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8
159화
* * *
아시어스는 오두막 외벽에 등을 기댄 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기억이 느릿하게 제자리를 찾는 감각이 선연했다. 부서져 있던 리즈벨에 대한 기억 역시 서서히 본궤도에 올라섰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고, 무슨 거래를 했었고, 어떤 시간을 나눠 왔는지.
끼익. 낡은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눈이 마주치자 리즈벨이 예쁘게 웃었다.
“좀 어때? 아까 마력을 과하게 썼잖아.”
“아직도 어린애 취급이네요. 당신이야말로 팔은 괜찮…….”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은 리즈벨이 가까이 다가오며 점차 잦아들다, 그녀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음과 동시에 뚝 멎었다.
아시어스는 어린아이처럼 제게 안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렴풋하게만 느껴 왔던 근원 모를 애정이 점차 뚜렷해졌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어깨를 잡고 떼어 낸 뒤,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익숙하게 화답해 오는 부드러운 입술과 섞이는 숨결, 타액. 배 속이 아릿해져 오는 자극. 욕심껏 입을 맞춘 뒤에야 아시어스는 느릿하게 물러났다.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맞아. 너는 늘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닌 것 같은데.”
아시어스의 미간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리즈벨이 눈매를 휘며 소곤소곤 물었다.
“아까, 제단 아래서.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챘던 거지?”
“……옛날보다는, 내가 당신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나 보죠.”
결국 아시어스는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살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알아요.”
“……응.”
리즈벨은 그의 턱 밑에 입술을 댔다. 잠시 일정하게 뛰는 맥박을 느끼다 천천히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봐도 돼? 나를 항상 어려워했으면서.”
“……이런 상황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요. 아직 전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신 오라버니와 관련된 일이었던 것 같은데.”
“…….”
“게다가 나 같은 걸 위해서 당신 손목을 잘라 버리려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사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아시어스는 결국 인상을 찡그렸다. 리즈벨이 버릇처럼 그에게 말해 주었듯, 그 역시 언제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하지만 리즈벨이 위험한 짓을 자처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가는 것도, 누군가를 위해 그녀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희생하려 드는 것도, 사실은 싫다.
“리즈벨. 역시 나는 당신이-.”
힘든 건 싫어. 막 아시어스가 그 생각을 밖으로 내뱉으려던 찰나였다.
“저는 괜찮아요. 자매님.”
열린 문 안쪽으로부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돌아갔다.
“아그네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는지 마른 소녀가 문가에 서 있었다. 아그네스가 넘어질 듯 휘청이며 리즈벨에게 다가왔다. 리즈벨은 아시어스에게서 떨어지며 소녀를 향해 물었다.
“언제 일어났-.”
“뤼켄이 위험해.”
“뭐?”
그 말에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히 얼어붙었다. 아시어스는 뤼켄이 무엇인가, 하고 되짚어 보다 이윽고 하얗게 질렸다. 그의 집이다.
리즈벨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거, 무슨 말이야?”
“후계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남부는 이미 기습당했어. 지금쯤이면 성기사들이 에엘의 본저를 포위하고 있을 거야.”
아그네스는 정신없이 지껄였다. 헬라르가 다시 그녀의 몸을 차지하기 전에, 또다시 이지를 잃고 인형이 되어 버리기 전에 아는 정보를 모두 쏟아 내야 했다.
“형이…….”
아시어스가 멍하니 되뇌었다. 성력의 창에 목을 꿰뚫리던 그 장면이 눈앞을 채웠다. 아그네스가 헐떡였다.
“이미 뤼켄에서는 악마를 소환할 준비를 마쳤을 거예요.”
전신의 살갗을 예리한 칼날로 베어 내는 듯한 섬뜩함이 리즈벨을 덮쳤다.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뤼켄이 티스베를 소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시 와 버렸다.
“헬라르께서는 곧바로 에엘로 향할 거예요. 그분은, 그분의 땅에 악마를 용인하지 않으니까.”
아그네스의 눈에 어떤 강한 결의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버려요.”
“뭐?”
“내가 지금 여신을 다시 내게로 받아들일 테니까, 지금 당장 나를 죽이고 여신을 봉인하면 돼요.”
리즈벨은 대번에 표정을 굳혔지만, 아그네스는 도리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그네스는 사실 세상을 몰랐다. 여신이 뭔지도, 성녀의 의무가 뭔지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녀는 그냥 여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다만 아그네스에게 일생의 소원이 하나 있다면, 저 먼 시골 코웰의 다 쓰러져 가는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허름하고 가난한 고아원이지만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곳.
그곳으로 돌아가려면. 아그네스의 방황하던 시선이 리즈벨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아그네스는 작게 속삭였다.
“자매님. 헬라르를 죽이러 오신 거잖아요.”
이 여자는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진 헬라르의 성녀다.
한 세대에 성녀는 오직 한 명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아그네스는 몰랐다. 다만 이 예쁜 자매님은 그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강하고, 그리고 여신과 당당히 대적할 수 있는 ‘진짜’였다. 자신 같은 백치가 아니라.
“다정하고 상냥한 자매님. 눈가리개를 벗겨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사실은 저도 알고 있어요.”
아그네스는 자신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을 마비시키는 환은 헬라르로부터 그녀의 이지를 지켜 주기는 했지만, 몸을 성히 보전해 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수천 명의 목을 베던 것도 기억했다. 그때 자신은 아무런 죄책감도, 공포심도 느끼지 못했다. 도끼를 내리치는 목각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스스로가 얼마나 혐오스러웠던가.
이번에도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다시 그런 삶을 반복하느니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았다.
“코웰. 라타에 남부의 시골이에요.”
“코웰…….”
“나를 그곳에 묻어 주세요.”
“뭐?”
“내가 선생님과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던 그 집 앞마당에요.”
소녀에게 그곳은 세상 전부였다. 살아서 아름다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면, 죽어서라도 갈 거야.
“그러니까 자매님은-.”
“아니.”
그러나 리즈벨은 단칼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너는 나랑 갈 거야. 아그네스.”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옆얼굴에 드러난 확연한 표정을 보며 짧게 탄식했다.
그래. 저럴 줄 알았다. 리즈벨이 결코 용납하지 못하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딱 하나였다. 죽은 눈.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눈이다.
리즈벨은 입술 안쪽을 꽉 깨물며 아그네스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아시어스를 돌아보았다.
“돌아가자. 아시어스.”
“…….”
모순적인 감정이 서로 충돌했다. 이대로 리즈벨을 데리고 둘만 아는 곳으로 떠나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그리고 서서히 형체를 갖춰 가는 유년의 비극과 오랜 그리움.
아득, 이가 악물렸다. 결국에는 아시어스 역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거대한 이동진이 그들의 발밑에 펼쳐졌다.
Chapter 15. 구원과 종말
에엘. 뤼켄의 본저에 암운이 돌았다.
저택은 이미 헬라르의 성기사들로 완벽히 포위되어 있었다. 바리엔에서 내려온 신탁이 에엘로 전해지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신탁에서 말하는 ‘마녀’가 누구를 뜻하는지, 뤼켄의 모두가 단번에 알아들었다. 바리엔에서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즉각 저택에 몇 겹에 달하는 방어 결계가 펼쳐지고, 대륙 곳곳에 있는 뤼켄의 방계들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 명령은 한 발 늦었다. 신탁이 내려온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아, 뤼켄의 후계자가 치명상을 입고 간신히 수도의 본저로 몸을 피해 온 것이다.
“공자님!”
“오빠!”
아슬아슬하게 포위망이 닫히던 찰나, 저택 안쪽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나타난 라나크를 보자마자 엘제니아는 당장 치유 마법을 엮었다.
“눈 떠. 정신 차려, 오빠.”
엘제니아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마력을 끊임없이 라나크의 몸에 부어 넣었다. 오라비의 가슴팍을 꾹 누른 손은 피투성이였다.
“엘제. 그렇게 세게 누르면 아프…….”
“시끄러워. 후계자씩이나 되어서 이 꼴로 돌아오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엘제니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라나크가 교수로 부임해 있던 남부의 아카데미는 이미 성기사들의 발에 처참히 짓밟혔다고 했다. 라나크가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완성한 방어 마법진 덕분에 인명 피해는 현저히 적었으나, 정작 라나크 자신은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심각했다. 성력에 손상된 조직은 치유 마법을 아무리 걸어도 아물지 않았다. 엘제니아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뤼켄의 제자들 대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녹색 마력을 채우는데도 환부를 더 벌어지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라나크는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뤼켄의 세 직계 중 가장 냉철한 이성을 가진 그는 당장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빠르게 판단했다. 라나크는 간신히 여동생의 어깨를 밀어냈다.
“나는 됐으니까…… 가서 아버지나, 도와. 엘제.”
“지금 오빠 상태가 어떤지는 알아? 이대로 개죽음당하겠다고?”
엘제니아의 회색빛 눈에 사나운 빛이 튀었다. 라나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생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가 우선인지 똑바로 해, 엘제니아.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뤼켄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