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4
2화
* * *
“아….”
고운 눈매가 은근한 희락으로 움찔거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아시어스의 검은 머리칼이 휘감겼다.
“정말 안 해도 되는 걱정을, 읏, 하시네….”
“그렇죠. 알아서 잘하는걸.”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곧 귓전에서 멀어졌다.
아시어스의 움직임이 점차 집요하고 농밀해졌다. 어느새 바짝 힘이 들어간 그녀의 허벅지를 그가 단단히 움켜잡고 있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훅 불어넣는 숨결조차 자극이 되어 리즈벨을 떨게 했다. 한없이 다정하게 굴다가도 금세 조갈 난 짐승처럼 돌변해 목을 축인다.
어느 순간 리즈벨이 소리 없이 숨을 집어삼켰다. 그가 봐주지 않고 그녀를 더욱 아득한 곳까지 떠밀었다. 아시어스가 지분거리는 곳에서 시작된 가벼운 전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 이윽고 가쁜 숨이 연신 내뱉어졌다.
겨우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는 아시어스가 홀린 듯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바로 지금과 같은 그녀의 얼굴을 사랑했다. 리즈벨 역시 그녀에게 단단히 빠져든 표정의 아시어스를 보는 걸 좋아했다.
리즈벨이 그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들어 올렸다. 아시어스의 입술이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잘하고 있지, 언제나.”
순종적으로 리즈벨을 올려다보는 회색 눈동자가 나른한 듯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그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에 옮겨 묻은 것을 할짝거렸다.
아시어스가 이렇게 유독 야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길 때면 리즈벨은 늘 오싹한 기대감을 느꼈다. 곧 이어질 일들과 그가 내보일 표정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복부가 저릿해져 왔다.
리즈벨은 그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이제 안아줘.”
기다렸다는 듯 아시어스가 몸을 일으켰다.
눈높이가 훅 반전되며 리즈벨이 그를 올려다본 순간 입술이 잡아먹혔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방식은 늘 그랬듯 조심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작은 나긋하게 해도, 이성이 하나둘 날아갈수록 몸짓은 점차 거칠고 급박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서 서로를 깊이 담을 때는 오가던 말소리조차 사그라졌다.
파도 소리에 뒤섞인 거친 호흡과 신음이 귓전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리즈벨의 눈앞이 하얗고 까맣게 점멸했다. 오색의 안화가 폭죽처럼 터졌다. 아시어스의 억눌린 신음이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 세상에 오직 단둘만이 남은 기분. 그의 손등을 더듬거리자 아시어스가 단번에 깍지를 끼며 더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서로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맞닿았다.
다시 한 번 시야와 감각이 폭발했다.
아찔하게 높은 곳까지 떠밀렸던 정신이 다시금 제 궤도를 찾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절정의 여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등골이 오싹오싹하다.
그렇게 강렬하게 피어오른 한 차례의 열락이 조금씩 옅어져 가던 즈음이었다.
리즈벨이 눅진하게 풀어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아시어스.”
“응?”
“라나크 님께 조카 한 명 더 만들어드릴 생각은 없어?”
그녀를 끌어안고 만족스럽게 후희를 즐기던 아시어스가 아, 하고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리즈벨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새삼스럽게. 해.”
뜸을 들이는 성격이 아닌데, 아시어스는 답지 않게 살짝 망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진 그의 대답은 리즈벨의 예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무슨 준비?”
“당신 외의 살아갈 이유를 만들 준비요.”
단순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올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리즈벨의 빗장뼈 위에 제 뺨을 문지른 아시어스가 나른하게 덧붙였다.
“아마 평생 안 될 것 같아.”
“그래?”
“네. 내 세계에 리즈벨 발디마르 외에 다른 존재를 들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누구와 나눠 갖기도 싫고. 당신 이외의 사람에게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싫어. 당신 오빠만으로도 이미 충분해요.”
언제나처럼 집착과 소유욕이 충만한 발언이었다. 여기서 아주 살짝만 더 비틀리면 금세 광기로 변질되는 건 일도 아닐 감정이다.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가던 아시어스가 싱겁게 어깨를 들썩였다.
“뭐,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래요.”
리즈벨은 귀밑을 간질거리는 그의 머리칼을 손빗으로 쓰다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왜요? 당신은 어떤데?”
“나도 그렇거든.”
그녀 역시 정확히 그와 같았다.
리즈벨의 세계는 더하고 뺄 것 없이 이미 완벽해졌다. 그녀가 평생 갈망해 온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 어떠한 변수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게 두렵다.
게다가 리즈벨은 자신이 아시어스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가 그에게 그렇듯, 그 역시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귀했다.
리즈벨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히 가져본 것이다. 그러니 아시어스만으로도 리즈벨은 차고도 넘쳤다. 매일매일 키스하고 살을 맞대고 사랑을 속삭여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한평생 이러고만 살아도 좋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그들의 세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리즈벨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나도 너만 있으면 돼.”
“당연히 그래야죠.”
몹시 당당하게 대꾸한 아시어스가 그녀에게서 느리게 몸을 물렸다. 리즈벨이 움찔거리며 그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아시어스가 느른한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어요, 리즈벨.”
“뭔데? 자, 잠깐만. 그냥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그게 아주, 아주, 엄청나게 힘든 일인 것 같았거든요. 엘제 누나가 엘리엇 낳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리즈벨, 자꾸 이렇게 안 놔주면 곤란해요.”
“읏… 알았어. 놓으면 되잖아.”
그녀가 아시어스의 어깨를 짚고 밀어냈다. 대신 난간을 움켜쥔 리즈벨의 손등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놓으란다고 진짜 놓다니. 그는 아쉬움을 달래며 순순히 떨어지는 대신, 납작하게 들어간 그녀의 배에 손을 가져갔다.
“아이를 낳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임신과 출산은 현실이에요, 리즈벨.”
그렇게 말하는 아시어스의 표정이 전에 없이 확고했다.
아직도 그가 작정하고 치근덕거리면 버거워 하는 데다 허리도 저렇게 가느다란데, 이런 몸에서 어떻게 아이가 자라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시어스는 그의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을 번쩍 안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발코니를 밝혔던 빛의 구슬들이 그들을 따라 포르르 날아 들어왔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을 꼭 끌어안고 침대 위에 풀썩 몸을 뉘였다. 그의 위를 차지한 그녀가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렇게 힘들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니까 다들 가족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지금은 역시 잘 모르겠지만.”
리즈벨이 짓궂게 웃으며 그의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너랑 나랑 반씩 섞으면 어떤 얼굴이 나올지.”
“당신을 반만 닮아도 생긴 걸로 대륙 제패는 거뜬하겠죠.”
“내가 아니라 너겠지.”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정말로 궁금해졌다.
역대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대마법사와 이 세계에 현존하는 유일한 성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인물로 자라게 될까?
리즈벨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성격까지 섞이면 안 될 텐데. 생김새는 널 닮고 성격은 나를 닮았으면 좋겠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랑하는 우리 왕녀님, 미안하지만 당신도 썩 그렇게 성격이….”
“내가 뭐?”
“너무 좋다고요. 착하고 상냥하고. 나름 친철하고. 응, 대충 그렇지.”
“대충?”
“대충 당신을 닮으면 참 괜찮은 아이일 것 같다는 뜻이에요. 물론 나를 좀 더 많이 닮으면 더 좋을 거고.”
“뭐래. 너보단 내가 나아.”
“진심이에요?”
리즈벨이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사실 굳이 누가 더 훌륭한 성품을 가졌는지 재어 보는 건 그들 사이에선 의미가 없었다.
둘 다 엇비슷하게 나긋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소유욕이 강하며 상당히 자주, 지독하리만큼 무모하고 과격했다.
결국 리즈벨은 우리 둘 다 닮으면 안 되겠네, 하고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아시어스도 피식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성격 나쁜 애를 만들 수는 없지. 세상에겐 무척 유감이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겁나잖아.”
둘은 한참을 이마를 맞대고 서로 키득거렸다.
즐거운 상상이었다. 외양부터 성격까지 서로의 복제품 같은 아이라니. 물론 실제가 된다면 꽤 등골 서늘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네가 원한다면 나도 고민해 보려고는 했는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야 오히려 좋네. 물론 나도 언젠가는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죠, 뭐.”
아시어스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다시 입을 맞춰 왔다.
그러나 막연히 내뱉었던 ‘그때’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왔다.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