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22)
322 화 패배감.
패배감.
– 네가 이겼다. 마르낙. 저 녀석은 사도로서의 지위와 능력을 잃었고, 너는 조금 무리하면 한 번 더 사도화가 가능할 테니 이미 이 상황 자체로 우리의 승리다. 저 녀석이 우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기습뿐이었는데, 멍청하게도 그 이점을 스스로 포기한 이상 더는 봐줄 이유도 없지. 죽여.
임페트로가 내 머릿속에서 신나서 떠들어대는 사이, 내 시야 한구석에서 사제복을 입은 붕대투성이 남성이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신기루 같이 나타난 상투스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여느 때보다 유독 불쾌한 느낌이 드는 미소를. 그는 실실 웃으며 내게 말했다.
– 무력의 문제를 떠나, 지금 저 소년 사도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완전 짜증 나지만 맞는 말이었다. 하도 눈앞의 꼬맹이가 시원하게 웃으며 패배를 인정한 탓인지는 몰라도 원인 모를 패배감을 진하게 느끼고 있던 차였는데. 그걸 또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닥쳐.”
“네?”
눈앞의 꼬맹이 사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든 말든 나는 상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헛소리하고 있어. 쟤도 인정했잖아. 내가 이겼다고. ‘내가 이겼다.’ 이건 확고부동한 진실이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정하는.”
상투스는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은 채 계속해서 실실댔다.
–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아닌 거 같군요. 연, 당신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의 인과를 덮어두고서 순수하게 이 순간만을 보고 논하면 좀 더 사람다웠고 사람다웠을 자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그건 당연히 나지. 원래 사람은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위해 나아가는 법이야. 그 점에서 보자면 욕망에 충실했던 나야 말로 가장 사람다웠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처럼 떼를 쓰면서.
강제로 진화한 부패의 저주 탓에 도시의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멈추지 않기로 결정한 나와, 그런 나를 막아서기 위해 스스로의 유리함을 포기하고 무너져가던 내 앞으로 돌아온 소년 사도. 이미 그 시점에서 인격적인 면에서 나는 저 소년에게 완벽히 패배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 평소보다 말이 텅 비어있군요. 울림 없이.
“넌 평소보다 더 짜증이 나네. 쓸데없이.”
원래 상투스가 저렇게 깐죽대는 사람이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끔 저렇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긴 했었다. 제법 답지 않게 짓궂은 표정으로.
상투스는 조금 더 웃다가 나타났던 것처럼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내 시선이 다시 눈앞의 소년에게로 향하자, 나와 눈이 마주친 세난이 허공을 힐긋 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그, 본인 눈에만 보이시는 분이랑 대화는 이제 다 끝나셨나요?”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나를 조금 맛 간 놈이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대충.”
강렬한 고통이 터지듯이 뜯겨나간 우반신 곳곳에서 느껴졌다. 뜯겨나간 오른팔의 상처 부위를 뒤덮은 이모탈리움 실들이 사도의 신성으로 재생이 더뎌진 단면의 살점들을 강제로 뜯어내 내 육체가 재생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마취를 안 한 채 살들을 빠르게 도려내고 있어서 꽤나 많이 아프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새카만 금속 실들이 서로 뭉쳐 들며 팔찌의 형태가 되어 떨어지는 걸 왼손을 잡아챘다. 깔끔하게 정리된 상처의 단면에서 새하얀 뼈부터 자라나며 빠른 속도로 몸이 재생되어갔다.
우반신의 이모탈리움 뼈들도 몸이 뜯겨나가면서 어디로 날아갔나 보네. 뼈는 따로 주워야겠는걸.
이윽고, 내 우반신은 언제 상처 입었냐는 듯이 재생을 끝마쳤고 세난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 맞으세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터졌는데도 다시 재생하는 너한테 그 말을 듣고 싶진 않은데.”
“저야 권능이 그런 권능인걸요. 반면에 그쪽은 재생이랑은 영 연이 없는 권능인 거 같아 보였는데 재생력이 뛰어나니까 신기하단 거죠. 안 그래요?”
말을 또박또박하는 게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조금 밉상이어서 진심으로 꿀밤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시도해봤자 피할 거 같아서 안 했지만.
“됐고, 이제 어쩌자는 건데. 본론부터 딱 말해. 지금 무척 피곤하니까. 미리 말하지만, 사리는 못 돌려줘.”
“됐어요. 저는 사실 제 머리에 그런 게 들어있는 줄도 몰랐는걸요.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세난은 두 눈을 끔벅거리더니 어딘지 시원한 표정으로 뻥 뚫린 건물 천장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에서 그 사리인지 뭔지를 빼낸 탓인지는 몰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모시는 신을 부활시켜야만 한다는 충동이 거의 사라졌어요. 아예 사라진 건 아닌데, 충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예요.”
나는 이모탈리움 팔찌를 오른팔에 끼며 왼손에 쥐고 있던 회백색 사리를 힐긋 보았다.
이게 명령을 강하게 심는 그런 효과도 있는 건가.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
“도시 사람들이 다 쓰러졌었는데, 그분들은 괜찮을까요?”
“아마? 나도 잘 몰라.”
사도화로 강화되지 않은 부패의 저주는 솔직히 그다지 별 효과가 없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사실, 미리 심어둔 부패의 저주가 사도화하면 강화되는 줄도 몰랐었고.
“본인도 잘 모르시면 제가 가는 길에 좀 살펴봐야겠네요.”
“가는 길? 내가 널 살려서 보내줄 거 같아? 내 존재도 알고 얼굴까지 다 봤는데?”
“제 머릿속에 있던 사리인지 뭔지 그게 필요하셨던 거 아니에요? 그거 가져가셨잖아요.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이며 고민하더니 세난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당신의 존재 자체는 웬만한 선신의 사도들은 다 알고 있을 거예요. 다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는 거죠.”
“무슨 소리야 그게?”
선신의 사도들이 내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고? 아니, 생각해보면 알 수도 있긴 한가?
5년 전에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건 결국, 신들이니만큼. 내가 살아있다는 것쯤이야 그들도 당연하게 알고 있을 터.
세난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의 회색 머리칼을 긁적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선신의 사도들끼리는 몇 번 큰 교류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구원(救援)’의 사도가 당신의 존재에 대해 저희에게 가르쳐주며 몇 가지 당부를 해줬었죠.”
구원(救援)의 사도. 구원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딱 하나의 신만이 떠올랐다. 강림했던 만신들 중 가장 무게감이 있던 목소리이자 신들의 수장처럼 행동하던 녀석.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기로 맹세한 신.
‘세계의 구원(救援)’.
그날을 떠올리자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한 번 숨을 깊게 내뱉어내는 것으로 진정시키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뭐라 했는데?”
“흐음.”
내 질문에 세난이 씨익 웃었다.
“맨입으로 들으시게요? 이거 나름 선신의 사도들만 아는 내부정보인데? 어차피 절 죽일 거면 그쪽한테 제가 왜 아는 걸 다 말해줘요. 그냥 콱 죽고 말지. 지금 이 상황으로선 제가 입을 열 이유가 전혀 없단 거예요. 안 그래요?”
당연하단 듯이 정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해왔다. 사실, 저것도 맞는 말인지라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자기를 죽인다는 놈이 뭐가 좋다고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주겠는가.
“그래, 살려줄 테니까 일단 말해봐.”
“세 치 혀로만 하는 맹세만큼 가벼운 것도 없죠. 제가 마냥 당신 약속을 믿기엔 우리 서로를 너무 모르지 않아요?”
“뭘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데?”
“일단 제 조건은 이래요.”
세난은 손가락을 세 개 펼쳐서 내게 내보였다.
“첫째, 절 살려줄 것. 둘째, 저와 제가 이끄는 사제들을 쫓지 말 것. 셋째…”
소년은 잠깐 뜸을 들이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마지막 조건을 말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활짝 웃으면서 반겨줄 것. 이 세 가지예요. 대신, 이것만 지켜준다면 당신이나 당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제가 단단히 입단속 시킬게요.”
첫 번째나 두 번째 조건은 이해가 갔지만 세 번째 조건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세 번째 조건은 대체 뭐 하자는 건데?”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나치면 서로 좋잖아요? 많이 웃으면 건강에도 좋대요.”
“헛소리하고 있어. 됐고. 대충 네 조건은 다 알겠어. 내가 뭘 하면 내 약속을 믿고 네가 아는 정보를 다 토해낼 건데?”
“저랑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주세요.”
“하아?”
이 자식 겉모습만 소년이 아니라 지능 수준도 딱 겉으로 보이는 정도인가? 뭘 요구하나 했더니 기껏 꺼낸 조건이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이라고?
내 눈빛에서 티가 많이 났는지 세난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하실 거예요? 말 거예요?”
“까짓거 하지 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세난은 그제야 만족하고서 정보를 계속해서 꺼냈다.
“구원의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길 각자 신들을 강림시키려고 할 때 한 악신의 숭배자가 우리를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근데 눈앞에서 마주치면 싸워도 좋지만, 굳이 그자를 뒤쫓거나 하지는 말라고 당부했어요. 어차피 대승적 차원에서 그자의 행동은 우리에게 득이 될 거라면서 말이에요.”
내 행동이 선신의 사도들에게 득이 된다?
이해가 안 가는 발언이었다. 내 행동목적은 어머니를 되찾으려는 것 하나뿐인데 그게 어떻게 선신의 사도들에게 득이 된다는 거지?
내가 이해 못 한 표정으로 세난을 바라보자, 세난도 어깨를 으쓱이곤 답했다.
“저도 구원의 사도가 한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했어요. 아마 거기 있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을걸요? 그냥 ‘구원(救援)’의 사도가 말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듣고 있었을 뿐이었죠. 사실상 그 모임의 주최자가 구원의 사도라고 봐도 무방하거든요. 그자가 사실상 암묵적인 선신의 사도들의 대장인 셈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진짜 수직적인 상하 관계가 있는 거까진 아니지만요.”
제가 모시는 신이 만신전에서 대장 노릇을 하니, 그 사도도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 셈인가. 무척 자연스럽긴 하네.
“그 구원의 사도란 녀석은 어떤 인간인데?”
“사제인 제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전형적인 광신도예요. 오래 말 섞고 있자면 피곤해지는 타입이라고나 할 수 있죠.”
“그 녀석, 지금 어디에서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아무도 몰라요. 워낙에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저희도 가끔 그가 호출해서 모이는 사도들의 모임 때가 아니면 얼굴을 보지도 못하거든요.”
아쉽게 됐다. 어디 있는지 소재 파악만 되면 복수도 할 겸 찾아가서 사리를 토해내게 할 셈이었는데.
“그놈 말고 다른 사도들의 위치는 알아?”
세난은 멋쩍게 웃었다.
“저희가 제법 많이 느슨한 조직이라 서로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진짜로 모르는 건지, 내게 동료를 팔아넘기고 싶지 않은 건지는 몰라도 저렇게 말한 이상 저 입으로 들을 수 있는 정보가 더 없을 게 분명했다.
“내가 살려서 보내주면 넌 앞으로 뭘 할 생각인데?”
“일단은…”
폐허가 된 저택을 슬쩍 훑어본 세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자신이 보냈던 사제가 이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조리 죽인 걸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데리고 온 사제들과 함께 교단으로 복귀하려고요. 어차피 제가 사도의 힘도 잃어서 모시는 신을 강림시킬 수도 없게 된 김에 교단의 재정비나 한 번 해야죠. 겸사겸사 다른 사제들의 정신 교육도 좀 하고요. 다들 권능만 쓸 줄 알지. 사제로서는 아직 한참 모자란 녀석들인 걸 이번 기회로 아주 잘 알았으니까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자.”
“네. 물어보세요.”
나는 회색 머리를 한 소년의 푸른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정말로 네가 모시는 신을 강림시키기 위해 이 도시 사람들을 다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어?”
세난은 조금 뜸을 들인 다음 대답했다.
“아마 누군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망설이고, 고민하고, 후회했겠지만, 결국은 저지르고 말았겠죠. 저는 사도였으니까요. 이제는 아니지만.”
“…널 꼭두각시처럼 조종한 신이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아?”
“세상의 모든 일은 표리가 있는 것처럼. 단 한 가지 감정으로 마냥 단정 짓기 쉽지 않죠. 미우나 고우나 제가 모시는 신이시고, 그분이 계셨기에 저는 여태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
복잡한 표정으로 보건대 나름 굴곡 있는 과거가 있는 듯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충분히 답이 됐어. 이만 가봐도 좋아.”
“인연이 된다면 또 뵙죠.”
“그럴 일 없어.”
‘인연이란 것 또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거죠.’라며 한마디를 남기고 세난은 타박타박 걸어 폐허가 된 저택을 떠나갔다.
그 무방비한 등을 기습해서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상투스가 말한 것처럼 사람으로서 세난에게 졌다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기 때문이었지.
마침내 자그마한 세난의 모습이 사라지고, 혼자가 된 나는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불완전한 사도화의 여파였다.
뒤처리야 디스펜스가 적당히 알아서 해주겠지.
그 짧은 생각을 끝으로 내 시야가 암전했다.
***
거대한 황금용이 하늘 위에서 천천히 활공했다. 용의 등 위에 올라타 지상을 내려다본 일행의 시야에 교역 도시 미세레였던 폐허가 한눈에 들어왔다.
폐허의 이곳저곳에선 다른 도시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도시의 재건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키아는 음울한 눈빛으로 폐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세레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건가요?”
다키아의 허리춤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자그마한 금속 기사, 테르지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테르지오의 말은 이거죠? 마르낙 사제님을 막지 않으면 남제국 전체가 저런 모습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요.”
– 맞습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힘을 합쳐서 후계자님께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시기 전에 반드시 막아내야만 하는 겁니다.
“으음…”
여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쟈멜이 다키아와 테르지오의 눈치를 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제국이 망할 예정이면 그냥 북제국으로 슬쩍 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다, 그 전에 남제국 은행들을 돌면서 돈을 잔뜩 빌린 다음에 북제국으로 피신하면… 돈을 빌렸던 은행들이 알아서 전부 스윽 사라져줄 테니 빌린 돈이 전부 그냥 제 돈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야말로 악마적인 발상에 다키아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남제국 전체면 쟈멜이 지내던 마을의 마을 사람들도 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앗?! 그럼 어서 돌아가야죠! 마을 사람들한테 귀띔해줘야겠어요! 얼른 도망치라고요! 제 말이라면 분명 들어줄 거예요!”
“아니, 마르낙 사제님을 저희가 막아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분명 다들 오랫동안 살아온 땅에서 떠난다는 결정을 하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마르낙 사제님을 찾아내서 마르낙 사제님의 계획을 멈춰야만 해요.”
쟈멜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다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찾아내는 거까진 이해하겠는데, 멈추는 건 어떻게 멈추려고요? 마르낙 사제님이랑 싸우려는 생각이면 일단 저는 그냥 북제국행 마차표나 끊을래요! 왕복이 아니라 편도로요! 가는 길에 남제국 은행들 돈이나 잔뜩 빌릴 거예요!”
그놈의 곧 망할 은행 돈 빌리기 타령에 다키아는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은행 돈 빌리는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해요. 그리고 일단은 대화부터 해봐야죠. 무작정 싸우기보다는요.”
“쓰읍.”
짧게 혀를 찬 쟈멜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르낙 사제님 처한 상황이 워낙에 급해서 저희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줄 거 같은데요. 설마 마르낙 사제님을 찾아내서 말 몇 마디 하면 정말 상황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면 머리가 완전 꽃밭인 거예요. 다키아. 모시던 신을 잃은 사제라는 건 이성의 영역으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야말로 심지에 불붙은 폭탄이나 다름없다고요. 다키아는 사제가 아니라서 잘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지만요.”
다키아는 제법 논리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쟈멜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쟈멜은 자신을 바라보는 다키아의 눈빛에서 자그마한 감탄을 발견하곤 뿌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그러니까 르소나 왕녀님한테 부탁해서 남제국 전역의 은행을 싹 돌면서 돈이나 빌리자니까요? 그게 무조건 남는 장사예요! 이 천재적인 쟈멜이 보장할게요!”
아직도 망할 예정인 은행에서 돈 왕창 빌리기 계획을 포기 못 한 쟈멜의 모습에 다키아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일단 내려가서 사람들한테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부터 조금 얻어봐야겠어요. 르소나. 부탁할게요.”
크게 날개를 한 번 펄럭인 황금빛 용의 동체가 느릿한 속도로 폐허를 향해 낮아졌다. 다키아랑 쟈멜이 투닥대며 떠들든 말든 펄리는 용의 등에 펴둔 이부자리에 누워 새근새근 잠을 잤다.
어차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봤자 신을 잃은 마르낙을 설득할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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