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88
386화. 신규 던전 (5)
차랑, 찰그랑-
수백 개의 작은 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밤이 되기엔 이른, 노을 진 하늘 아래 은빛이 퍼져 나간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공포 저항 스킬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오르고 전신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내 귓가로 어린 혼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승달!”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전에 본 고상한 수색자의 사슬의 설명창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초승달의 가장 짙은 달빛으로 벼린 사슬. 금속으로 보이나 본질은 빛이다.]가장 짙은 달빛.
카가가강!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린 혼돈을 향해 쏟아져 내린 달빛이, 은빛 사슬의 형태로 바뀌었다. 휘둘러진 대검의 궤도에 사슬이 닿고, 부서지고, 녹아내린다. 하지만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끊임없이 몰아치던 달빛이 기어이 대검의 틈을 파고들었다.
“어르신!”
콰득. 그리고 이어서 살과 뼈가 꿰뚫리는 소리가 내 귀를 후려쳤다. 새로운 피 냄새가 이미 축축해진 공기에 새롭게 뒤섞인다. 어린 혼돈이 피를 뱉어 냈다.
“이건 여기 있어선, 쿨럭, 안 되는 힘이야.”
“…예?”
“얌전히 기다려라, 첫째야.”
그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붉은 눈이 달빛이 일렁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당장 널 해칠 생각은 없어 보이니, 허튼짓 말고 기다려.”
“그, 네…….”
차그랑, 사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흘러넘친 핏자국만이 남았다. 머릿속이 아직 둔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성현제 씨……?”
수백 가닥의 달빛이었다. 일부는 사슬로 변했고, 일부는 빛 줄기 그대로였다. 그것들이 성현제의 몸에 닿아 있었다.
마치, 꼭두각시의 실처럼.
“수색자의, 사슬이…….”
성현제가 발을 내디뎠다. 그의 걸음을 따라 달빛이 움직였다. 거미줄 한가운데 걸린 나비처럼도 보였다.
쉽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초승달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문이 머릿속 가득 맴돌았지만 대뜸 물어보기가 힘들었다.
흔들리는 달빛에 얽매인 채 성현제가 내 앞에 다다랐다. 은빛 사슬이 뻗어와 내 몸을 휘감았다. 천장에 매달린 고깃덩이처럼 가볍게 덜렁 들어 올린다.
“손님 대접이 소홀할 것을 미리 사과하지.”
성현제가 건물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 갔다.
“내부는 엉망이고, 정원은 그나마 괜찮으려나.”
금속성 소리와 함께 사슬이 그의 발아래를 받쳐 주었다. 계단을 오르듯 느긋이 옥상정원을 향해 걸어간다.
옥상의 정원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양옆의 높은 빌딩이 무너져 내린 여파로 여기저기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건물 안보다는 나았다. 운 좋게 잔해를 피해 멀쩡한 벤치며 테이블도 보였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나지 않았지만 여기도 겨울은 겨울인지 내가 본 정원보다 황량한 느낌이었다. 꽃은 지고 잔디도 메말랐다.
테이블 옆에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앉은 성현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신호탄 같은 건 없나.”
“없습니다. 애초에 던전에도 갑자기 들어오게 된 거거든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내가 신호탄을 왜 써 주냐. 섣불리 일행들 불러모았다간 전멸이나 당할 텐데. 어린 혼돈과 신입을 믿고 시간을 끄는 게 최선이다.
“그러는 그쪽은 궁금한 거 없습니까? 그쪽 기억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
“내게 궁금한 것이 훨씬 더 많은 표정인데.”
“그야 뭐.”
아주 많다. 뭐부터 물어야 할지 순서를 세우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대뜸 묻는다고 해서 쉽게 대답해 줄까. 직구보다는 옆으로 슬슬 돌아가는 편이 낫겠지.
“제일 궁금한 거라면 언제나 그렇듯 제 동생이죠. 전 회귀 전에는, 가깝게 지내지 못했으니까요.”
중요도 없는 옆으로 돌아간 질문이라고 해도, 사실 제일 묻고 싶었다. 상대가 성현제가 아닌 누구라도 말이다. 성현제가 한쪽 다리를 느슨하게 다른 쪽 다리 위에 얹었다. 곧잘 취하던 자세다. 당사자니 당연하겠지만 정말 똑같다.
“해연 길드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2년, 거의 3년쯤 전이라 도움은 별로 못 되겠군. 소영이가 3년 전부터 길드장 대리를 맡았으니 한유현에 대해서는 그 녀석이 더 잘 알 거야. 다만.”
성현제의 시선이 아래를, 건물의 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닥에 잠깐 닿았다.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라.”
…입안이 조금 메말랐다. 상상되는 광경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진짜가 아니라 몬스터다. 던전이 만들어 낸 것뿐이지만, 가슴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 3년이라면, 그럼 송 실장님이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을 듯한데…….”
“1년 반 조금. 아직 2년이 못 되었지.”
실종된 후의 성현제구나. 회귀 전의 정보가 남아 있었으니 죽진 않았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멀쩡해 보였다. 상태가 나빠서 내내 잠들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뒤로 국내엔 전혀 안 들어온 겁니까? 해외에서도 행방이 묘연했잖아요. 모습을 바꾸고 다닌 거예요? 그동안 뭘, 했습니까.”
“알프스에서 양을 키웠어.”
“…농담 마시고요.”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성현제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엽서도 보냈었는데.”
여, 엽서? 그런 게 온 적 있었던가.
“기억 못 하는 건가.”
“아니, 우편물은 제대로 확인 안 해서요. 공과금이야 자동이체 쓰고 연락도 폰으로 받고 해서… 뭐냐, 이상한 게 대부분이라. 그래도 양이라니 말이 됩니까.”
“보다시피 이 꼴이라 한국에 들어갈 순 없었지. 초승달이 깨어나면 나를 회수하려 들었을 테니까.”
성현제가 한쪽 팔을 들어 보였다. 수 가닥의 달빛이 그의 팔을 에워싸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적응 못 할 듯했다. 그냥 보기에는 예뻐 보일 수도 있겠다만, 정말 기분 나쁘다.
“…어떻게 된 겁니까. 1년 반 전에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송태원이 사망하고 초승달이 잠든 것일까. 팔을 내린 성현제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금안이 가느스름하게 뜬 달처럼 나를 담았다.
“송 실장님은 그렇다 쳐도, 저 때문이라는 건 또 뭐고요. 최소한 그건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네 탓이란 소리 듣는 건 억울하다고요.”
“상위의 존재가 하위의 존재를 아끼는 건 드문 일이 아니야.”
느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유현이 실은 제 형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리에트도 동생을 나름 아꼈으니까.”
리에트 나름은 그럴듯하긴 했지만 노아 씨가 들으면 복장 터질 소리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여전히 확신은 없었어. 해연길드가 얼마나 오래 버텨 줄지.”
“댁처럼 오래 못 가고 훌쩍 떠나 버릴까 봐서요?”
“문현아는 거절했고, 소영이를 키워 볼까도 했었는데 S급 용종을 얻기란 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더군.”
“지금은 소영 씨에게 기승수가 있습니다. 코메트라고, 가시날개 암룡이에요.”
소영이가 무척이나 기뻐했겠다며 성현제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더욱 떨떠름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히 보살피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한유진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면접장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나야 별 볼 일 없었을 텐데. 정확히 언제쯤이었을까.
“어… 땠는데요.”
“쓸 만한 F급 헌터.”
“쓸 만, 했어요?”
“하급 헌터는 2년 이상 꾸준히 던전을 공략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그것도 소속 길드도, 배경도 하나 없이 혼자 힘으로라면 더더욱 말이야.”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보통은 자잘한 길드라도 들어가니까.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은, 모르겠다.
“아, 그래 봤자 세성 같은 거대 길드는 거들떠도 안 보는데요.”
“고질적인 문제지.”
댁 길듭니다만 남 말 하듯 하네.
“그리고 한유진은.”
내 목울대가 다시금 오르내렸다.
“한유현을 사랑하고 있었지. 무척이나.”
“…욕했을 텐데.”
“남이 동의하면 화내는 욕 말인가.”
“그야, 그렇잖아요. 당한 건 난데 왜 지들이 남의 동생을 욕해.”
“정말로 좋아하고 소중하다면 타인이 욕하는 건 맞는 말이라도 화나기 마련이긴 하지.”
아니 뭐, 딱히 맞는 말도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아무튼 탓해도 내가 탓할 일이다. 이것 때문에 나랑 친한 사람들한테 등짝 맞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말이야.
“그게 신기했어. 헌터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닌, 구를 만큼 구른 F급이 여전히 S급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가 키운 제 동생이니까요.”
“부모도 꺼려 했을 동생을 말인가.”
“뭐요, 귀여웠거든요! 애가 진짜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아까 그건 급해서 나온 헛소리고, 제 동생은 진짜 천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못 봤으면 말을 말라지! 길 가다 모델 해 볼 생각 없냐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그런 거 힘들다고 해서 거절했지만. 하나 정도는 찍어 둘 걸 그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아쉬웠다. 사진이나 어쩌면 영상으로 남았을 텐데.
“어릴 땐 뭘 몰랐다고 해도-”
“알았다니까! 내 동생 세상에서 제일 착한 거!”
성현제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보다 더 심해졌군.”
“난 원래 이랬는데요.”
“중증이야.”
댁이 뭘 안다고. 그야, 세상에서 제일까지는, 음, 성현제 착하단 소리까지 했으니 이 정도야 양호하다. 거기에 비하면 세상에서 제일 착한 거 맞지 뭐.
“알 거 다 아는 토끼가 늑대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하물며 완전히 성장한 늑대를 감싸고 보호하려고까지 드는 건,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야.”
지금 나더러 미쳤다고 돌려 욕하는 건가.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들여 확인해 보았지. 덕분에 송태원이 마음고생했지만.”
“송 실장님이요?”
“그때쯤에 국내에서의 내 행적은 상세히 알려 주기로 약속을 했었거든. 국외도 송태원이 끌려 나올 정도라면 미리 말해 주기로 했고.”
“…대체 무슨 엄청난 사고를 친 거야.”
그런 약속까지 했다면 송 실장님 웬만큼 고생한 게 아니지 싶은데. 뭔 짓 했냐, 성현제.
“하필 상대가 비각성자와 큰 차이 없는 F급 헌터니 말이야. 셋이 같이 만난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성현제의 얼굴은 꽤 즐거워 보였다.
“재미있었지. 의외로. 새롭기도 했고.”
새롭다. 그 말에 퍼뜩 떠올랐다. 과부화. 가득 차 버린 채로 스스로를 버티기 힘들어하던 성현제가.
그래서였구나. 송태원도 새롭다고 했었다. 그와 오래 엮이며 점점 차오르다가, 내가 마지막 물방울이 되었을 것이다. 성현제의 길고 긴 인생 속에서도 태생 S급을 사랑한 F급과 어울릴 일은 당연히 없었겠지.
“그래서 던전에 들어갔던 겁니까. 송 실장님의 약탈을 사용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그 부분부터는 한유진의 이야기가 아니야.”
성현제가 입을 다물었다. 젠장, 그럼 뭐. 송 실장님이라도 모셔 와야 털어 놓겠다는 건가. 그전에 현재의 성현제가 오면, 그, 처리할 거고?
“초승달이나 다른 초월자들에 대한 거라도 좋으니 말해 주면 안 됩니까? 재밌었다면서요. 그때의 정을 봐서라도 좀 말해 주죠.”
“문제는 나이니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성현제의 말이 뚝 끊겼다. 그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동시에 나도 느꼈다.
“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내 뺨이 순식간에 젖어 들고, 속이 뒤틀리듯 아파 왔다.
“무, 무슨.”
몹시도 슬프면서 기쁘기도 했다. 이건, 대체.
“…유현아?”
* * *
이상하게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한유현은 곧장 눈을 뜨지 못했다. 주위에 무언가 기웃거리는 기척이 느껴졌음에도 굳이 일어나서 확인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 문제 없이…….
‘…형!’
한발 늦게, 마지막으로 본 한유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유현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후다닥 구석으로 도망쳤다.
“형!”
도깨비가, 윤윤이 한유진을 밀쳐 내고, 그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어 사방이 짙은 연기로 뒤덮이는 그 순간, 검붉은 연기 줄기가 한유진의 다리를 꿰뚫었다. 그것이 한유현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한유현은 급히 자신의 손등을 확인했다. 상처는 없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한유진은 무사했다. 그럼, 여긴.
‘어디지.’
실내였다. 원룸인지 좁은 현관과 부엌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유현의 기억 속에는 없는 곳이었다. 조금 더 고개를 돌리자.
“……!”
한유진이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엉거주춤 주저앉은 채로 한유현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는 한유진이. 한유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형과 같은 모습이지만 조금 달랐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가짜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스템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신규 던전, ‘크리스마스의 악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