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99
100화
“헉…….”
리즈벨은 숨을 멈추고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금빛 빛 무리가 천천히 작은 형상을 이루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력은 그녀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뭉쳐 들더니, 이내 어떤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리즈벨의 눈이 커졌다.
“……!”
꼭 빛으로 빚어진 작은 요정 같았다. 허공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돈 그것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나를 찾은 줄 알고 좋아했더니, 너 아직도 묶여 있구나.]리즈벨이 발디마르에서, 그리고 라타에 황제의 탄신 연회에서 들었던 헬라르의 음성보다 더 높고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네가…… 헬라르야?”
[헬라르인 것 같아?]재미있다는 말투였다. 요정이 포르르 날아 그녀 주위를 춤추듯 맴돌았다.
[미안하지만 틀렸어. 나는 네 안에 잠들어 있던 헬라르의 권능이야. 그녀의 조각이지.]“여신의 조각…….”
“…….”
[나는 너와 헬라르가 공유하고 있는 ‘조각’이자, 너와 헬라르를 잇는 연결 고리야.]그 말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리즈벨은 느리게 속삭였다.
“너로구나.”
저것이었다. 성녀에게 깃든 헬라르의 권능. 여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 아시어스가 오랜 세월을 염원하던 것.
금빛 요정이 웃었다.
[만나서 기뻐, 리즈벨.]리즈벨이 손을 내밀자 요정이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날아올랐다. 리즈벨은 얼굴 없는 요정을 향해 물었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될까?”
[나는 너야.]요정이 매우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낭랑하게 웃었다.
[너는 너 자신에게 따로 이름을 붙이니?]위화감이 들었다. 리즈벨은 다시 물었다.
“너는 내 편이야?”
요정의 웃음소리가 뚝 멈추었다. 웃음기가 사라지자 그것은 거짓말처럼 냉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누는 건 의미가 없어, 리즈벨.]“…….”
[너, 나, 그리고 헬라르. 각각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헬라르라는 본체와 성녀라는 그릇. 그리고 본체와 그릇을 잇는 권능. 그것들은 전부 하나라는 그런 말이었다.
리즈벨은 잠깐 그 말을 되뇌어 보다 차갑게 웃었다.
“궤변은 취급 안 해.”
[…….]“성녀가 성력을 각성하기 전까진 헬라르조차 성녀를 찾을 수가 없지. 그러니 성녀를 선택하는 것은 ‘너’야. 헬라르가 지상에 남겨 놓은 권능의 일부. 성녀를 태어나게 하는 헬라르의 축복.”
빛무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리즈벨은 작게 속삭였다.
“헬라르의 일부가 아니라,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너는 나도 아니고 헬라르도 아니지. 내가 헬라르가 아니듯이.”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고, 위험에서 그녀를 몇 번이고 구해 냈으며, 그녀의 뜻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권능.
헬라르의 권능이 그녀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낸 리즈벨의 힘.
요정이 다시 미소를 지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너는 역시 영리해.]요정을 둘러싼 빛 무리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조금 더 명확한 형태를 띤 요정이 허공을 걸었다.
[나를 네 힘으로 실체화한 건 네가 처음이야.]성녀는 여신을 담는 ‘그릇’이다. 헬라르의 소중한 인형. 리즈벨의 운명도 본래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 너는 곧 나야. 우리는 떼어 놓을 수 없어. 내가 너를 떠나면 너는 죽겠지. 그리고 너를 잃은 나는 실체를 잃을 거야. 또다시 새로운 성녀를 찾아 나를 실체화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수도 없이 오랜 세월을.]“…….”
[그러니 말하자면 너와 나는 ‘운명 공동체’랄까.]“그럼.”
리즈벨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걸렸다. 매혹적인 승자의 미소였다.
“너는 완벽히 내게 귀속된 존재구나.”
[내 말 뭐로 들었어? 우리는 운명 공동-.]“아니. 우열은 똑바로 가려야지.”
리즈벨은 손을 뻗어 요정을 움켜잡았다. 따스한 기운이 손을 훅 감쌌다. 리즈벨은 형체를 구성한 그녀의 권능에게 다정다감하게 속삭였다.
“나는 너에게 협력을 요청할 생각은 없어. 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힘이었고, 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나는 네 주인이지.”
[너는 내가 없으면 죽어.]“누구도 너를 내게서 앗아 가지 못할 테니 네 그 말도 현실성이 없구나.”
리즈벨은 싸늘하게 일갈했다.
“너 말이야, 내게 귀속된 주제에 어설프게 헬라르를 따라 할 생각 하지 마. 나는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나를 넘기지 않을 거니까.”
요정은 침묵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빛무리가 리즈벨의 주위를 반딧불이처럼 날아다녔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한번 시험을 해 보는 거야.]“무슨 시험?”
[네가 나를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는지.]요정이 리즈벨의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금가루처럼 바닥에 소복이 쌓였다가, 이내 금빛 날개처럼 촤르륵 펼쳐졌다.
“시험이라니. 뭘 어떻게 시험하겠다는…….”
그 순간, 땅 아래에서 미세한 진동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차분하던 리즈벨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은데.]요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린 것은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바로 다음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성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성녀님, 성녀님!”
쾅쾅. 누군가 닫힌 제단의 석문을 두들겼다.
리즈벨은 다급히 권능을 전부 제 안으로 불러들이고 몸을 돌렸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을 만큼 제단 전체가 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리즈벨의 손이 닿은 석문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녀를 이곳으로 안내한 노신관이 해쓱하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것이……!”
노신관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리즈벨은 짧은 숨을 들이켰다. 성전 앞의 뜰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커먼 색의 마력이었다.
‘아시어스?’
아니었다. 리즈벨은 퀴퀴한 죽음의 냄새를 맡자마자 생각을 철회했다. 아시어스가 걸어 둔 마법진이 아니었다. 네키엘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기시감이 또다시 그녀를 휩쌌다.
검은 마력은 악마의 힘을 뜻한다. 리즈벨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이 성역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건 이미 아시어스의 마법진을 제단에서 발견하며 들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마법이 침투할 수 있었을 줄은-.
“성녀님!”
리즈벨의 생각은 거기에서 끊겼다.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이들이 갑작스러운 지진에 혼비백산하여 뜰로 도망 나오고 있었다. 검은 마법진으로 뒤덮인 뜰에.
닿는 순간 잡아먹힐 텐데!
“아, 망할…….”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거대한 성력의 낫이 사람들을 갈퀴로 쓸어 내듯 붙잡아 마법진에 붙잡히지 않도록 막았다.
마법진에서 치솟은 촉수 하나가 리즈벨의 성력을 잡아챘다.
“윽……!”
리즈벨이 간발의 차이로 성력을 잘라 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반동으로 휘청이는 그녀의 몸을 홱 끌어당겼다. 아시어스가 아니다.
“뭐야?!”
리즈벨이 날카롭게 외치며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검은 마법진이 그녀의 발밑에 펼쳐졌다. 그리고 리즈벨은 처음 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
그 순간 마법진이 발동했다. 위이잉-.
리즈벨과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이의 모습은 순식간에 성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리즈벨을 납치한 이는 밤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의 남자였다.
어느 면으로 보나 순박한 시골 청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자는 장소가 바뀌자마자 걸걸하게 외쳤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그의 손이 영 무례했다.
철컥.
“죄송합니다, 성녀님…….”
남자가 코를 훌쩍거리며 연신 중얼거렸다.
리즈벨은 약간 기가 막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울어야 하는 건 나 아니야? 네가 왜 울고 있어?”
“저도 어쩔 수가 없었…… 용서를…….”
“용서를 바라지 말고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 생각을 해.”
리즈벨은 한숨을 쉬며 제 양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차인 건 수갑이었다. 수갑을 차 본 건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발디마르에서 광증을 연기하던 때, 시녀들이 툭하면 발작하는 그녀의 양손과 발을 침대 기둥에 묶어 놓곤 했으니까.
리즈벨은 뜻밖의 향수를 느끼며 수갑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수갑에는 복잡한 수식이 길게 둘려 있었다. 마법 물품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그녀가 끌려온 곳은 웬 허름한 유리 온실이었다. 온실 안의 식물들은 전부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부서진 티 테이블과 의자가 형편없이 검은 흙바닥을 굴렀다.
리즈벨의 감상은 딱 한 줄이었다.
“지저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