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28
626화 패륜아 모임
신입은 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대부분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부드러운 고무빗으로 머리카락과 귀를 쓸어내리고 작고 뾰족한 송곳니의 반짝임을 점검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근원은 모두 다섯 개였다. 초월자들의 지각이 닿는 한에는 그러했다. 그중 첫 번째 근원은 어린 혼돈이 홀로 맞서고 있었다. 첫 번째 근원의 세계들 역시 시스템 아래 놓여 있으나 혼돈 외의 초월자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남은 네 개의 근원에 속한 세계들은 여러 초월자들이 시스템을 통해 관리하고 있었다. 그 초월자들, 패륜아에 속하는 자들이 몇이나 되며 어떠한 존재들인지 신입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사라진 이들도, 지쳐 잠들어 버린 이들도, 교류를 완전히 끊어 버린 이들도 있었다. 다수의 초월자들이 낡고 낡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신입이 속한 다섯 번째 근원의 관리자들도 활동 중인 이들은 고작 여덟 명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셋은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신입 또한 아주 가끔 마주치곤 하였다.
그런 상황이니 속한 지역이 다른 패륜아들은 더더욱 만나기 힘들었다. 유령처럼 떠돌기 좋아하는 특이한 초월자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거나 연락해 오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괜찮을 거야.”
그랬는데 벌써 세 번째 모임이 마련되었다. 어린 혼돈이 엎어 버렸던 첫 번째에 이어 채터박스 주도하의 두 번째 그리고 이번 세 번째는 패륜아들만 참석하는 모임이었다.
신입은 긴장 어린 숨을 들이켜곤 준비된 채널에 접속했다. 강력한 존재들이 한자리에 다수 모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티가 나게 된다. 그렇기에 본체가 아닌 정신적인 분신을 보냈다. 하얀 배구공이 통, 푸른색 창을 통해 백색의 공간에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물방울이 찰랑찰랑 공중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신입: 안녕하세요!
배구공 머리 위로 글자가 떴다. 그 인사말에 붉게 일렁이는 빛 무리가 반응했다.
석양: 안녕, 네가 신입이구나.
고등어: 역시 젊은 애는 다르네. 예의라는 것도 알고.
흑거미: 한 삼천 년만 더 지나면 인사 같은 건 자연히 생략하게 되지.
물방울: 신입도 어린 건 아니야. 그런데도 아직 어린 티가 나더라니까.
볼마우스: 그럼 더 좋죠. 육신은 불로지만 정신은 그러질 못하니. 늙고 늙으면 끝은 잠드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석양: 깨어나지도 않고. 나름 시스템 에너지원으로는 쓸 수 있지만.
실타래: 시스템 유지를 위한 마력이야 넘쳐납니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 유지보수를 위한 인력이지요. 시스템 관리자는 만성 인력 부족입니다.
고등어가 동의하며 지느러미를 쳤다. 그사이 하나둘 참가자가 늘어나 스물을 약간 웃돌았다. 전체 수에 비하면 일부였지만 활발히 활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모인 셈이었다.
산그림자: 전체 수는 우리가 분명 많은데, 실제 활동 인원은 효도 중독자와 중립 쪽이 더 많은 것 같다니까.
사슴: 그쪽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 우리야 전투계는 반백수니까!
큰뱀: 맞아, 시스템을 다룰 줄 모르니 평소엔 잡일 외엔 할 게 없어.
실타래: 배우십시오. 각성자 관리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슴: 그런 거 배우면 전투 능력이 떨어져.
독수리: 언제 또 대판 싸우게 될지 모르니까 칼을 갈아 둬야지.
실타래가 점잖게 욕을 했다. 신입은 속으로 실타래를 응원했다. 모인 이들은 시스템 관리자와 관리자급은 아니더라도 시스템을 다룰 수 있는 자들과 일부 전투계였다. 제작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작자들은 자신의 제작실에서 잘 나오지 않기에 평소에도 보기 힘들었다.
빗자루: 그래서 왜 모이자고 한 건가요? 채터박스가 소멸하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석양: 한 세계에서 초월자 셋이 소멸한 건 처음이지.
새벽꽃: 디아르마는 물방울이 도와줬고 채터박스는 자업자득에 가깝지만 특이 케이스긴 해.
물방울: 해당 세계에서는 새로운 초월자가 최소 두 명이 태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도 하나는 근원을 리셋 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시스템 관리자의 재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지요.
근원에게 일정 이상의 충격을 주어 그간 삼킨 세상을 뱉어 내게 한다. 이 리셋은 초월자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투계들이 자칭 백수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과거 근원을 리셋시킴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그에 더해 시스템 관리자는 몇 없는 귀한 재능이었다. 시스템을 다루는 초월자는 여럿이었지만 관리자라 칭할 만한 초월자는 현재로선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흑거미: 그 동네 완전 알짜배기네.
실타래: 드래곤로드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봤습니다. 신입 씨가 관리 중이라고 했었지요.
신입: 네.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이미 시스템을 일부나마 다루고 있어요.
실타래: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신입이 자기가 칭찬을 받은 양 웃으며 으쓱거렸다.
이끼: 다른 하나는 누구지. 태생 S급 다섯 중 하나인가.
새벽꽃: 당연히 그렇겠지. 채터박스 방송 조금 봤는데 그 반짝거리는 애 같았어. 사슬 쓰는.
누구냐는 물음에 물방울이 조용히 흔들렸다. 대신 나무가 대답했다.
나무: 밝힐 수는 없어. 우리 중 전향자는 언제든지 나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거의 확실해. 또한 다른 초월자들이 더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이야.
물방울: 내가 힘을 전해 준 아이도 있지.
빗자루: 그 애예요?
나무: 아무튼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저 세계에 관여할 다음번 효도 중독자 때문이야. 모두가 동의한다면 협상을 시도해 보려고 해.
물방울: 지금 저 세계 각성자들은 충분히 성장했어. 효도 중독자들이 더는 관여하지 않고 버림 패로 쓰려 할 만큼.
분명 무언가 신기한 존재가 있고 흥미로운 세계였지만 초월자가 셋이나 소멸한 땅이다. 그에 더해 근원이 삼키게끔 만들기도 힘들어졌다. 그러니 효도중독자들이 일찌감치 손을 떼고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었다.
물방울: 계속 관여한다더라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진 않겠지. 하지만 저 세계의 아이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위협이 더 필요해.
실타래: 던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신입: 주요 각성자들의 성장 속도에 비해 느리게 강화될 것으로 추측돼요.
물방울: 하지만 너무 호전적인 초월자도 위험해. 싹이 나무로 자라나기 전에 짓밟힐 수가 있으니까.
나무: 그래서 채터박스와 비슷한 방법을 효도 중독자 측에 제안해 보려고 해. 목숨은 유지한 채로 위협만 가하는 식의. 원만한 합의를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도 무언가 내놓아야 하겠지.
석양: 그럼 수상쩍다고 생각할 텐데?
물방울: 핑계를 잘 대야지. 요긴한 칩이 최소 둘이야.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워.
이런저런 의견들이 오갔다. 약간의 부딪침은 있었지만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거북이: 오랜만의 신입이겠네. 이번 신입들은 자기 세계를 삼키진 않으려나.
독수리: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보다 먼저 멸망하잖아. 근원이 삼키지 않아도 종족과 행성의 수명은 존재하니까.
산그림자: 강제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게 중요한 거긴 하지만. 결국 반복 작업이지.
볼마우스: 우리도 가만 보면 스케일 큰 사축이죠. 평범한 일상이 반복될 뿐인.
빗자루: 사장은 없지만 덕분에 복지도 없잖아요. 그럼 자영업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시스템 관리는 사무직 노릇 맞지만.
신입은 선배들의 대화를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그 대화 속에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에게 멸망과 탄생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요, 단순한 일일 뿐이었다. 어쩌면 특별한 사명감을 지니는 것보다는 일상적으로 대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대상이 지적이며 독립적인 생명체들이 아니었다면.
오랜만의 대화들이 잠시 이어지다가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나갔다. 사슴과 나무 또한 밖으로 나가고 물방울과 신입만이 남았다. 신입이 시스템을 움직여 채널을 닫았다. 하얗던 빛이 어둡게 꺼져 가고 물방울이 은은한 푸르름을 머금고 일렁였다.
물방울: 준비는 아직이니?
신입: 어… 조금 남았어요. 곧 될 거예요.
신입은 분신과 연결된 감정 반응을 최소로 줄인 채 말했다. 배구공에 그려진 표정은 방긋 웃음을 띤 채 변하지 않았다.
물방울: 늦어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다행히 허니가 전보다 성장을 했으니까. 루가 폐야의 힘을 받아들이고도 수명이 줄지 않았다니, 정말 잘됐어.
한유진이 수용할 수 있는 힘의 용량이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물방울: 어쩌면 단순한 리셋 이상의 일이 가능할지도 몰라.
신입: 네에, 허니는 대단하죠.
물방울: 다음번에 허니를 만날 땐 계약서를 건네줘. 단순하게 필요할 때 도움을 주겠다는 정도의 내용으로.
밖으로 나가려던 물방울이 멈칫 신입을 돌아보았다.
물방울: 초승달이 완전히 깨어났다더라.
신입: 그래요?
물방울: 반갑지 않아? 넌 초승달을 좋아했잖아.
신입: 어릴 때 일이죠.
여전히 어리지 않냐면서 물방울이 웃었다. 신입 또한 마주 웃었다. 그는 한때 초승달을 좋아했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외롭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초월자의 자리로 이끌어 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초승달은 모든 이에게 공평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대단하다 생각되었으나 이내 다시 외로워졌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결국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유진에게 있어 신입은.
‘허니는 나를, 다른 초월자들보다는 더 좋아하는 거겠지?’
어린 혼돈보다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신입은 분신을 회수했다. 자신의 귀를 손으로 조금 잡아당기다가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클로스 썰매.
“…초승달에 대해선 결국 말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 밖의 한유진에 대한 정보들도. 목숨에 문제없다는 것 외엔 알리지 않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가만히 있기는 싫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신입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 무언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해 왔을 뿐이었다.
신입은 다시 귀를 잡아당기며 시스템을 열었다.
* * *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푹 자라고 말해 왔지만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눈을 좀 붙인 덕인지 날이 밝아 올 즈음에는 머릿속이 훨씬 맑아졌다.
‘답 없지, 정말로.’
근데 뭐 언제는 있었나. 매번 나는 이랬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그래서 좀 더 힘든 것뿐이다. 내가 험한 길로 멀리 돌아가는 결정을 내린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따스하게 이해해 줄 사람들이라서 더더욱.
얼음 천장 너머로 스며드는 새벽빛을 올려다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초승달은 성현제의 자아를 제거하고 그를 새로운 신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회귀 전과 오늘처럼 직접 손을 뻗어 온 것은 송태원, 월식의 존재 때문이었다. 성현제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위기가 아니라면 초승달은 섣불리 움직이기보단 인내심 깊게 기다릴 가능성이 높았다. 긴긴 세월 차곡차곡 한 인간을 쌓아 온 것처럼.
‘하지만 성현제가 그녀를 벗어날 확실한 방법을 찾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방해하겠지.’
회귀 전에 시스템의 규칙을 무시하고 뛰어들었던 것처럼. 심지어 그러고도 잠깐 잠들었을 뿐 힘을 잃거나 했다는 소리는 없었다. 루가 폐야나 채터박스보다 초승달의 격이 더 높은 것이겠지. 여차하면 우리 세계를 아예 부숴서라도 작은 달을 무사히 돌려받으려 할 것이다.
‘어렵구만.’
그냥 자기 인생 살겠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어렵냐. 나도 그렇고 성현제도 그렇고 어렵다, 어려워. 내가 가란다고 나가서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고 해도 지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기억이 지워졌어도 온갖 것을 경험해 온 흔적은 남았다 하면, 몇 번이고 부딪쳤을 벽의 막막함 또한 남아 있을 것이다.
‘…미안해지네.’
결국 나 힘들다고 저리 가리고 한 꼴이잖아. 그렇다고 죄송합니다 제가 성급했지요 다시 돌아와 주실래요? 하기에는 티를 안 낼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른 사람이니 숨기는 것도 힘들 테고. …그러니 내가 좀 더 강해질 때까지, 잠시만.
‘초승달 일을 제외하면 일단은 대충 해결된 걸까.’
정확한 상황은 신입을 만나 들어봐야겠지만 채터박스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나서는 초월자는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없겠지. 디아르마도 없었잖아. 효도 중독자 쪽에서 새로운 후임자가 올 수는 있겠지만 채터박스처럼 목숨 걸고 덤비진 않을 것이다.
아마 채터박스의 추종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을 이용해 세상 지키는 걸 방해하는 정도겠지. 나와 유현이한테 칼 갈고 있는 초화운과 채터박스의 힘을 얻은 S급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상대해볼 만했다.
“송, 흠, 송 실장님.”
목이 영 껄끄러웠다. 내 부름에 입구 쪽을 향해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던 송태원이 고개를 돌렸다. 쉬셔도 괜찮을 거라 해도 듣질 않고 밤새 저러고 계셨다.
“바로 한국에 돌아가는 건 위험하겠죠? 초화운 무리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진 않거든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간 난리난다. 혹여 도담과 해연을 노린 거잖아, 하고 보상 요구라도 들어오면 파산할지도. 몬스터가 아닌 헌터들 간의 싸움으로 인한 피해는 당연히 책임져야 했다.
“…유럽 헌터 연합에 협조하여 일망타진 후 귀국하는 것이 안전하겠습니다만 한유진 씨는 전투계가 아니기에 비밀리에 먼저 귀국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 없으면 송 실장님께서 제일 고생하실걸요.”
나만 몰래 빼돌리려면 유현이와 예림이도 여기 남아야 한다. 거기에 성현제는 내 곁을 떠난 거지 송실장님 곁을 떠난 건 아니니까 다시 스윽 끼어들 가능성도 높았다. 여기에 다른 유럽 S급들도 얌전히 예언가 무리만 공격하진 않을 테고. 그럼 뭐, 송 실장님 속이 멀쩡하지 못하겠지.
“일단 제가 피곤하기도 해서 바로 먼 거리 이동하긴 힘드니까요, 이삼 일 쉬면서 상황을 살펴보죠. 아, 머리카락 아직 허얘.”
“정확히는 은색이에요.”
예림이가 꽤 예쁘다며 말했다. 은색이나 흰색이나 그게 그거지. 이거 설마 원래대로 안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해가 뜨면서 내 몸에 깃들어 있던 초승달의 마력도 거의 사라졌는데도 그대로였다.
“유현아, 눈은 어때?”
“원래 색은 아니지만 좀 더 짙어졌어.”
“머리카락은 아예 탈색되기라도 했나. 염색해야 하나.”
이 나이에 벌써 흰머리 염색이라니. 프랑스에도 검은 염색약 파나? 새치 염색약 평생 살 일 없을 뻔 한 거에 비하면 낫지만. …초승달 때문에 내 수명 또 줄어든 건 아니겠지.
“일단 나가자.”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어이구 찌뿌듯해. 이대로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비행선에 돌아가도 괜찮겠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저택을 살피고 가야겠죠?”
누님네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비행선에 연락하려고 했지만 멀쩡한 통신장비가 없었다. 성현제가 벼락을 흩뿌려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비행선에는 제가 올라가 볼게요.”
노아가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누님께도 연락해 보겠습니다. 한국 던전 관리도 지금쯤 마무리되었을 테고 이런 싸움판에 빠질 리 없으니까요.”
리에트가 오면 난장판은 되겠지만 든든할 것이다. 알프스산맥 크고 기니까 조금 깎아 먹어도 티 안 날 거 같은데. 알고 보면 리에트가 이미 몇 개 부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 씨 많이 피곤하실 텐데 함께 먼저 돌아가세요. 이 저택에 차 한두 대 정도는 있겠죠.”
결혼식 하객들에게 교통편 정도는 내어주지 않겠냐.
“네, 조심하세요.”
노아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카장창, 얼음이 부서지며 가로막혔던 햇살이 단숨에 쏟아져 들어온다. 황금색 날개가 눈부신 빛을 머금으며 떠오르는 태양처럼 높이높이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발을 내디뎠다. 아주 약간 비틀거렸을 뿐인데도 유현이와 결이가 얼른 부축해 왔다. 결아, 아빠 무거워.
-조심해, 아빠.
“형, 안아 줄까?”
“제 팔도 있어요. 저 송 실장님도 가볍게 들었다고요!”
“괜찮아, 괜찮아. 피스야, 다시 유체화해. 사람들 놀란다.”
대저택이니까 비각성자 고용인들도 있겠지. 피신시켰다면 다행이지만 혹 모르니까. 송 실장님이 앞장서고 유현이와 예림이가 내 양옆에 섰다. 성현제가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뒤를 지켰겠지. 등 뒤가 조금 허전했다.
길을 따라 얼마쯤 걷자 붉은 융단이 끝나고 하얀 대리석이 나타났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검붉은 얼룩이 드문드문 비춰졌다. …몸은 괜찮은 걸까. 잠깐만, 여기 다른 S급들도 있었을 텐데!
‘…젠장, 송 실장님께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할걸!’
설마 또 잡혀간 건 아니겠지? 요란한 소리는 들린 적 없었지만……. 불안감에 걸음이 빨라졌다. 복도가 끝나고 저택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어서 오십시오.”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중년의 여성과 남성이 우리를 향해 허리 숙이며 공손히 맞이해 주었다. 여자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남자는.
“…반테스 씨?”
세성 길드 사람이잖아. 성현제 보좌관. 이델 반테스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 그, 이직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