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7
158화
* * *
바리엔 성전의 북쪽 입구, 반파된 성벽 한구석의 움푹진 공간에 푸른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은 곧 두 인영을 뱉어냈다.
“리즈벨.”
아시어스는 휘청거리는 리즈벨의 몸을 받아 안았다. 리즈벨은 작달막한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똑바로 세우고 소녀를 덜렁 빼앗아 들었다. 그 조심성 없는 손길에 리즈벨은 급히 외쳤다.
“살살 해, 아시어스. 아직 어린아이잖아……!”
“살살?”
아시어스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소녀를 바위 위에 앉혔다. 아그네스는 조금 숨을 헐떡이고 있기는 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리즈벨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이를 불렀다.
“아그네스.”
“자매…… 님.”
리즈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폐허로 뒤바뀌어 버린 성전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성전을 이 꼴로 만들어 버린 남자도.
리즈벨은 아시어스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자꾸 허락도 없이 돌발 행동할 거야? 몸 괜찮아?”
어쩐지 순순히 보내 준다 했더니, 역시 이 남자의 평생에 ‘순순히’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시어스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팔 이리 내요.”
“말투 봐. 지금 잘했다 이거지?”
“……팔 줘요. 주세요.”
리즈벨의 뾰족한 눈초리를 받은 아시어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리즈벨의 팔을 더듬어 잡았다.
“혼내지 말아요.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잖아요.”
“그렇…… 기는 하지만!”
리즈벨은 초조하게 아시어스의 목에 손을 대고 고르게 뛰는 맥박과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아직 조절할 줄도 모르면서. 아무리 날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만한 마법을 쓰면 네게도 무리가 갈 게 뻔한데……!”
“날 너무 안 믿는 거 아닙니까? 이거 취급이 좀 너무한데요.”
아시어스는 부루퉁하게 대꾸하는 와중에도 그새 자잘하게 난 팔의 생채기들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쯧. 이 와중에도 쌈질이냐?]거대한 몸집의 흑사자가 우아한 동작으로 바위 위에 착지했다. 시커먼 짐승을 본 아그네스가 겁에 질려 몸을 굳혔다. 라제는 조그만 소녀에게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기억난다, 이 얼굴.]“헉…….”
[그래. 똑똑히 기억나. 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애가 겁도 없이 티스베의 소환진에 뛰어들었던 게.]라제가 으르렁거리자 아그네스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리즈벨은 얼른 소녀를 안고 토닥이며 라제를 찌릿 노려보았다.
“겁주지 마, 라제. 그보다 티스의 소환진에 뛰어들었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헬라르가 제 그릇을 죽을 곳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분명 이 애가 스스로 뛰어들었어. 티스베는 당연히, 이 애를 죽여 버렸고.]스스로. 리즈벨은 경악한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과거에도 아그네스는 정신을 일부 차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과거에도 이 애는 뤼켄에 도움을 청했나?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가야 해, 리즈벨.]휘릭. 리즈벨 곁에서 형상화한 요정이 생각의 허리를 잘랐다. 음성에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헬라르가 딸을 찾고 있어. 벗어나야 해. 지금 당장!]반짝. 시야에 푸른빛이 튀나 싶더니, 그들이 디딘 땅에 이동진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냉기 도는 성력에 끄트머리가 갉아 먹혔다. 요정이 날카롭게 일갈했다.
[소용없어. 아무리 반파되었다 해도 여기는 헬라르의 영역이야. 다른 방법을-.]“단언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시어스가 비쭉 웃었다. 그 얼굴이 그녀가 알던 남자가 종종 짓던 비딱한 표정과 닮아 있어서, 리즈벨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리즈벨은 급히 아시어스를 붙들었다.
“잠깐, 아시어스. 너 뭔가를 기억해 낸…….”
파지직. 그녀의 말이 맺어지기도 전에, 팽팽하게 겨루던 금빛과 푸른빛의 우위가 뒤바뀌었다. 푸른 마력이 휙 치솟았다.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기하학적인 도형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헬라르의 성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마력이 제 위에 발 디딘 자들의 몸을 삼켰다.
* * *
[섣불렀어. 리즈벨.]소녀의 형상으로 자라난 요정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성녀를 해방시킨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잖아.]리즈벨은 그녀와 아시어스가 떠나왔던 주시케 외곽의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그네스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아시어스가 언제 또 헬라르의 인형이 될지 모른다며 강력한 수면 마법을 걸어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잠시 잠들어 있는 편이 아그네스에게도 더 좋으리라.
리즈벨은 침대맡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아. 거기서 끝장을 보는 게 최고의 선택이었겠지.”
본래의 계획은 헬라르가 아그네스를 지배하고 있는 순간에 리즈벨 자신의 힘으로 성녀를 제압하고, 그 안에 든 헬라르에게 종속을 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그네스를 해방시키며 그 계획은 틀어졌다. 리즈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인정한다. 순간의 판단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굳이 어렵게 꼬아 버렸다는 걸.
[시간의 축이 흔들리고 있어. 너도 느끼고 있을 거야.]“……그래.”
리즈벨은 천천히 수긍했다. 아그네스에게서 그녀의 존재를 억압하고 있던 눈가리개를 벗겨 낸 순간 알았다. 그녀가 시간 선의 세계에서 분리해 두었던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시대에 성녀는 한 명뿐이다. 그 말을 달리 하면, 한 시대에 시간의 권능을 각성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이라는 뜻이 된다.
그녀가 이 시간 선으로 들어오며 이미 깨어진 그 규칙이 아그네스가 일시적으로나마 헬라르에게서 해방된 순간 크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한 시대에 성녀가 두 명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암운이 깃든 세계가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간의 실들이 위태롭게 파도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리즈벨은 육안으로 아주 흐릿하게 보이는 시간의 실들을 살피며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이제 막 비틀리기 시작했을 뿐이야. 당장 사달이 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 애가 지금처럼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권능을 각성하는 건 시간문제야.]요정이 날카롭게 맹점을 찔렀다.
[아그네스가 권능을 발현하기 시작하면 때는 늦어. 세계는 무너질 거야. 너는 아까 그 제단 위에서 저 애를 죽이고 헬라르를 취했어야 했어.]“…….”
[너 대체 뭐를 위해서 이 모든 위험한 짓들을 감행했어?]무엇을 위해서냐고? 그녀 자신을,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왔다.
하지만 아그네스를 해방시킨 것을 후회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분명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어. 단순한 인형에 불과했다면 눈가리개를 벗겨 낸 것으로는 깨울 수조차 없었을 거야.”
과거에 이 애가 죽고 100년이 넘도록 성녀가 태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때까지 대륙의 역사상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했던 성녀가 권능을 소실하기도 전에 죽어, 권능이 힘을 회복하고 다시 숙주를 찾아 나서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명료해진다. 아그네스는 리즈벨이 그랬듯 헬라르의 종속에서 스스로를 지켜 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티스베의 소환진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았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아그네스의 곁에는 그녀를 도와주고 헬라르의 눈으로부터 지켜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리즈벨에게 로제스와 아시어스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누구도 와 주지 않았으니까…….
어린애였다. 아그네스는 지난 생에서 리즈벨이 지칼에게 살해당했던 나이보다 더 어렸다.
리즈벨은 입술 안쪽을 아프게 깨물었다.
“나는 과거를 바꾸고 싶어서 여기에 왔어. 하지만 아그네스를 죽여서 끝을 보는 건 나 자신이 용납이 안 돼.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아?”
[…….]“저 애가 살고 싶다고 하는 게 얼마나 절박한 바람인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수천 년간 헬라르의 종속에서 스스로를 지켜 낸 성녀는 그녀와 아그네스, 단둘이었다.
“내가 죽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저 애가 죽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우리가 시체나 인형 따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인 이상 당연히 죽고 당연히 죽여야 하는 건 없어.”
[……그럼 어떡할 셈인데?]리즈벨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된 눈으로 아그네스를 응시했다.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했던 것 같아……. 돌려보내 주고 싶어.”
[그 말은…….]“아그네스가 가진 권능을 발현하도록 도와야겠어. 헬라르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그리고 세계가 완전히 비틀리기 전에 헬라르를 아스테르반에 묶어 놔야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아그네스를 해방시킨 직후부터 결론은 내려져 있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시간의 축이 완전히 부서지기 전에 헬라르를 봉인해 넣고, 시간의 선들을 다시 제대로 미래와 이어 놓아야 한다.
[……그래.]요정이 마침내 한숨과 함께 수긍했다.
[너의 선택을 존중해. 언제나 그랬듯.]“좋아, 그럼.”
리즈벨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잠든 성녀를 등지고 오두막을 나섰다. 그래서 리즈벨은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소녀가 부스스 눈을 뜬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