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70
71화
* * *
유스타프는 오늘 몹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그의 서른두 번째 생일이었다. 게다가 대륙 곳곳의 동맹국과 협정국들에서 보내온 선물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가장 뿌듯한 것은 따로 있었다. 황제의 주홍빛 눈이 흘끔 황좌 아래로 향했다.
황제에게로 오르는 스물두 개의 계단 중간의 넓은 단. 그곳에 선 두 명의 남녀. 대륙 유일의 마탑주와 헬라르의 성녀.
라타에 황제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패가 둘이나 그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유스타프는 정치적인 인간 중에서도 수면 위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부류에 속했다. 가장 귀하고 좋은 패는 숨기기보다는 드러내어 휘두르는 편을 선호한다.
선대 황제들은 마탑의 주인, 대륙의 대마법사를 계약으로 라타에에 묶어 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대 황제들 중 누구도 헬라르의 성녀를 라타에에 종속시키지는 못했다. 단지 가장 큰 헬라르의 성전을 짓고 이단자들을 적극적으로 몰아내어 성녀의 환심을 샀을 뿐.
선조들이 못 한 것을 자신이 해낸 것이다. 유스타프는 뿌듯하게 웃었다.
그때, 열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닮은 푸른 눈이 똑바로 그를 향했다.
“……거참.”
유스타프는 그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돌려 피했다. 똑바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얼굴이 무기인 인간은 저놈 하나로 끝일 줄 알았더니…….”
가끔 보면 세상은 조금 불공평하다. 힘을 가졌으면 얼굴이라도 좀 못나면 어디 덧나나.
유스타프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로 마탑주와 성녀를 훑었다.
“……?”
그러다 이번에는 아시어스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쳤다. 유리알 너머의 잿빛 눈에 담긴 것은 선명한 불쾌감이었다. 유스타프는 인상을 구겼다.
‘뭐. 왜?’
아시어스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성녀가 유스타프의 시야에서 완전히 가려졌다.
유스타프는 어이가 없어 튀어나오려는 헛숨을 눌러 삼켰다. 대체 왜 저렇게 싸고도는지 모를 일이다.
마탑주의 경계심이 높으니 그가 성녀에게 따로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흥.”
그러나 유스타프는 이미 성공했다. 그것도 바로 오늘. 몇 시간 전에.
서른을 훌쩍 넘겼음에도 여전히 소년미가 가득한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 천사 같은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던 그 짧은 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같은 순간, 리즈벨 또한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몇 시간 전, 리즈벨이 대기실에 혼자 남겨진 30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 * *
“마탑 생활은 불편하지 않나?”
“…….”
긴 금발에 푸른 눈의 성녀는 대답 없이 그를 빤히 보기만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황제의 존재에 크게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황송해하거나 하다못해 긴장한 얼굴도 아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지도, 마주한 상대를 탐색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저 투명한 시선. 무관심.
심지어 리즈벨은 예를 갖추지도 않았다. 그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의 자세 그대로 손등에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무려 제국의 황제를 앞에 두고 있는데!
‘진짜 미친년인가.’
한때 광증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유스타프는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은근한 어조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황성에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있는데.”
“…….”
“싫은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더니 싫으냐는 말에는 득달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약간 무안할 정도였다.
“시녀들을 물렸다지. 단지 치장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보낸 것이 아닌데.”
“…….”
“그대가 내 의중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왔지. 무례를 용서하라.”
유스타프는 완벽한 라타에 황족이었다. 다시 말해, 원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내뱉는 법이 없었다. 은근하고 교묘하게 말을 돌려, 상대가 저도 모르는 새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도록 유도한다.
물론 건방진 마탑주 앞에서는 그의 황족으로서의 체면을 죄 깎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건 마탑주 한정이다.
‘이제 막 각성한 어린 성녀 정도야…….’
리즈벨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신 유스타프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유스타프가 들어오기 전부터, 아니 사실은 그가 노크했을 때부터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뻔했다. 아시어스는 ‘문’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숨 쉬듯 공간 마법을 구사하는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에릴이 다시 돌아온 것인가. 떠난 지 5분도 안 되어서?
에릴 테사는 그렇게 철저하지 못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타국의 황성에서, 황성 가장 깊숙이 위치한 이 비밀스러운 대기실을, 그것도 성녀를 독대하기 위해 멋대로 들이닥칠 수 있는 인물. 뻔하지 않은가.
“할 수 있다면 일찍이 황성으로 부르고 싶었는데 마탑주가 어찌나 고집을 부리던지, 원…….”
유스타프는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눈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성녀께서는 경청하는 자세가 참 훌륭하시군.”
네 혀는 입천장에 들러붙었느냐, 뭐 이런 뜻인 것 같았다. 이게 라타에식 화법인가. 리즈벨은 입 속으로 몇 마디 되뇌다 툭 내뱉었다.
“발디마르에서는 상대의 용건이 끝나기 전까지는 입을 열지 않는 게 예의라.”
그러니까 병신처럼 자꾸 말을 빙빙 돌려서 하면 내 답을 듣기는 어려울 거야. 뭐 그런 뜻이었다.
유스타프가 흠칫하며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그 눈빛에 리즈벨은 약간 지루해졌다. 발디마르인은 천성적으로 말보다는 몸의 대화를 선호한다. 어떤 의미로든. 법보다는 말, 말보다는 주먹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래, 그럼 그냥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유스타프가 못마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테사 경이 설명을 해 주기야 했겠지만, 그치는 아무래도 기사라. 탄신회의 구체적인 의미나 그대가 성녀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태도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을 테지. 마탑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유스타프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문이 다시 열리고, 마탑에서 리즈벨이 물렸던 시녀들 두엇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들이 그대를 도와줄 걸세. 짧은 시간이지만 성녀께서 워낙 명석하시니 배움에 어려움은 없을 테지. 안 그런가?”
리즈벨은 새로 들어온 시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대놓고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 태도가 유스타프에게 약간의 초조함을 불러왔다. 그는 결국 숨겨 놓았던 패를 꺼내 들었다.
“발디마르에 새 왕이 즉위했다 하더군.”
푸른 눈에 드디어 이채가 서렸다. 이 화제가 일종의 스위치였던 모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유스타프도 그녀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안도감, 그리고 기쁨이다.
“마탑주는 발디마르의 소식은 전해 주지 않았겠지. 소식은 전부 황실로 직접 전해져 오니까. 아직 시국이 불안정한지 이번 해에는 사절을 보내오기 어렵다 하더군. 그건 유감스럽지만,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야.”
“…….”
“역시 고국이라 그런가. 발디마르가 궁금한가 보지?”
줄곧 침착함을 잃지 않던 푸른 눈이 살짝 흔들렸다. 유스타프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오늘의 탄신회가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네. 그럼 그대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즈벨은 그를 따라 일어서지도, 한마디 말을 뱉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언의 긍정이리라.
그가 떠난 뒤, 남은 시녀들은 리즈벨에게 무언가를 가르쳤다. 딱히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유스타프가 리즈벨에게 원한 것은 복종의 예였다.
* * *
‘복종의 예라.’
리즈벨은 아시어스 뒤에 서서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가리고 있었기에 굳이 표정을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유스타프가 독대 내내 리즈벨을 거슬리게 한 건 하나였다.
반말.
“마탑 생활은 불편하지 않나?”
“발디마르가 궁금한가 보지?”
뱉는 말마다 족족 지나친 하대였다. 리즈벨은 바보가 아니었다. 헬라르의 성녀.
그것도 113년 만의 성녀는 대륙의 모든 지고한 지배자들과 위상을 같이한다고 들었다. 다시 말해, 성녀라는 이름만으로 수많은 군주를 무릎 꿇릴 수 있다.
속사정이야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 그녀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라타에 황실 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딱히 밉보일 필요는 없으니 탄신회까지 오긴 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황제의 무례를 당연히 포용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 하대. 교묘한 회유. 복종의 예를 요구하는 것.
그것들을 전부 받아 줘야 할 정도의 ‘가치’가 황제에게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