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95
293화 아이템 설명서 (2)
“안녕.”
열 두엇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몸에 비해 큰 로브를 치렁하게 걸치고 문양이 들어간 검대에 장검을 차고 있다. 곱슬기가 있는 검은 머리카락. 흰 피부. 붉은 눈동자.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소년은 동생과 닮아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또 내 동생의 모습을.”
“왜냐하면.”
“알아.”
해파리에게 들었다. 내게 친숙한 모습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쉽고 어쩌고저쩌고. 그 검, 함정이었나. 날 선택해! 라고 광고하는 수준이긴 했어. 하지만 시스템에, 아이템 상점에 직접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체인질링이 막아 준 직후기도 하고.
“해파리 뒈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신입이 온 건가.”
“오, 신입 취급해 주는 거야? 고맙네.”
소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다. 젠장. 속지 말자. 겉모습만이야, 안 귀여워.
“용건이나 빨리 말해. 내 동생이 걱정─”
소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내 몸이 기울어졌다. 다리를 툭, 가볍게 채이는 것만으로 나무토막이라도 된 것처럼 힘이 빠졌다. 동시에 내 한쪽 팔과 어깨를 잡고 살며시 바닥에 눕힌다.
단순히 쓰러뜨려서 눕혔다, 라고 설명하기엔 너무 다른 움직임이었다. 내게는 작은 충격 하나 오지 않았다. 다리를 쳤을 때도 살짝 두드리는 수준의 느낌 이상은 들지 않았다. 바닥 또한 분명 단단할 텐데도 침대에 눕는 것보다 더 부드럽게 등이 닿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머릿속이 다 멍해졌다.
“…스킬?”
“기술이긴 하지.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소년이 허리를 약간 굽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미가 다르다면, 마력을 쓰는 그런 스킬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기량, 그런 건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 피죽도 못 얻어먹은 거 같게.”
그가 치렁한 소매를 걷으며 내 가슴을 가볍게 눌러 보았다. 마치 진료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리곤 인상을 확 찌푸렸다.
“마나각인 새긴 놈 누구야? 솜씨가 없으니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 놨잖아.”
…경력 제일 많고 실력도 최고라는 가드가 맡아 준 거였는데. 아무튼 분위기가 어째 묘했다. 새로 온 효도중독자인가 했건만 적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는 듯했다. 뭣도 모르고 물가에서 노는 어린애 보고 혀를 쯧쯧 차는 것 같다.
“돌아 봐.”
“…어?”
“엎드리라고.”
머뭇거리다가 돌아누웠다. 상의가 휙 걷어 올려졌다.
“저기, 동생이 걱정할 거 같은데.”
“걱정 마. 모를 테니. 마나 맥을 여는 건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지 이렇게 한 번에 터놓으면 감당이 되나. 원맥자라 해도 부담될 짓을 해 놓았어.”
“…원맥자요?”
“태생 S급이라고도 하지. 막아 놓아서 그나마 다행이지, 애 몸을 회쳐 놓을 뻔했네. 그대로 놓아뒀으면 오감이 서서히 마비되면서 마나 감각만 극대화돼 결국 미쳐 버리고 말았을 거다.”
무서운 소리였다. 그런 살벌한 부작용이 있었을 줄이야.
“천천히 트이도록 손봐 줄게. 10만 포인트.”
“…예?”
“대가 없이는 못 움직여.”
저 소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깝지는 않았다. 설마 사기 치는 건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눈앞에 10만 포인트를 지불하겠냐는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수락한 직후 따뜻한 기운이 등에 닿았다.
“이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야. 오래 살고 싶다면 최대한 얌전히 웅크리고 있어야겠다만, 그럴 아이였으면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겠지.”
“동생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는데요.”
“원맥자는 마나가 극히 부족한 환경이거나 일부러 생기를 소진하지 않는 한 최소 이백 년은 살아.”
동생 수명이 긴 건 좋다만 내가 자신이 없어졌다. 이백 년은 무린데.
“제가 이백 년쯤 더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몸 관리 잘하면 20년 정도는 더 살겠다.”
“너무 짜네. 백만 포인트 더 드릴게요.”
“지금 상태로 수명을 늘리려면 보다 격 높은 상대에게 종속되는 것뿐이다만. 널 받아줄 만한 사람은 별로 없어.”
“나름 인기 많은데.”
해파리는 나한테 관심 많았다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10년 뒤에도 살아 있으면 도와주마.”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온열마사지라도 받는 것처럼 기분 좋았다. 절로 눈이 스르륵 감겼다.
“다 됐어.”
“…벌써요?”
아쉬워하며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소년이 한쪽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칠흑색 검이 나타났다. 침식하는 군림자의 검.
“자, 내 검이다.”
저 소년의 검이라면.
“…어린 혼돈?”
“이 나이에 어리다는 소리 듣긴 쑥스럽지만.”
내미는 검을 받았다. 매끄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집은 약간 따스했다. 무심코 뽑아 보려는 나를 어린 혼돈이 막았다.
“성질 더러운 녀석이야. 너한텐 위험해.”
“살아 있어요?”
“지금은 잠든 상태지만 잠꼬대 정도는 하거든.”
“신기하네요. 심장을 넣어서 그런 겁니까?”
“통째로 다 들어갔지.”
“네? 설명창에는 뿔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던데요.”
“뿔을 뽑아 기본 틀을 만들고 심장을 꺼냈지. 날개를 자르고 비늘을 벗기고 가죽을 뜯어내어 뼈로 화로를 만들고 기름진 살덩이를 쌓아 불을 피워내어.”
화르륵, 검은 연기와도 같은 불길이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맴돌았다.
“녹아내린 비늘로 검신을 감싸고 두들기고 다시 감싸고. 다섯 수레에 가득 찬 검은 비늘이 넉 자 검신에 남김없이 스며들 때까지. 가죽은 검집으로, 가장 큰 송곳니는 슴베로, 날개와 발톱은 자루로. 마지막에 심장을 부숴 검날에 새겨 넣음으로써 완성되었지. 흑룡 그 자체인 검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검인 듯했다. 그래서 흑룡의 심장을 부활시키면 L급까지 성장한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설마.
“그 흑룡, L급이었습니까?”
“아마도. 잡느라 고생했어. 청동과 흑쇠로 이루어진 산맥에 자리 잡아 제 불길로 금속을 녹여 강을 만들어 삼키며 계속해서 재생해서, 산부터 날려 버려야 했지.”
옛일을 회상하던 어린 혼돈이 다시 바위에 걸터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검에 관련된 건 뭐든지 물어봐. 나는 설명서로 온 거니까.”
“다른 건요?”
“안 돼. 이미 충분히 말했어. 아이템 설명서 범위 밖이야.”
검에 관한 것만 된다 이건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검을 만든 사람, 주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시도는 좋았다만 안 돼.”
“검이 왜 아이템 상점에 들어가게 된 겁니까? 원래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애매한데. 일종의 투자야.”
그밖에 이것저것 검과 억지로 엮어가며 물어봤지만 대부분은 답변을 거부당했다. 어쩔 수 없이 검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흑룡의 심장은 어떻게 부활시킬 수 있습니까.”
“이제야 물어보네. 아이템 상점에 흑룡의 심장 조각이 있을 거다. 그걸 키워.”
“키우라고요?”
“그 마석처럼.”
소년의 손가락이 내 심장 위를 가리켰다.
“앞은 이미 자리가 찼으니 등을 내 검으로 갈라 심장 조각을 넣어.”
“위험한 건 아니죠?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동생보다 오래 살아야 해서.”
“조합한 마석을 성장시키는 것과 비슷해.”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지. 얼른 아이템 상점에서 흑룡의 심장 조각을 구매했다. 단돈 만 포인트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을 나름 공손히 내밀었지만 어린 혼돈은 받지 않았다.
“새 주인에게 맡겨.”
아니 그건 좀……. 유현이가 해줄까. 설득할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머리가 아파온다.
“해주시면 안 돼요?”
“안 돼.”
“그럼 다른 사람은요? S급 여럿 있는데. 같은 태생 S급도 있고.”
“안 돼. 그것도 조건 중 하나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성장 방법을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잘 꼬드겨 보는 수밖에.
“아무튼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꾸벅 머리 숙여 인사해 주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원래 L급쯤 되는 무기를 SS급으로 낮춰 보내준 거나 다름없는 듯한데, 정말 고마운 일이다. 패륜아 놈들도 이렇게 잘해 주면 얼마나 좋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마나각인도 손봐 줬고, 일단은 매우 땡큐다.
붉은 눈이 고개 숙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에휴, 하고 과장된 한숨을 내쉰다.
“처음부터 마나가 풍부한 세계였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하필 그런 곳이어서. 너도 그렇지만 네 동생도 말이다.”
“제 동생도라니, 차이가 큽니까?”
“당연히 크지. 주변 마나가 풍족하다면 원맥자는 가만히만 있어도 열 살 즈음에 S급의 능력치를 갖추고 스무 살쯤엔 SS급으로 성장해. 하지만 너희 세계에는 마나가 희박했으니 평범한 인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을 거다.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셈이지.”
그런, 진짜 손해잖아. 원래라면 유현이가 이미 SS급이었을 거라니, 무척이나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라면 양육자 노릇 하기는 또 힘들었을 것이니.”
어린 혼돈이 훌쩍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나는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음에 또 보자.”
그리고 주위가 확 밝아졌다. 눈을 깜박였다. 내 앞에 유현이가 서 있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형, 괜찮아?”
“어? 어.”
“갑자기 멍하게 서서 말이 없던데, 역시 아직 피곤한 거지?”
“아니, 아!”
군림자의 검! 얼른 손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며 인벤토리를 확인하자 검이 있었다. 다행이다. 얼른 새카만 검을 꺼내어 동생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이것 봐, 유현아.”
“웬 검이야?”
“포인트 상점 나타났다고 했잖아. 방금 샀지. 무려 SS급 검이라고.”
유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뿌듯한 심정으로 얼른 확인해 보라며 검을 내밀었다. 유현이가 검을 받아들었다. 자루를 잡고, 소리도 없이 스르르 뽑아 든다. 검날은 반사광조차 없이 그저 검었다. 그러면서도 그 짙은 어둠이 스스로 빛을 흘리는 듯했다.
아이템 설명창을 확인하지 않고 단순히 눈으로만 보아도 예사 무기가 아니다. 검을 찬찬히 살펴보는 동생의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떠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한참 만에 유현이가 작게, 탄성 같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오싹해.”
“응?”
“SS급 장비는 내게도 있지만 이건 다른 느낌이야. 무거워.”
흑검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유현이의 손끝에서부터 불길이 일었다. 검푸른 불이 검신을 길게 훑어 올라가며, 그 아래로 푸른색 문양이 희미하게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반 바퀴 빙글 돈 검의 끝이 흰 손 위에 내리 놓였다. 검을 양손으로 받쳐 든 채 유현이의 눈길이 다시금 자신의 새 무기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정말, 정말로 좋아.”
가볍게 취한 듯 몽롱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이내 환히 웃는다. 잠깐 긴장했던 나도 얼굴을 활짝 폈다.
“원래 L급 무기였다더라.”
“L급?”
“응. 오래되어서 등급이 떨어진 거래. L급 이하 불에는 녹지도 않고 성장시킬 수도 있어. 지금 스킬 세 개잖아, 성장하면 두 개 더 늘어난다? 원래 L급이니 지금 있는 스킬도 따라 등급이 올라갈지도 몰라.”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L급 무기에 S급, A급 스킬은 어울리지 않으니. 유현이가 감탄 어린 눈으로 나와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 고마워. 정말 고마워.”
“고맙긴, 내가 네 무기 책임진다고 했었잖냐.”
“하지만 형도 그냥 얻은 건 아닐 텐데. …포인트만 쓴 거 확실하지?”
“당연하지! 사억오천만짜리다, 그거. 다른 SS급 검은 이삼억 정도 했는데 제일 비싼 검이라고. 마음에 들어?”
“응, 여태까지 썼던 무기들과는 비교가 안 돼. 언제나 그랬지만 형이 진짜 최고야!”
심장 키워야 한다는 소리는 나중에, 집에 가서 하자. 스킬도 기대된다며 유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최대 길이가 5미터나 된다면 바로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빨리 써 보고 싶어.”
“참아라. 여기서는 절대 안 돼.”
“던전 안에 들어가서 연습해 봐야겠지. 하급 던전이라도 하나 구해서 바로 들어갈까.”
“나도 한번 가야 하니까, 같이 가자.”
신입 만나서 회귀 사실 말할 거라고도 하고 SS급 몬스터들 잡은 보상도 뜯어내야지.
유현이가 몇 번이나 재차 검을 살펴보고 그걸 보며 나도 뿌듯해하는 사이 비행기가 한국에 들어섰다. 곧 착륙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현실에서는 며칠 안 지났지만 내 체감으론 정말 오랜만이다. 집에 가면 하루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어야지, 생각하는데.
“아저씨, 저기 좀 봐요!”
예림이가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예림이가 가리키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게.”
반파된 비행기가 보였다. 그 주변 또한 멀쩡하지 않았다. 몬스터라도 나타난 건가 싶었지만 한국은 분명 빠르게 정리되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저 광경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검게 타 버린 비행기의 일부와 그을린 바닥. 설마.
“성현제인 거 같지?”
어느새 다가온 문현아가 말했다. 흔적을 보면 십중팔구라는 소리에 입안이 절로 메말랐다. …대체 뭘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