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want to play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신임 총사령관이 왔다며?”
“아르트리아 왕국에서 온 엘디르의 사도래.”
대회전의 패배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신성 제국군에 필리프 일행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야전 병원에 갔다가 들었는데, 물의 교단의 성녀가 와서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던데?”
“와! 사도에 성녀까지!”
강 건너에 있는 전신의 사도를 보며 불안에 떨던 병사들의 사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신의 사도를 무찌를 순 있을까?”
“꼭 싸우지 않아도 돼. 같은 사도니 설득해서 물러나게 할 수만 있다면…….”
병사들이 두런두런 떠들고 있을 때, 소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군 집합! 신임 총사령관 각하의 명령을 하달하겠다! 지금 즉시 삽과 곡괭이를 챙겨서 강변에 목책을 세우고 구덩이를 파도록!”
“예? 구덩이를 파라굽쇼?”
“그렇다. 깊이는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최대한 길게 파야 한다.”
병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런 신성 제국군의 움직임은 곧장 강 건너 도시국가 연합군에 포착되었다.
“저놈들 아침부터 뭘 하는 거지?”
“훗, 자기네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미리 파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칼라드리안의 대꾸에 콜베인 후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목책은 몰라도 저런 구덩이는 왜 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자를 파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보기엔 폭이 너무 좁았다.
‘칼라드리안의 말대로 정말 미리 무덤을 만드는 건가? 그만큼 일전을 각오한 건가?’
의아해하고 있던 차에, 신성 제국 측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회담을 하자고?”
“그렇습니다. 이번에 총사령관이 된 엘디르의 사도 브란델 백작 각하께서 전신의 사도 칼라드리안 공을 꼭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콜베인 후작과 함께 그 말을 들은 칼라드리안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핫! 이거 완전 걸작이구만!”
“칼라드리안 공, 뭐가 그리 우습소?”
콜베인 후작의 물음에 칼라드리안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웃기지 않습니까. 군을 지휘할 놈이 없어서 대장장이 따위에게 맡기다니 말이죠.”
“엘디르의 사도는 전공도 뛰어나다고 들었소. 얕봐서는 안 되오.”
“흥, 벼룩이 뛰어봤자 벼룩이지요.”
칼라드리안에게서 눈길을 돌린 콜베인 후작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수상하군. 아무래도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전쟁 중에 양쪽 수뇌들이 만나 회담이나 협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잠시 전투를 멈추고 사상자를 수습하거나, 서로 차를 마시며 체스나 백개먼을 두며 친분을 쌓는 경우도 있었던 것.
그러나 이런 회담이나 협상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거나, 적진을 살펴보려는 의도로 악용되는 경우도 흔했다.
콜베인 후작은 필리프의 회담 의도가 분명 후자일 거라고 판단했다.
‘총사령관이 교체되었으니 잡음이 많겠지. 당연히 시간이 필요할 테고.’
심지어 신성 제국은 아르트리아 왕국의 귀족인 브란델 백작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자국의 장군들을 두고 타국의 귀족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맡기다니 교황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아니면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급한 건가?’
안 그래도 오늘 아침 본국에서 전서구로 보내온 소식이 있었다.
‘아르트리아 왕국의 제스퍼 자작이 쾌속선을 타고 와서 알려주었다는 정보가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지금 신성 제국의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저들은 매우 다급한 상황이니, 강하게 밀어붙이십시오!”
본국에서는 이게 사실인지, 아니면 기만 술책인지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신성 제국이라면 모를까, 우호국인 아르트리아 왕국에서 기만술을 쓸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제스퍼 자작은 과거 도시국가 연합에 있을 때 원로원이나 귀족들을 상대로 적잖은 친분을 쌓았다.
중요한 정보를 넘겨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챙겼다고 한다.
‘그 점을 생각하면 엘디르의 사도가 회담을 제안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군.’
분명 시간을 벌거나, 전신의 사도를 설득해서 위기를 타파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렇게 결론 내린 콜베인 후작은 신성 제국의 전령에게 차갑게 말했다.
“거절한다. 이제 와서 무슨 협상을 하겠는가.”
곧 전면적인 진격을 시작할 텐데, 시간을 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칼라드리안이 끼어들었다.
“잠깐, 후작님.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보지요.”
소문이 자자한 엘디르의 사도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이참에 그를 콱 눌러주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이대로 이겨버리면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단 말이지.’
모험가 집안에서 태어난 칼라드리안은 어렸을 적부터 위험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일찍부터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싸움이나 모험에 중독되었다.
일부러 위험한 던전만 찾아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다 성검을 얻었으니 결과적으론 잘되었지.’
그런데 강해지고 난 후로 그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약자를 괴롭히고 그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다.
약한 놈이 멋도 모르고 달려들다 깨질 때 보이는 당혹감이라든가, 강자 앞에서 벌벌 떨거나 아부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특히, 지위 좀 있다고 으스대거나 거드름을 피우던 놈들이 형편없는 모습을 보일 때는 더 재미있단 말이지.’
그런 그에게 대검 귀족 출신에, 지금은 백작이라는 고위 인사가 된 엘디르의 사도는 좋은 장난감이 아닐 수 없었다.
“놈들의 수작에 놀아날 이유가 없소.”
“쥐새끼들이 수작을 부려봤자죠. 마지막 발악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지 않겠습니까?”
칼라드리안의 발언에 콜베인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전신의 사도라지만 전쟁을 재미 삼아 하는 듯한 그의 행동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휴, 알겠소, 공이 그리 요청하니 일단 수락하리다.”
“후후후. 감사합니다. 각하.”
콜베인은 칼라드리안의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미 군부는 물론 귀족들 중에도 그의 추종자와 후원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전령에게 말했다.
“회담을 수락하마. 단 장소는 두나이 강 가운데 있는 작은 모래섬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떠나는 전령과 음흉한 표정을 짓는 칼라드리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콜베인 후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
이틀 후, 회담 시간에 맞춰 필리프 일행이 움직였다.
필리프 일행이 다니엘 공작의 호위 기사들과 이동하는 것을 본 올드가 테리에게 물었다.
“클로드, 어딜 가는 거니?”
“주군께서 적군 수뇌들과 회담하시는데 호위로 따라갑니다.”
여전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올드는 테리를 자신의 아들 클로드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원래 필리프는 그녀를 대사관에 맡겨두고 올 생각이었다.
정신도 온전치 못한 노파를 전쟁터까지 데리고 가는 것도 그렇고, 가족을 찾도록 신전에 의뢰해 놓았기 때문.
하지만 올드가 아들 혼자 못 보낸다며 한사코 동행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라데츠 요새까지 데려오고 말았다.
“적군을 만나러 가? 위험해! 가면 안 돼.”
“괜찮아요, 회담만 할 거니까.”
마족도 회담하러 온 상대를 해치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측에는 전신의 사도가 있었다. 절대 명성이 더럽혀질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를 위해 호위 기사도 충분히 데려가고 있었다.
이런 테리의 설명에도 올드는 불안하다며 같이 가겠다고 졸랐다.
“가만히 계시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테리 경, 시간 없으니까 올드를 종군 신관에게 맡기고 와.”
“알겠습니다, 주군.”
필리프는 테리가 올드를 달래며 종군 신간에게 데려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에휴, 소드 마스터가 어쩌다 치매가 들어가지고.’
필리프는 요새로 오는 도중 테리에게서 올드의 실력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조언을 들어 익스퍼트 최상급에 제대로 진입했다는 사실도.
‘근데 소드 마스터가 치매에 들고 거지꼴로 돌아다닐 때까지 자식이나 제자 놈들은 뭘 한 거야? 설마 버림받은 건 아닐 테고?’
필리프도 도통 믿기기 않았지만, 테리는 결코 검술과 관련해 거짓이나 허풍을 늘어놓지 않았다.
더구나 일전에 앤디도 농락했던 점과 테리의 검술이 발전한 것을 생각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노망만 안 들었으면 든든한 전력이 되어줬을지 모르는데…… 아니, 그럼 애초에 만날 일도 없었으려나?’
필리프는 올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회담에 집중하기로 했다.
***
보트를 타고 강 가운데 있는 모래섬으로 향하니, 맞은편에서도 도시국가 연합군 수뇌들이 오고 있었다.
“필리프 드 브란델입니다.”
“도시국가 연합 원정군 사령관 마티아스 드 콜베인이라 합니다.”
양측은 모래섬에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전쟁 중이다 보니, 다들 만나서 기쁘다, 반갑다는 둥의 미사여구는 붙이지 않았다.
딱 한 명만 제외하고.
“만나서 반갑군. 나는 위대한 전신 발리안 님의 사도 칼라드리안이라고 한다.”
잔뜩 으스대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를 본 필리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금태양?”
“크하하, 대장장이 주제에 사람 보는 눈은 있군. 그래, 나는 황금처럼 빛나는 태양 같은 사나이니까.”
‘등신아, 그거 욕이거든.’
금발 태닝 양아치.
칼라드리안은 이에 딱 맞는 용모와 언행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예의는 아는지 필리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예의를 지키는 걸 보니 말이 통하는 놈인가? 적당히 추켜 주면서 원하는 걸 들어주면 피 안 흘리고 끝날 수도…….’
그리 생각한 필리프가 악수를 받아주려는 순간, 녀석이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치웠다.
‘허, 이거 진짜 양아친가?’
칼라드리안의 갑작스런 행동에 필리프는 어이가 없었다.
악수를 청해놓고, 상대가 응하자 손을 치워버리다니!
이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라, 호위로 따라온 테리와 앤디를 비롯해 다니엘 공작과 그의 부관, 그리고 리베르타와 드레이크까지도 어이없어했다.
심지어 칼라드리안과 같은 편인 콜베인 후작조차도.
필리프는 싸늘한 눈길로 칼라드리안을 쏘아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칼라드리안은 사과는커녕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네놈이야말로 뭐 하자는 거냐? 내가 악수 따위 하자고 손을 내밀었는 줄 알아?”
“그럼?”
“마땅히 바쳐야 할 공물을 받기 위함이다.”
“내가 너에게 공물을?”
“그렇다.”
놈의 대답에 필리프는 혹시 앤디가 녀석의 머리에 총알이라도 박아 넣은 건가 싶었다.
그래서 정신이 돌아버린 게 아닌가 싶었던 것.
역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다니엘 공작이 칼라드리안에게 물었다.
“브란델 백작이 왜 그대에게 공물을 줘야 한다는 건가?”
칼라드리안은 필리프를 압박하기 위해 더 거만하게 말했다.
“그거야 저놈이 대장장이 신의 사도니까 그렇지. 저놈이 섬기는 엘디르는 전신 발리안 님께 항상 무기를 바쳐왔다. 그러니 저놈도 나를 만났으니 검이나 갑옷을 바쳐야 할 게 아닌가!”
필리프보다 먼저 마우가 격분했다.
엘디르는 어디까지나 마신과 그 추종자들과 맞서서 잘 싸우라는 의미에서 발리안에게 무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걸 제멋대로 공물이라 해석하다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더니. 완전 글러 먹은 놈이군.’
칼라드리안의 속셈을 모르는 그로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