얼마든지.”
린은 ‘희망의 아이’의 연주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했다.
* * *
어젯밤 늦게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장시간 인터뷰까지 하게 되는 바람에 우리는 공항 인근의 호텔에서 임시로 숙박을 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원래 묵기로한 ⌜Schmid⌟에서 제공하는 호텔로 이동하게 됐다.
싱가포르의 랜드 마크이자 마천루.
3개의 건물 최상층에 거대한 배 모양의 스카이파크가 얹어진 구조의 호텔.
우리는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입구에서 내렸다.
수연이는 고개를 최대한 위로 꺾으며 건물 끝을 바라봤다.
까닥하다간 넘어질 것 같아 수연이 등을 손으로 바쳐줘야만 했다.
“오빠! 진짜로 배가 건물 위에 있어!”
“그러게. 신기하다. 그치?”
“우와! 입이 안 다물어져!”
눈을 반짝이는 수연이.
수연이의 놀라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엄마한테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싱가포르는 12월인데도 진짜로 덥네. 그게 정말 신기해! 나는 한 평생 ‘겨울인 12월’만 경험해봤는데 말이야. 햇살도 눈 부셔. 따끈따끈해!”
수연이가 해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내가 잡아 주고 있는 걸 알고는 내게 슬쩍 몸을 기댄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어머니는 수연이에게 경고했다.
“수연이 너 계속 오빠한테 어리광 피울 거야?”
“조금만요~ 너무 신기해서 그랬어요.”
“저도 괜찮아요. 솔직히 저는 수연이랑 하루종일 이러고 놀 수도 있는걸요.”
“히히. 역시 오빠밖에 없네.”
“하여간······.”
우리 남매는 부모님 허락을 받고 호텔 근처를 잠시 구경했고, 수연이는 한껏 들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오빠.”
“응?”
“오빠는 안 신기해? 12월이 여름인 건 오빠도 처음이잖아? 그런데도 엄청 차분해 보여.”
나는 무인도에 있을 때를 잠시 떠올려봤다.
끝없이 이어졌던 여름.
무자비하게 내리쬐던 태양을 생각하면 아직도 살갗이 익어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곳이 항상 여름이었기에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한 번이라도 겨울이 왔다면 많이 힘들었겠지.’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름이 더 친숙했다.
겨울보다도 훨씬 마음이 편안해지는 계절이 내게는 여름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이에게 솔직히 대답을 해줬다.
“오빠는 여름이 더 좋아서 그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나 봐.”
“그래? 으음. 오빠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하나 더 알게 됐네.”
작게 중얼거리던 수연이는 작은 곰돌이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슬쩍 봤더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기록이 돼 있다.
덕분에 괜히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김수호 매니저님께서 곧바로 우리를 호텔 로비로 안내해주셨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막 올리고 있는 그때.
“어? 너 희망의 아이 아니니?”
“맞나 보네!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다!”
“피아니스트가 됐다더니 엄청 멋있어졌네. 싱가포르에 잘 왔어!”
“이번에 네 공연 겨우겨우 예약했거든. 멋진 공연 기대하고 있을게~”
나를 알아봐 주시는 싱가포르 분들.
나는 한 분 한 분하고 인사를 나눴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수연이가 한마디를 한다.
“오빠는 여기에서 진짜 스타가 된 것 같아. 어제 공항에서도 그랬고. 그래서 그런지······.”
수연이는 내 귀를 빌려달라고 하더니, 조금 더 멋있어 보인다며 나를 치켜세워줬다.
나는 농담을 해봤다.
“그래봤자 오빠가 수연이한테 줄 건 없는데?”
“크흠! 괜찮아. 진심이었으니까. 대신 손을 줬으면 좋겠어. 여기 너무 넓어. 길을 잃어버리겠어.”
내게 손을 뻗어오는 수연이.
“그러겠네. 조심해야겠다.”
“그렇다니까?”
나는 동생 손을 꼭 잡아줬다.
어제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공항에서 그렇게 환대를 받았었는데.
이곳에서도 한 번 더 이런 상황이 생기다 보니, 괜히 더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우리가 있는 로비에 호텔 총지배인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와주셨다.
“방금 연락을 받아서요. 안내는 제가 직접 해드리겠습니다.”
거기에다가 객실도 업그레이드를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그것도.
“스위트 룸으로요?”
“해당 객실에만 피아노가 있으니까요. 물론 연습실을 따로 쓰시겠지만, 편하게 연습하시기는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방음이 잘 되는 곳이라 24시간 언제든 연주하셔도 상관없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희 호텔에서는 진작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라서요. 오히려 저희가 ‘희망의 아이’를 모실 수 있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
이 호텔의 가격을 대략 알고 있는 부모님과 나는 동시에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는 시선만으로도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직 수연이만이 “오빠. 스위트 룸이 뭐야? 달콤한 방? 사탕이 있나?”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수연이에게 ‘스위트 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줬고, 김수호 매니저님께서는 내게 살짝 귀띔을 해주셨다.
“대한민국보다 싱가포르에서 ‘희망의 아이’에 대한 보도가 훨씬 많이 됐거든. 아마 그 배려 차원인 것 같네. 객실에서 피아노도 쓸 수 있다고 하니, 이 정도 배려는 받아도 될 것 같아.”
“그래도 얼떨떨하긴 하네요.”
“그만큼 네가 싱가포르 분들에게 의미가 있으니까. 대신, 그만큼 더 멋진 공연을 보여주긴 해야겠지만 말이야.”
김수호 매니저님은 나중에 일정에 맞춰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로비에서 나가셨다.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 랜드마크의 스위트 룸으로 올라갔다.
내 설명을 듣고도 긴가민가해 하던 수연이는 객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 진짜로 방이 여러 개야! 피아노도 있어! 오빠 연습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 우와! 그리고 바다도 보여!”
내 손을 잡고 객실 안을 도도도 돌아다니기 시작한 수연이.
나는 수연이를 진정시킨 뒤에 총지배인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번엔 부모님도 함께 감사의 뜻을 표했다.
“별말씀을요. 싱가포르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저희가 더 감사한걸요.”
“사실, 도움은 제가 싱가포르 분들께 받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곳 의료진분들하고 이야기를 할 때도 총지배인님처럼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은 종종 희망을 잊어버리게 되죠. 왜냐면 희망에 가까운 일들은 자주 생기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희망의 아이’는 이렇게 살아 돌아왔잖습니까?”
그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멋진 음악가가 되어서요. 덕분에 저희는 잊어버린 희망을 다시 품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저희가 꼭 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 그렇습니까.”
“물론이죠.”
내게 악수를 청하는 총지배인님.
나는 그 손을 꼭 잡아드렸다.
그리고.
약소한 보답의 의미로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케일부터 연주를 해봤다.
그럭저럭 관리가 잘 된 피아노.
총지배인님의 말씀처럼 편하게 연습하기에는 충분한 피아노였다.
조금은 부드럽게 연주를 시작해봤다.
따뜻함이 깃들어 있는 주제가 피아노에서 흘러나온다.
왼손의 아르페지오가 오른손의 경쾌한 멜로디를 만난다.
듣기만 해도 미소가 나올 것 같은 선율.
나는 이곳 싱가포르에서 이런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수연이가 내 등 뒤에 있는 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짐을 옮겨주신 벨맨은 저 문 앞에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은 적더라도 이곳은 무대였다.
내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고.
그들이 내 음악을 듣길 원한다면.
이곳은 에스플러네이드나 카네기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깊게 울림을 주던 화음이 일순간 흩어진다.
그리고 그 화음은 곧이어 커다란 선율이 되어 돌아왔다.
내 생각대로.
지금 이곳, 싱가포르에 다시 오게 된 내 감정이 이 음악과 엮인다.
조금은 아쉽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연주를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중간에서 연주를 멈췄다.
총지배인님께서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뜬다.
아무 말 없이 스위트 룸의 한켠에 서서 잠시 시간을 보내던 그는 피아노 앞까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내 앞에 선 총지배인님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희 호텔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싱가포르를 잊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서진 피아니스트님.”
* * *
싱가포르 국립병원 로비에 앉아있던 한수연은 주변을 살폈다.
많은 환자분들, 그리고 의료진 선생님들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왼쪽엔 엄마, 바로 오른쪽엔 아빠가 앉아있었다.
오빠는 로저스 디렉터님과 김수호 매니저님을 따라갔다.
엄마의 설명에 의하면 오빠가 회의 겸 인사를 하러 간 거라 조금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오전엔 호텔에서 짐을 풀고 연습하고, 낮에는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리허설도 했었는데.
무지무지 바쁜 오빠였다.
한수연은 엄마와 아빠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오빠 이러다가 몸 상하겠어. 걱정이야. 나중에 내가 어깨라도 주물러 줘야 하려나?’
손을 스스로 조물조물해보던 한수연은 자신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병원의 로비는 엄청나게 넓었다.
분수가 있고, 편의점처럼 보이는 가게도 있고, 피아노까지 있다.
아마도 저 피아노를 며칠 뒤에 오빠가 연주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피아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한 언니가 보였다.
‘나보다 한 뼘 정도 크려나?’
환자복을 입고 있는 언니였다.
그 언니는 옆구리에 토끼 인형을 끼고 있었는데, 주위를 살피는 걸 보아하니 곧 피아노를 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수연은 엄마한테 자리를 옮기자고 부탁했다.
“피아노 옆으로?”
“네. 가까운 데서 구경하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수연이도 이제 피아노를 많이 좋아하게 됐나 보네?”
“크흠. 모두 우리 오빠 덕분이죠.”
“큭큭. 그래.”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피아노 옆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도 저 언니는 아직도 피아노 근처에서 기웃거리기만 했다.
한수연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피아노 도둑?’
천만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그 언니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다가 몇 번인가 멈칫거리다가 한 음을 누른다.
다시 한 음.
또다시 한 음.
다만, 그게 연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표정은 무척 밝아 보였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 건가?’
최근에 오빠에게 배운 젓가락 행진곡을 마스터한 한수연이었기에, 언니의 행동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엄마에게 다시 부탁을 해봤다.
“엄마. 혹시 저 언니 연주하는 거 제가 알려주고 와도 될까요?”
“응? 수연이가?”
“네. 저 언니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도와주고 싶어요.”
엄마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대신 엄마도 같이 가도 되지?”
“물론이죠~”
엄마와 함께 도도도 걸음을 옮긴 한수연은 그 언니의 어깨를 콕콕 찔러봤다.
“@#$? #$?”
영어로 말하는 언니.
하지만 한수연은 기죽지 않았다.
오빠에게 배운 영어가 있었으니까.
‘우리 오빠는 무려 내 발음도 고쳐줬어. 완벽하게 말이야.’
겁날 게 없었다.
“안녕. 나는 한수연이라고해. 이름이 뭐야?”
잠시 머뭇거리던 언니는 간신히 대답했다.
“저기······. 나는 엠마 우드야.”
“엠마 언니구나.”
“응. 그런데 왜?”
“으음.”
한수연은 오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허공에 연주를 해봤다.
다행히 엠마 언니는 그 뜻을 바로 알아차려 줬다.
“연주? 연주하고 싶어?”
“같이.”
“같이?”
“응! 같이!”
“······?”
한수연은 냅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엠마 언니 옆에 딱 붙어서, 오빠와 함께 갈고 닦았던 젓가락 행진곡을 보여줬다.
곧이어, 한수연은 엠마 언니에게 따라서 연주를 해보라는 손짓을 해봤다.
처음에는 놀라나 싶던 엠마 언니는 어느새 어설프게나마 젓가락 행진곡을 따라 칠 수 있게 됐다.
2,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일.
활짝 웃는 걸 보아하니, 역시 엠마 언니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던 게 맞는 것 같았다.
“잘했어! 엠마 언니!”
“응! 정말 고마워! 피아노를 #@$%. #$%#$ !@#$! *^&*$% &xx@!”
“으음······?”
한수연은 하는 수 없이 엄마를 쳐다봤다.
큭큭 웃던 엄마는 곧 영어를 통역해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떤 피아노 연주를 보게 됐다는 엠마 언니.
그 연주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어서,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바람에 몰래 로비에 나와봤단다.
“아하. 그렇구나. 나도 오빠 연주를 듣는 일이 많아서 그게 무슨 느낌일지 알 것 같아. 그래서 언니는 몰래 로비로 나왔구나. 몰래······. 그런데 몰래라고 그랬어? 엄마 몰래라고요?”
엄마와 동시에 눈이 마주친 한수연.
엠마도 자신이 말실수한 걸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엠마 우드.
한수연은 엠마가 떠나기 전에 서둘러 엄마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우리 애가 너랑 친구가 되고 싶다는데?”
“네? 저랑요?”
“응. 피아노 연주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네. 꼭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대.”
“그······.”
한수연은 어느새 활짝 웃으며 엠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고.
엠마는 고민을 하다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아주게 됐다.
최고의 친화력을 자랑하는 한수연 만 5세.
‘히히. 내가 피아노를 알려줄 만한 언니가 생기다니.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틈틈이 알려줘야겠어. 오빠도 이 병원에 자주 올 것 같으니까 딱이네.’
하루 종일 CNN 인터뷰 연주 영상을 보다가 한서진 팬이 되어버린 엠마 우드 만 7세.
‘어? 그러고 보니 얘가 내 첫 친구이려나? 나는 그동안 병원에만 있었으니까······.’
그 둘은 갑자기 친구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