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단염을 수호한다는 다섯 수호수들의 위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 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사람의 정강이만큼 파이고, 앞발을 내지르면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넘어간다.
흙먼지는 수호수들의 머리 위까지 솟구치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옅은 산들바람이 되어 흑린군의 병사들의 살결에 닿았다.
그리고 그 다섯을 모두 상대하는 라크락은 살아 움직이는 전설이었다.
창날을 휘두를 때마다 수호수들이 거체를 뒤틀며 피하기 바빴고, 그야말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그 위치가 바뀌어 눈으로 좇기도 어려웠다.
수호수의 피 냄새가 대기에 옅게 깔리자, 이미 전쟁을 치루고 있기라도 한 듯 흑린군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신화적인 싸움을 배경으로 흑린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군대를 상대로 패배한 적이 없다’는 바센 라크 오라즌의 자신만만한 말에 부관 수헌이 입을 가리고 미소 지었다.
자동성의 네 가문 중 하나라는 배경이 있긴 했지만, 수헌은 이전 흑린의 군에서 보기 드문 인간이었다.
리자드맨과 비교해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외의 능력으로 자신 실력을 증명해 왔다.
‘재밌는 사람이군.’
처음 바센이 임의 명칭 된 갑군을 지휘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는 걱정이 컸지만 바센이 왕자라는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남쪽 바다에서의 실적만으로도 바센은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능력이 있고 자신감도 있다면 더는 가릴 것이 없지.’
수헌이 말했다.
“하지만 장군, 일단 형세로 보아 저희는 저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적들은 협곡을 막아선 데다, 협곡 위에도 궁수들을 배치했습니다. 저희 병사들이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용맹함이 있다고 하나 창칼을 맞으면 피를 흘리는 사람인데,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더 많은 아군으로, 더 적은 적을 상대한다.
병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것은 아군과 적이 동수일 때도 마찬가지의 이야기였다.
비록 아군과 적이 숫자가 같더라도, 좁은 길목을 지나오는 적을 상대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아군의 숫자가 유리해진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엔 지형의 유리함을 가진 것은 적인 단염군이었다.
바센이 말했다.
“진형은 별 탈 없이 내가 말한 대로 갖춰질 예정인가?”
“아, 네.”
바센이 요구한 진형은 적을 에워싸는 지형이었다.
언뜻 보면 유리해 보이지만, 협곡을 지나야 하는 건 적군이 아닌 아군.
어차피 협곡 안에서 전투를 해야 하므로 협곡을 에워싸는 형태는 수헌이 보기에 위협적이긴 해도 별 효용이 없어 보였다.
“장군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오늘은 진군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아니. 저기 사도 라크락과 단염의 수호자들이 싸우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당연히 라크락 님이 이기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직 그 뒤에는 사티로스들의 신 무진이 남아 있다. 신이 가진 기적으로 무슨 획책을 쓸지 모르니 서두르는 게 낫다.”
“그럼 진형을 쐐기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쐐기 모양은 전형적인 돌격 진형이고, 이런 협곡을 돌파해야 한다면 보편적으로 다루는 진형이었다.
하지만 바센은 혀를 찼다.
“아까도 장군이 세 사람이나 왔다가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더군.”
“…죄송합니다.”
“그렇진 않다. 설명이 부족한 내 탓이지.”
수헌이 말했다.
“그럼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쭤 보아도 되겠습니까?”
바센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멀리 협곡을 바라보았다.
협곡 자체가 그리 좁지는 않다. 만약 1만 전부가 리자드맨이었다면 바센은 해 볼 만한 승부라며 쐐기 대형을 갖추고 들이박게 했을지도 모른다.
야천의 축복을 받은 리자드맨들은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수 미터 협곡 정도는 빠르게 기어오를 수도 있었다.
리자드맨들은 개인 무장의 정도도 뛰어난지라 화살에 의해 피해를 덜 받기도 했고, 백병전은 다른 종족에 비교하자면 달인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별다른 전술을 생각하지 않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만 병사 중 리자드맨은 겨우 2천.
나머지는 몸이 튼튼하고 정신이 강건한 사람을 가려 받고 군사 훈련을 받아 병사 구실을 하고 있긴 하지만 뛰어난 군대라고 보긴 힘들다.
강대 강으로 맞붙게 시키는 건 위험했다.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적의 약한 부분을 천천히 도려내는 전술이 필요했다.
“수헌, 자네가 저 협곡이 주둥이 같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게워 내게 만들면 그만이지.”
“예?”
“강아지풀로 코를 간질이면 어떻게 되겠나?”
“…예?”
바센은 한숨을 쉬었다.
“보기나 하게.”
바센은 수헌과, 다른 장군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이들은 아직 ‘옛 군인’이었다.
그러니 전장은 이미 새로운 것이 도입되었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과거의 방법을 택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익히고 나서도, 여전히 과거의 방법을 고집하는 게 문제일 뿐이지.’
다행인 것은 흑린군만이 아니라 단염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형을 저렇게 잡았겠지.’
바센이 보기에 단염군의 진형은 완벽한 실패였다.
3만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있다면 얼치기일리는 없으니, 분명 바센이 상상하는 대로라면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군인일 터였다.
‘이럴 거라면 협곡 입구가 아닌 협곡 끝에 진을 치거나, 차라리 협곡을 등지고 회전을 준비하셨어야지. 차라리 그쪽이 낫지 않나? 숫자도 더 많은데.’
물론 바센으로선 상대가 무지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바센은 흑린군이 협곡의 입구를 둘러싸는 것을 확인했다.
각 병종 또한 바센이 말한 그 위치 그대로였다.
다행히 바센의 지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 한들, 명령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명령한다.”
바센은 명령 체계를 통해 말했다.
“협곡 입구를 향해 대포를 조준해라.”
곧이어 폭음과 함께 협곡 안쪽으로 돌덩이들이 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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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하는 거냐! 어서 우리도 대포로 맞대응해라!”
단염의 대장군 유바임 돌란이 외치자 장군 하나가 답했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사오나, 보병 부대가 너무 촘촘하게 정렬해 있어 대포를 끌고 오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협곡 위로 대포를 올려라!”
“이대로 협곡 위로 대포를 올리다간 대포나 사람이 상할 겁니다. 그러니 길을 우회하여야 할 텐데, 그럼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유바임은 책상을 내리쳤다.
“그럼 서편에 선 부대 중 하나를 뒤로 물려라!”
그 말에 다른 장군이 말했다.
“재고해 주십시오, 대장군!”
“왜 그러나?”
“적 진영의 대포들이 멀리 있어 당장 피해가 극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아군이 대응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병사들의 동요가 큰데, 이 중 한 부대만 뒤로 물리면, 물리지 못한 부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이런!”
단염군이 느릿느릿 대포를 전방으로 옮기고 있을 때, 흑린은 멈추지 않았다.
거리를 재어 보고, 상대의 전방에 대포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습에 수헌은 바센이 말한 ‘코를 간질이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포가 있다면 협곡 밖에서도 이 진형이 더 유리했던 겁니까?”
바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과 창을 든 병사라면 당연히 협곡을 둘러싼 진형은, 협곡에 들어선 적을 상대할 때 쓸모가 없다.
하지만 먼 거리에서 많은 인명 피해를 가할 수 있는 대포라면 달랐다.
오히려 화력을 한 점에 집중할 수 있으니 ‘더 많은 아군으로 더 적은 적군을 상대한다’는 병법의 기본이 지켜지는 것이다.
“적 장수도 대포를 쓰는 걸 생각하긴 했겠지. 하지만 협곡 안에선 전방을 향해 대포를 쏘기 어렵다.”
그럼 아군이 맞을 테니까.
“그렇다고 협곡 위에선 협곡 안쪽으로 쏠 수 없고.”
현대 대포 기술은 전장식 대포, 즉 포구를 통해 대포알을 집어넣는 형식이다.
아래를 향해 쏘아 봤자 대포알이 흘러내릴 뿐이고, 포물선을 기대하고 전방으로 쏘아 봤자 협곡은 그렇게 넓지 않으니 아군에게 겨냥될 뿐이다.
“그럼 단염군은…”
“애초에 협곡에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되었던 거지.”
“하지만 단염군의 대포 기술도 저희와 비등합니다. 적들이 전방으로 대포를 가져오면…”
“잘된 것 아닌가?”
“네?”
바센은 계속해서 흑린의 대포를 전진 배치시키며 발사했다.
한 발 한 발의 타격으로 적 보병을 많이 죽일 수는 없지만, 순차적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탄에 보병들은 이미 공황 상태였다.
“바로 뒤에 대포가 왔다! 자리를 내라!”
그 말에 단염군 보병들이 환호를 지르며 길을 냈다.
그때, 바센이 기병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흑린의 마지막 포격이 끝남과 동시에, 흑린이 자랑하는 경기병인 코카투 기병이 돌격을 시작했다.
단염의 창병들이 급하게 진형을 정비했지만, 이미 보병대의 절반 정도는 대포에게 자리를 내준 상태였다.
협곡 양옆에 있던 궁수들이 코카투 기병을 노리고 사격했지만, 이제 흑린의 포수들이 노리는 것은 협곡 위였다.
코카투에서 떨어진 기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무너진 적 진형 사이로 코카투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창으로 방진을 갖추면 기병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단염의 장수들이 애처로울 정도로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전방의 창병들은 어설프게 대항하려다 코카투 기병에게 목이 잘리거나, 등을 보이고 도망가다 등이 찔렸다.
단염의 장수들이 급하게 그 다음 열의 창병들을 진정시켜 방진을 짜자 코카투 기병들이 후퇴 명령에 급하게 돌아섰다.
다시 포격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 더 반복되자 유바임이 명령했다.
“진군해야겠다.”
그 말에 즉각 반발이 있었다.
“안됩니다, 대장군! 아직 피해가 많지 않은데 지형의 유리함을 포기한다니요!”
“이놈! 눈이 있으면 보아라. 이게 무슨 유리함이냐? 협곡을 끼고 안전하게 싸우려 했지만 정작 우리는 수적 우위를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장군이 일어나 말했다.
“하지만 적은 이미 진형을 갖추었습니다. 이대로 나아가게 되면 적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그 말에 유바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진형을 갖추고 아가리로 적이 들어오길 기다린 건 우리인데 일이 어찌 이리 되었는가?’
대장군 유바임이 말했다.
“그럼 경들은 어쩌잔 말인가? 후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 말에는 묵묵부답이었다.
딜파 협곡의 끝까지 후퇴를 하더라도, 그 다음 수도 데이머릿까지 흑린을 막아 낼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유바임이 말했다.
“어쩔 수 없다. 비록 형세의 불리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수적 우위를 노려 보아야지.”
앞선 전투에서 손실이 있었다고 하나 협곡에서의 싸움인 탓에, 어림잡아도 몇 백 정도라고 판단했다.
많다면 많은 숫자지만 여전히 수적으로는 우위였다.
“진군하라!”
유바임의 명령에 단염의 보병들이 진형을 갖추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흑린의 대포가 불을 뿜었지만, 적어도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동요가 덜했다.
유바임은 걱정 때문에 평시보다 빠르게 보고를 받았다.
“진군에 문제는 없나?”
“예, 없습니다. 대포 옆으로 각 보병 분대가 진영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후퇴하지 않고 저희 부대와 맞서 싸우려는 것 같습니다.”
그대로 진군을 이어 가라고 하려는 유바임에게 다른 장군이 말했다.
“적 기병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바임이 잠깐 생각에 잠기자 다른 장군이 말했다.
“적 기병은 앞선 전투로 피로가 쌓여서 후방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타당한 것 같았다.
단염의 진군이 이어졌다.
단염군은 부채꼴 모양으로 진형을 짠 흑린군을 상대로 정면을 향해 쐐기 형태로 나아갔다.
유바임은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흑린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먼저 쳐부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쐐기 대형과 흑린의 보병대 한 축이 맞붙은 순간,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바센이 칼을 뽑았다.
“돌격!”
이 갑작스런 외침은 단염군의 오른편에서 들려왔다.
그곳에 단염이 발견하지 못했던 기병대가 나타났다.
바센은 지친 코카투 기병을 후위에 두고, 그 대신 다양한 종족으로 혼합된 말 기병을 전위에 두고서 자신은 기병대 선두에 서 있었다.
코카투에 올라탄 바센이 외쳤다.
“적의 허리를 끊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