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06
504화 씨앗 (2)
“그쪽한테 묻고 싶은 게, 갈수록 더 많아지는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현재 나는 위험하지 않았다. 은혜는 아직 잘 숨겨져 있으며 결이도 있고 무해의 왕의 서랍도 있었다. 여차하면 쉽게 몸을 피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은 오히려, 송 실장님이 걱정이었다.
황림이 꺼내든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 안은 흙처럼 보이는 가루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저게 뭐기에 송 실장님을 무력하게 만든 것일까. 성현제와 싸웠을 때도 저 정도로 힘없이 무릎 꿇지는 않았었다.
두 손도 이미 바닥을 짚고 있었다. 두꺼운 팔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옷 너머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목덜미에 땀이 배고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든지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꽉 다물린 입매가 나를 부르고 싶은지 조금 움직거렸지만, 숨소리만 미약하게 샐 뿐이었다.
…차라리 나 혼자 올걸. 내가 제일 안전한데.
“송 실장님은, 보내 드리면 안 됩니까.”
내 말에 송태원의 얼굴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끼이익, 손가락 끝이 바닥을 긁는다. 힘 또한 약해졌는지 원래라면 깊게 파헤쳐졌을 바닥에 얕은 선만 그어졌다.
“한유, 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니까 괜찮단 소린 마시고요.”
내 목소리도 약하게 떨렸다. 젠장, 공포 저항 없이 친하지도 않는 S급 헌터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건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심지어 송 실장님 또한 S급이며, 두 S급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말이야, 한기라도 든 듯 전신이 연신 오싹거렸다. 던전을, 상급 헌터들을 겪어 본 적 없는 일반인이라면 기절이라도 했을 분위기다.
“저야 죽을 일은 절대 없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내가 송 실장님에게 서랍에 대해 말해 줬었던가. 잘 기억이 안 났다.
“안, 됩니… 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송태원이 다시 바닥을 긁었다. 손등에, 손목에 힘줄이 잔뜩 돋아났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었는지 송태원의 입가에 피가 조금 비쳤다.
“그만하세요.”
“저는…….”
“송 실장님!”
“나랑 이야기하쟀더니 둘이서만 재미 보네.”
황림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그쪽도 떠들어.”
송 실장님을 보내 달라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리 없었다. 일단 송 실장님이 순순히 물러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송 실장님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함께 서랍 속으로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유현이와 예림이는 서랍에 대해 알고 있으니 내 행방을 짐작할 수 있겠지. 아니면 아직 유현이가 가지고 있는 연락용 계약서를 써도 된다.
“답답해 죽겠으니까, 팔 좀, 풀고.”
“진이 재주가 너무 많아서 안 되겠는데.”
“송 실장님 두고 도망 안 가! 아니면, 차라리 나를 묶어.”
결이 도움을 받는다 해도 S급 이상은 힘들었다. 게다가 황림은 덩치만 보아도 힘이 보통이 아닐 듯했다. S급 중에서도 윗줄이겠지. 하지만 따로 묶이는 거라면 스탯 F급 상대니 기껏해야 중급 아이템, 혹은 평범한 도구를 쓸 것이다. 묶인 채라면 송 실장님 곁으로 다가가는 것도 막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고.
“묶이는 거 좋아했구나. 진이가 원한다면야.”
“그럴 리가 있겠냐!”
“그럼 계속 안겨 있을래?”
“…좋아한다고 치자.”
시발, 그냥 묶어라. 얼른. 인벤토리를 쓰지 못하게 하려는 듯 황림은 내 팔을 뒤로 돌려 내 손으로 각각 반대쪽 팔뚝을 붙잡게끔 했다. 그 상태로 손과 팔뚝을 감아 묶었다.
“새끼용은 어쩔까. 귀엽게 생겼네.”
결이가 내게 딱 달라붙은 채 으르렁거렸다. 말 못 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테고, 요정용은 물리적인 피해도 입지 않았다.
“F급이야. 내버려 둬.”
“걱정하지 마. 나도 용은 좋아하거든.”
내밀어지는 황림의 손을 결이가 콱 물었다. 황림이 간지럽다는 듯 웃었다.
“도망치려 들면 잡아야겠지만. 얘도 같이 묶어 줄까?”
“나 두곤 절대 도망 안 갈 테니 걱정 마라.”
“착하네.”
황림이 손가락으로 피하려드는 결이의 머리를 억지로 쓰다듬었다. 결이가 불쾌해하며 만져진 머리를 내 옷자락에 마구 부볐다. 그래도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이제 최대한 자연스럽게 송 실장님에게 접촉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전에.
“그 병은 뭐지?”
S급 헌터를 쉽게 제압하는 아이템은 너무 위험했다. 내 물음에 황림이 유리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향의 흙이지.”
“…뭐?”
“아쉽게도 송태원 한정이고.”
황림 놈이 줄이 좀 남네, 하며 내 발목까지 둘둘 감아 묶었다. 이 상태면 바닥을 기어가야 하나.
“월식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와 연관이 있다고 할까.”
“…근원의 면역체계, 라고 했었는데.”
“그럼 백신 같은 거라고 해두지.”
백신 소리를 듣자 곧장 하얀새가 떠올랐다. 근원을 돕기 위해 백신을 놓아 줄 사람이라면 그녀밖에 없지 않을까. 동시에 속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너 대체, 언제부터 초월자와 관계가 있었던 거지? 설마 처음부터…….”
“아니야, 진아. 중국에서는 그냥 우리 집안일 한 거였지. 지금은 거래처가 늘어났다, 라고 할까. 이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 들려는 초월자들은 많아. 핫플레이스라고. 단지 그럴 능력이 되는 존재가 드물 뿐이지.”
…채터박스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함부로 개입 못 하는 걸로 협상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중립층도 있지 싶었다.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그냥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기웃거리는 이들이.
황림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 치워라 개새끼야.
“그래서 내 첫 번째 목적은 송태원의 납치야.”
“…뭐?”
잠깐만, 뭐라고? 납치는 그렇다 쳐도, 송 실장님을?
“내가 아니라?”
무심코 튀어나온 내 말에 황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봐왔다.
“납치되고 싶었던 거야, 진아?”
“그게─”
“역시 그동안의 납치는 취미활동이었던 건가. 좀 의심가기는 했어. 우리 진이가 만만한 상대는 절대 아닌데 말이지.”
“아니거든!”
취미는 뭔 취미야! 내가 게임 속의 공주님이라도 되냐! 그 공주님들도 취미라기 보단 직업의 일환이고, 심지어 완전 구식이다. 단지 F급이 아닌 S급, 송 실장님이 납치의 대상이 된다는 게,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무심코 돌아보자 송 실장님의 표정에 안도감이 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왜 안심을 하시냐고! 환장하겠네.
“진이도 같이 갈래? 그리고 가능하다면 성현제도.”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아 네, 잘해 보세요 하고 무시했겠지만 지금의 성현제는 불안했다. 젠장, 내가 왜 그 인간을 혼자 내버려 둔 거지? 에블린이나 하다못해 소영 씨에게라도 알렸어야 했는데. 아니면 현아 씨도 있고.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너무 안이했다.
지금도 납치라는 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상도 가지 않는 상대였지만.
“…욕심이 너무 과하잖아. 그러다 배 터집니다.”
최대한 비웃는 척, 침착하게 말했다. 황림 혼자라면 아직 괜찮겠지만 혹 다른 협력자가 있다면. 설마 이미 납치된 건 아니겠지.
“감당이나 되시겠어?”
“그러니까 말이야.”
황림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에게 기대고 있던 내 몸이 자연스럽게 소파 위로 쓰러졌다.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
“야!”
꿈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황림이 송태원 앞으로 다가가며 몸을 굽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송태원의 턱 아래를 잡고 얼굴을 들게 해 관찰하듯 살핀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뭐가 어떻게 다른지.”
“…한유진, 씨는, 풀어…주십, 시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뻔했다. 나만 무사히 보내 준다면 순순히 따라가겠다거나, 뭐 그런 소리겠지.
‘…환장하겠네.’
이래서야 송 실장님만 데리고 서랍 속으로 튈 수도 없었다. 다음 타깃은 성현제였으니. 지금쯤 회복했다면 다행인데, 만약 또 쓰러졌다면. 내가 진짜 왜 내버려 뒀었지. 사이 나쁜 척이고 자시고 옆에 끼고 다녔어야 했다. 하지만 설마, 그 인간을 납치하려 드는 인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야! 아직 대화 안 끝났어!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자며!”
“일만 끝나면 나머지 시간은 다 자기 거야, 내 사랑~”
절로 이가 부득 갈렸다. 내가 내 눈앞에서 송 실장님이 잡혀가는 꼴을 두고만 볼 거 같냐. 고개를 돌려 결이를 바라보았다. 결이에게 선생님 스킬을 쓰고, 결이의 스킬이 내게 적용된 순간 줄을 끊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지금부터 네놈 시간은 전부 내 거다. 송태원은 물론, 황림까지 포함해서 무해의 왕의 서랍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주위 풍경이 뒤바뀌고 첨벙, 물소리가 크게 울렸다.
“진아?”
당황한 황림의 주위로 물이 소용돌이쳤다. 녀석을 휘감은 물이 수면 위로 솟구치고, 그대로 단단히 얼어붙는다. 송 실장님을 데리고 뭍으로 올라서며 황림을 쳐다보았다. 꼴좋다.
“괜찮으세요?”
“…예. 여긴.”
“서랍 속, 명우 대장간 비슷한 곳이요. 야, 황림!”
오래 버틸 순 없었기에 결이 스킬을 바로 해제했다. 황림이 팔에, 몸 전체에 힘을 주자 얼음이 으지직 부서져 나간다. 그대로 다시 첨벙, 놈이 물에 빠졌다.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황림이 우리를 바라봐왔다.
“역시 만만찮다니까. 이거 곤란하게 되었네, 흙은 한 병뿐인데.”
황림의 말대로 송태원은 이내 기력을 되찾았다.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황림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송태원의 손에서 와이어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피잉,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와이어가 수면을 사납게 두드린다. 와이어에 휘감기기 직전, 물속으로 잠수한 황림이 순식간에 멀어진 채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대화로 하죠, 공무원님!”
황림이 머리를 내밀자마자 송태원이 팔을 휘둘러 와이어를 회수함과 함께 물가의 자갈을 발로 걷어찼다. 황림이 또다시 물속으로 숨어들고 촤아, 자갈이 후려친 물이 높게 튀어 올랐다.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치네.
송 실장님에게는 물 위에서, 혹은 속에서 싸울 만한 스킬이나 장비가 없었다. 이래서야 너무 오래 시간을 끌게 될 텐데.
‘저걸 어떻… 아!’
그게 있었지!
“송 실장님, 잠시만 저놈 잡아 두고 계세요!”
송 실장님에게 소리치곤 얼른 저택으로 향했다. 여전히 동생과 똑같은 모습의 71번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지하실의 아이템들 말이야, 여기서 사용하는 건 상관없는 거 맞지? 그러니까 스탯 올려 주는 그런 거 말고, 단순 무기나 이곳에서 소모되고 끝나는 것들.”
“네, 사용 가능합니다.”
“좋았어!”
얼른 지하실로 내려갔다. 나도 명우처럼 공간이동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템빨을 보여 주마, 잡상인 놈!”
가진 건 내가 더 많다 이거야. 장식장을 이리저리 뒤지며 쓸 만하다 싶은 것을 챙겨 들었다. 차분히 확인할 시간이 없어 얼마 챙기진 못했지만 이걸로도 충분할 터였다. 다시 저택 밖으로 나가자.
촤아아─!
물이 높게 치솟는 것이 보였다. 황림은 여전히 물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아무래도 뭍에서 송 실장님을 당해 낼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송 실장님, 이거요!”
송태원에게 팔찌를 던졌다.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주는 팔찝니다! 여기 나가기 전에 반납하셔야 하니 맘 편히 쓰세요!”
송 실장님 상대론 슬쩍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지. 선물해 준 것도 몰래 놓고 나가실 분이니까.
“그리고 이건 S급 포박 아이템이고요, 이건 수중행동 반지, 이건 속도증가 옵션, 이건 SS급 구속구고요, 이건 물을 얼리는 아이템, 이건 냉기 저항, 또 이건─”
“진아아!”
황림이 저 멀리서 기가 막혀 하며 외쳤다.
“너무하잖아!”
“시끄러! 자, 전부 여기서만 쓸 수 있는 아이템이니 사양 말고 쓰세요!”
“…감사합니다.”
송 실장님도 조금 당황하며 아이템을 받아 착용했다. 그리곤 그대로 물 위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드는 송태원의 모습에 황림이 피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쩌저저적─
물이 얼어붙었다. 황림이 얼음을 깨부수고 위로 올라오는 순간 이번에는 포박 아이템이 던져졌다. 그래도 S급이라고 재빠르게 피하긴 했지만 순간가속 아이템을 쓴 송태원이 순식간에 접근해 발을 휘두른다.
콰아앙!
얼음이 산산조각 나고 그 아래, 주위의 물도 모조리 폭탄 맞은 듯 솟아올랐다. 발꿈치가 아슬아슬하게 스쳤을 뿐이건만 황림의 셔츠가 너덜너덜해졌다. 연이어 쾅! 두 사람의 주먹과 팔이 격돌하고 황림이 뒤로 밀려났다.
변변한 장비 없이도 S급 헌터들을 상대하던 송태원이다. 그런데 세상 그 어떤 S급 부럽지 않게 장비를 갖춘 지금이야, 뭐. 길게 말할 필요 있을까.
결국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손목에 구속구를 찬 황림이 송태원의 손에 목이 잡힌 채 질질 끌려나왔다.
“안녕, 진아. 나 이제 시간 많은데.”
방긋 웃으며 말하는 황림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이고, 내 발아.
“잘됐네, 나도 물어볼 거 엄청 많으니.”
우선 박하율 정체부터 캐내 볼까. 그놈 때문에 벌써 몇 번째 생고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