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537)
제 538화
chapter 4
우연이었다.
셀은 아직도 기억한다. 수개월 전에 잭과 함께 하늘로 올라와서 세상을 둘러보았던 그때를.
잭은 말했었다.
내 뒤를 네가 이으라고.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추측이었다. 하지만 직감과 본능은 달랐다.
잭은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준비하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리는 것.
잠깐이나마 틈을 만들어 주는 것.
샬롯과 셀, 그리고 유제하를 비롯한 이들이 고기 방패 역할을 해 주면 분명 틈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생각을 잭이 하지 못했을까.
잭은 분명 혼자서 싸울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전쟁이 끝났다고, 연회를 열라는 그 말은 다르게 보면 너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을 돌려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셀은 모른다. 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모른다.
잭이 누구와 싸우려는 건지. 잭과 싸우는 상대의 전력도 모른다.
심란했다.
잭의 판단은 분명 틀리지 않다. 항상 잭의 판단은 옳았다.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지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그 사소한 판단마저 잭은 항상 옳았다.
미래가 없던 셀에게 미래를 보여주었고 길도 제시해줬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데 잭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건 심란하다는 말로 정리가 불가능했다.
힘이 필요했다. 더 강한 힘이.
지금 힘이 없어서 돕고 싶은 사람을 제대로 돕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왔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셀은 자주 이랬다.
생각할 거리가 있거나, 가슴이 심란할 때 항상 하늘로 올라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하늘로 올라오면 잭이 보여주었던 그때의 풍경. 잭과 함께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때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슴이 편해졌다.
오늘도 그렇게 하려 했다. 그런데 하늘에 잭이 있었다.
그래서 잭에게 다가갔다.
잭은 시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시체가 묻는다.
{이게 용이구만. 역시 세상은 넓어.}
처음 보는 얼굴이다. 거기까지였다. 관심 없었으니까.
{허허,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과묵한 친구구만. 난 신의라고 하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셀은 힐끗 잭을 바라보았다.
잭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질문한 신의만 우습게 됐다.
{병풍이 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목만 떠 있는 시체가 신기하지도 않은가?}
셀이 물었다.
신의에게 물은 게 아니라 잭에게 물은 거다.
-안 끝난 거죠?
잭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눈치챌 것 같더라.”
-……안 끝났다는 거네요.
잭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공을 밟으며 셀에게 다가간다. 손을 들어 셀의 머리에 툭 올렸다.
“전에 들어 보니까, ‘셀 밀로스’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다닌다며?”
흑해의 경계, 그곳에서 셀은 서천암왕 주체에게 스스로를 셀 밀로스라고 소개했다.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그걸 잭이 알고 있는 이유는 발렌타인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셀이 물었다.
-……쓰지 말까요?
잭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아니. 써. 너도 이름 긴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
“셀 바하무트 볼리모트였나, 셀 볼리모트 바하무트였나. 그 긴 이름을 어떻게 계속 쓰냐.”
셀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인간 형태로 변한 셀이 잭을 올려다본다.
-그게 다예요?
“그럴 리가.”
다시 손을 뻗어 셀의 머리에 올린 잭이 부드럽게 웃는다.
“사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네가 먼저 그렇게 하더라. 이건 내 실수야.”
-…….
“셀 밀로스.”
샬롯과는 달랐다. 샬롯은 로얄이라는 성이 있다. 샬롯은 그 성을 없앨 생각이 없다. 하지만 셀은 다르다.
셀은 항상 자신을 소개할 때 셀이라고 소개했다. 뒤에 붙은 바하무트, 볼리모트, 이딴 이름은 단 한 순간도 쓴 적이 없다. 그런 셀의 이름을 잭은 이미 정해놓았었다.
그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다. 깜빡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정말 아니었다. 잭은 어쩌면 이미 했어야 할 말을, 지금 했다.
“너, 내 딸 해라.”
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붉어지기까지 한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늦게 말해 줘서 미안하…….”
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면 셀이 잭을 와락 껴안았으니까.
셀은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헷갈렸다.
어떤 게 헷갈렸냐면, 잭이 다른 이들에게 전쟁은 끝났다고 했던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잭은 다시 싸우려는 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왜냐면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매 순간 스스로에게 당당했던 잭이다.
그런 잭이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건 혹시, 잭도 포기한 게 아닐까.
잭도 이미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남은 기간을 즐기라고 한 게 아닐까. 자포자기한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아주 약간이나마 있었는데 이제 사라졌다.
잭은 이길 생각이다.
정말로 솔직히, 내 딸 하라는 그 말보다 그게 더 가슴에 와닿았다.
정상에 서려면 역시 이래야 하는구나.
아직 어린 셀이었기에 자신의 감정을,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다.
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행복했다.
그런 셀의 머리를 잭은 가볍게 쓸어내려 주었다.
조금 동떨어진 채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신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얘네는 갑자기 왜 신파를 하고 지랄이지.
* * *
혈마 양불휘는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지친 것은 아니었다. 놀랐기 때문이다.
약 20m 거리에 한 남자가 있었다. 상당히 거대한 덩치.
쫙 벌어진 어깨, 그리고 짧게 깎은 머리. 그냥 딱 그 정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혈마교의 삼불 중 한 명이자 혈마가 부재 시 모든 삼불을 비롯한 혈마교의 모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
오판석.
혈마는 그에게 달려갔다.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오판석도 혈마에게 달려갔다.
혈마가 손을 뻗어 오판석을 안으려 했다. 오판석은 몸을 틀며 피했고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복부에 한 대 얻어맞은 혈마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오판석을 바라본다.
“너 미쳤냐?”
“안 미치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아프지는 않았다. 내공을 끌어 올린 채로 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기분이 조금 묘하긴 하다.
혈마는 질 수 없다는 듯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오판석의 얼굴이 옆으로 홱 젖혀진다. 오판석도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혈마의 얼굴도 옆으로 젖혀진다.
“어쭈 이 새끼가, 기껏 살아 돌아온 형님 면상에 주먹을 박아?”
오판석도 할 말은 있었다.
“그냥 맞으십시오.”
둘은 그렇게 투덕거렸다. 그런데 사실 투덕거렸다고 보기에도 묘한 게, 혈마라는 이름을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었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은 오판석이었다.
흠씬 두들겨 팬 혈마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콩벌레처럼 몸을 말고 있던 오판석이 그대로 대자로 쓰러진다.
“……진짜 못됐습니다.”
혈마는 말없이 웃었다. 오판석이 말을 이었다.
“식량은 또 언제 이렇게 준비했습니까? 농지는 또 어떻게 구했고요. 이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겁니까?”
“몰라. 16년? 19년? 그쯤 됐나.”
“……애초부터 혈마교를 전부 탈출시킬 생각이었습니까?”
“어. 전부는 못 가더라도 최소 절반은 보내려고 했지.”
오판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이런 말은 낯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겠는데, 존경스러웠다.
“팬티 5장에 옷 5장으로 수십 년을 살았던 이유가 이거였군요.”
“뭔 소리야. 팬티는 10장이었어.”
“8장 아닙니까?”
“8장인가.”
구두쇠 수준을 넘었는데 그게 다, 자기 밑에 있는 교원들을 위해서였다. 스스로를 희생한 거다. 대단했다. 이런 남자를 따르지 않고 누구를 따르겠나.
그러다 대뜸, 혈마가 말했다.
“천마신교가 망했더라.”
“…….”
“표정 보니까 들었나 보네.”
“예. 오다가다 듣게 되던데요. 그리고.”
“그리고?”
오판석이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은 산지였다. 마궁이 있던 그 산지와 흡사한 지형이었는데, 적어도 10만은 살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산 곳곳에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는데, 혈마교의 교원들은 아니었다.
무림인들이었다.
이곳은 오지 중에서도 오지다. 최남단에 있는 남경이 이곳인데, 보통 여기에는 무림인들이 오지 않는다. 볼 게 없으니까.
그런데 꽤 많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키메라라는 괴물을 이끄는 남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혈마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혈마도 오면서 들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도 안다.
“……라그나로크겠지.”
“예. 결국, 부활한 겁니다.”
“…….”
“어찌하실 겁니까?”
혈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그나로크는 재앙 그 자체다.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에 의하면 그는 살육에 미친 괴물 새끼다.
“……적어도 동대륙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빙궁에 들렀다가 지금 ‘서쪽’으로 향하는 거 같은데, 오랜만에 오셨으니 명령부터 내려 주시죠.”
“명령? 무슨 명령?”
오판석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미리 대기했다는 듯 혈마교의 정예들이 정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장 상태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혈마는 웃었다. 하 새끼들, 내가 이래서 밑의 애들을 싫어할 수가 없어.
“그 황제, 잭 밀로스 알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냥 대화 몇 번 나눈 게 전부니까요.”
“내가 그 황제한테 은혜를 입었어.”
“……은혜요?”
혈마의 뒤쪽에는 수만 명의 혈마교 교원들이 있었다.
잭의 배려 덕분에 피신할 수 있었던 이들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그러더라, 서대륙으로 올 생각 있으면 오라고.”
“…….”
“자리 하나 마련해 주겠다는데, 어떻게 할래? 갈래?”
오판석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답했다.
“혈마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말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혈마가 간다고 하면 간다.
혈마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가지 않을 거다.
혈마만 따라가기로 맹세했다. 혈마의 뜻에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혈마교의 교원들 모두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사안이다.
혈마는 답했다.
“일단 화경 이상만 전부 모여.”
그 말대로 화경 이상의 고수가 전부 모였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정확히 118명.
“우리만 서대륙으로 간다.”
오판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묘했으니까.
“먼저 가서 터를 닦겠다는 겁니까?”
“아니. 우리 혈마교는 서대륙으로 가지 않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우리 혈마교는 서대륙의 황제 잭 밀로스에게 은혜를 입었다. 은원恩怨, 은恩에는 은恩으로 원怨에는 원怨으로.”
정말 간단한 거다. 혈마는 잭 밀로스에게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유제하가 느낀 것과 아마 같은 것일 거다.
따르고 싶다는 그런 느낌.
저 남자는 완성된 황제처럼 보였지만 아주 조금 모자라 보였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지배자에서 딱 1%가 모자랐다.
이게 앞선 말과 조금 모순되어 보이겠지만 당연한 거다.
1%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황제는 혼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