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제이드가 생명의 숲에서 기생의 악마를 제거하던 그 순간.
제국 북부, 베르딘 평원에는 수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이 진군하고 있었다.
목표는 하나.
굴라그 산맥에서 발생한 악의 무리를 토벌하는 것.
인류의 안녕을 위해.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의 위신을 위해.
혹은 자신의 입지를 높일 공적을 위해서.
각기 다른 이유를 지닌 채, 연합군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으며 나아갔다.
각 국가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이끌고 용맹하게 앞으로 진군하는 그때.
한 지휘관만은 얼굴을 구긴 채 진군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미하일 그란디스.
마누스 왕국군이 사령관이자, 제이드의 친우였다.
미하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군대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모든 것이 멈추고,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도 그의 심장은 쿵쾅쿵쾅, 거칠게 뛰고 있었다.
‘제길······ 이대로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전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숱한 전쟁을 겪어봤으니까.
미하일이 진군을 주저하는 이유는, 이 길의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대로라면 우리는······ 아니, 연합군은 전부 죽는다.’
지금 진군하는 이 길이,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 길 끝에는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연합군은 굴라그 산맥에 발생한 1천 마리의 마수를 처치하러 모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미하일의 조력자에게서 들은 바로는 무려 5천 마리에 달하는 상급 마수들이 산맥에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연합군의 후미가 위치한 방향, 생명의 숲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마수화된 짐승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마저 전해 들었다.
즉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궤멸(潰滅)이다.
미하일이 고삐를 꽉 쥐었다.
어찌 겁먹지 않을 수 있는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들을 이끌어야 하는 지휘관이, 사지(死地)로의 진군이라는 걸 알고서도 말고삐를 돌릴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미하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후우······.”
뜨거워진 숨을 내뱉자 차가운 공기에 새하얀 김이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동시에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뜨거워진 미하일의 머리가 다시금 차갑게 진정되었다.
‘제이드. 네가 해내야 한다.’
생명의 숲.
그 안에 봉인되어 있다는 악마를 처치하러 간 제이드.
숲의 악마를 처치하지 못한다면, 이 함정을 완벽히 파훼할 수 없다.
동시에 마누스 왕국군의 참전하지 않는다면, 대륙의 연합군이 궤멸하는 걸 막을 수 없다.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두 병력 모두 사지로 들어간 상황.
기사 미하일은 제이드가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사령관 미하일은 냉철하게 최악을 대비해야만 했다.
제이드가 실패하거나, 제때 도착하지 못할 때의 수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민했음에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제길. 이걸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이냐.’
애초에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마수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굴라그 산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연합군의 진군 속도가 더욱 더뎌졌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애석하게도 연합군의 진군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에 박차를 가한 연합군은 베르딘 평원을 벗어나, 굴라그 산맥의 초입에 진입했다.
“하하! 인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요!”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깟 마수 천 마리 따위, 이 역사적인 대병력 앞에서는 하룻강아지들이지.”
“사실상 제국이 국가의 화합을 도모하는 게 아니겠소?”
몇몇 지휘관의 이야기에 미하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제길.’
미하일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펼쳐진 드높은 산등성이들을 바라보았다.
눈이 쌓여 새하얀 산봉우리 곳곳에는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산맥과 먹구름이 햇빛을 가렸고, 짙은 그림자가 연합군의 기나긴 행렬을 완전히 잠식한 모습.
그 모습이 미하일은 어딘가 꺼림칙하게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꺼림칙한 곳이 맞았다.
‘이미 산맥의 민족들은 몰살당했다고 했었지.’
세계관측자.
오래전부터 숨어 있는 악과 맞서 싸워온 그들의 말에 따르면, 굴라그 산맥의 소수민족들은 마수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살점들을 포식한 악마들과 마수들은 분명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연합군이라는 이름의······ 다음 만찬을 말이다.
이후, 다시금 허기가 진다면.
그때는 산맥을 내려와 이 땅의 모든 것을 잡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
·
·
그날 밤.
연합군의 진군은 달이 차오르고서야 멈춰 섰다.
그들이 멈춘 곳은 굴라그 산맥의 한 중턱.
“밤이 오고 있다! 산의 바람은 거세니까 어서 천막을 치라고!”
“불이 꺼지지 않게 바람막이를 설치해!”
차갑고 날카로운 눈보라를 피해 연합군은 근처의 협곡 입구에 야영치를 설치했다.
곳곳에서 피운 모닥불에는 병사들이 둘러앉아 언 발을 녹였고.
설치된 막사 내부에서는 각 국가의 지휘관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언 몸을 데웠다.
고된 행군 때문이었을까.
휴식을 취하는 연합군 진영 곳곳에서는 긴장감이 풀렸는지, 경계망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빈틈을 역이용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기척을 죽여라.”
“예.”
바로 마누스 왕국의 정예 수색병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여인의 이름은 레이첼.
미하일의 부관이자 수색병들을 이끄는 조장이었다.
그들은 거세게 부는 눈보라에 몸을 숨기며 협곡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굴라그 산맥의 조사.
바로 미하일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레이첼은 서릿발이 부는 설산을 바라보며 그녀는 하달된 임무를 떠올렸다.
– 이 토벌 자체가 제국의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너희는 산맥 곳곳에 매복된 적이 없는지 수색하도록.
– 단 제국군의 눈에 띄어서는 절대 안 된다. 제국군의 내부에는 악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녀의 상관인 미하일은 악마나 마수의 습격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 상황이 제국의 함정이라면 악마의 아가리로 들어온 셈이다.
그렇다면 언제 그것의 이빨이 닫힐지 모른다.
“상황 참 좆같군.”
그렇기에 레이첼은 수색병들을 이끌고 제국의 눈을 피해 야영지 밖, 산길을 올랐다.
사브작. 사브작.
발목까지 쌓인 눈을 넘어 산을 오르는 일은 꽤 고행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을 포함한 수색병들은 정예 중의 정예.
고작 환경의 문제로 난항을 겪을 이들은 아니었다.
다만······
‘······저들은 괜찮을지 모르겠군.’
레이첼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수색병들 사이에 섞여 산을 오르는 로브를 쓴 이들.
미하일이 도움을 줄 것이라며 레이첼에게 붙여준 자들이었다.
바로 세계관측자였다.
물론 레이첼은 이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관이 붙여준 이들인 만큼 믿을 수 있고,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산길이 가파릅니다. 조심하십시오.”
“······발목을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세계관측자들은 레이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랐다.
발목까지 쌓인 눈은 어느새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수색조는 조심스럽게 쌓인 눈을 헤치며 길을 찾아 올랐다.
그러던 그때.
“······마기?”
세계관측자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휘날리는 눈보라에서 희미한 마기를 느낀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죠?”
“마기······ 마기를 느꼈어요.”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입니까?”
“확실해요. 근처에서 희미한 마기가 느껴져요.”
마기라 하면 악마나 흑마법사들이 흘리는 삿된 기운.
‘그것이 이 근처에서 느껴진다고?’
그렇다면, 악이 지근거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미하일의 예상대로 놈들은 야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다.
레이첼은 얼굴을 구기며 그들에게 물었다.
“어디죠? 그 방향이.”
“······저쪽이에요.”
마기를 감지한 세계관측자는 잠시 얼굴을 구기더니 조심스럽게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절벽이 이어지는 곳.
협곡의 상류 방향이다.
레이첼이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니 협곡 입구 쪽에서 작은 불빛들이 보였다.
연합군의 야영지가 작게 보이는 것이다.
즉,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협곡 안쪽에 적이 있다?”
레이첼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연합군은 매우 위험하다.
당장이라도 협곡의 길을 따라서 악의 군대가 들이닥칠 수도 있다.
‘야영지 위치가 매우 좋지 않아. 이것도 놈들의 함정일 수도 있겠어.’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거에 들이닥치기 좋은 장소에 야영지를 마련한 것이리라.
“더 지체하면 안 되겠군.”
레이첼을 비롯한 수색조와 세계 관찰자들은 곧장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진입했을까.
“······이건?”
레이첼 또한 눈보라 사이로 어떠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한 마기였다.
간간이 희미한 울음소리마저 들려온다.
그에 다른 세계관측자들은 물론이거나와 수색병들도 하나둘씩 얼굴이 굳었다.
레이첼은 잠시 멈춰서서 수색병들을 바라보았다.
“엘런. 헤럴드. 너희는 먼저 사령관께 향해라. 이곳에 무엇이 있는 게 확실하니, 이곳의 위치를 알리도록.”
“예.”
이미 이곳에 무언가 있다는 건 확인한 상황.
만일에 대비해서 두 명은 보내고 나머지들과 함께 안쪽을 살필 생각이었다.
호명된 수색병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레이첼의 물음에 세계관측자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악마의 흔적을 찾았다.
몸을 사릴 때가 아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계속 가보죠.”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브작. 사브작.
휘오오오.
눈을 밟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들은 말없이 빠르게 이동했다.
적들의 모습,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무슨.”
두 절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협곡.
그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존재.
협곡 위에 떠 오른 만월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가시고.
달빛이 협곡을 비추자, 거대한 그림자가 검은 강물처럼 협곡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내 보이기 시작하는 그것의 모습.
십수 개의 붉은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원숭이처럼 생긴 괴물.
아니, 악마였다.
“······.”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존재.
본능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육신.
후우우웅.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그 거대한 덩치에 힘없이 바스러진다.
그런 눈들은 달빛에 반짝이며 그 아래의 협곡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제야.
“맙소사.”
레이첼의 눈에 들어오는 절벽 아래, 협곡을 매우고 있는 무수한 것들.
“저, 저게 뭐야······.”
“우욱!”
공포에 질린 레이첼이 작게 중얼거렸고, 수색병 중 몇 명이 숨을 죽인 채 구역질했다.
협곡은 붉었다.
무수히 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협곡 전체에 튄 수많은 혈흔이 그대로 얼어붙은 채 반짝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꿈틀거리는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
마치 집단 폐사한 동물의 사체 위에 꼬인 벌레와 날짐승들 같은 모양새.
문제는 그런 것들이 얼핏 보아도 수천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자 주위에 널린 시체들에서 얼어붙은 살점을 뜯어 먹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축제를 벌이듯이.
그런 괴물들의 뒤편, 저 멀리서 거대한 붉은 타원형의 포탈이 보였다.
그것이 번쩍일 때마다 그 안에서 마수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
그 끔찍한 광경에도, 그 누구도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온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한편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아주 멀리멀리.
또 다른 본능으로는, 의구심이 샘솟았다.
대체 어디서 저렇게 많은 괴물이 나타난단 말인가?
세계관측자들의 의문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한 곳이 있었다.
마수들과 악마들이 무수히 서식하는 곳.
바닥을 적신 피가 마르지 않고, 꽃과 풀 대신 살점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곳.
바다 너머의 죽음의 땅.
그곳의 이름은······.
“······마계.”
세계관측자 중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것은.
인간이 쉬이 감내할 수 없는 이 재앙의 이름은.
마계의 침공(侵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