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326
교주는 하나 남은 오른 손으로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먼 곳을 보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높게 솟은 제노미아의 성벽이 보이고 있었다.
수도에서 군대를 일으켜 제노미아를 향해 진군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하면서 이동했기에, 이곳까지 도달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 덕에 각 도시의 신전에서 뽑아낸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렸지
만, 그에 대해서는 크게 아쉬움은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갈 일은 없다.
교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전쟁을 일으키고 진군한 이상, 교주에게 남은 결말은 그리 많지 않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적당히 플레이어를 압박하면서 계속해서 존재할 것인가. 아
니면 과격한 행동을 이어나가면서 롤백되거나 삭제될 것인가.
물론, 교주가 바라는 것은 후자였다. 그런 식으로 군림하여 보았자 임시방편일 뿐. 언젠가는 플레이어에게 다시 몰락을 맞게 된다. 그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생각하고서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교주는 그렇게 설정된 존재다. 그래, 설정. 플레이어에게 있어서는 문장 몇 줄로 정리할 수 있는 설정이겠지만, 교주에게는 아니다. 교주의 머릿속에는 그가 살아 온 몇 백 년의 세월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의문도 마찬가지였다. 황혼의 교주. 그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인가. 어차피 이 세상은 플레이어를 위한 것이고, 황혼이나 봉인 된 고대의 신 네브람이라는 것은- 결국 플레이어가 한 번 밟고 지나가는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NPC가 스스로가 NPC임을 자각하고 있기에 생기는 문제다. 스토리 상으로 악역을 맡은 교주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가 목적으로 두고 있는 네브람의 부활이 설령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교주는 죽을 것
이고 부활한 네브람은 다시 봉인될 것이다. 플레이어가 존재하고 스토리가 계속되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모르지. 다시 부활하게 될 지도. …그러고 싶지는 않군.’
교주는 성벽을 보면서 낮은 웃음을 흘렸다. 자조가 섞인 마른 웃음이었다. 몇 백 년을 살아오고 그 끝이 어찌 될 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교주는 유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스토리는 변하지 않는다. 변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당장의 전쟁에서 교주가 승리한다 하여도, 언젠가가 되었든 교주는 죽게 된다.
“교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악희였다. 교주는 펄럭거리는 왼 팔의 소매를 잡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서두르지 마라.”
교주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저들에게도 시간을 주려는 것 뿐이야.”
“그럴 필요가 있어? 그냥 먼저 달려 들어가서 전부 다 부숴버리면 되는 거잖아.”
악희가 아랫입술을 할짝거리면서 말했다. 그녀의 목에는 교주가 내린 목걸이 형태를 한 신기가 걸려 있었다. 악희는 신기의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않았지만, 신기의 성능에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그
럴 듯해 보이는 성벽으로 달려들고 싶다. 저들이 세운 성벽이 얼마나 얇고 무의미한지를 보여주고 싶다. 교주는 흥분으로 몸을 떠는 악희를 보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제국의 역사에서. 이런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나?”
“…뭐야, 갑자기?”
“없었어.”
악희가 되물었고, 교주는 자신이 물은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였다.
“오랜 역사에서는 이 대륙에는 몇 개의 국가가 있었다고 하지. 하지만 지금은 제국 하나 뿐이야. 아주 오래 전에, 분열되었던 국가들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그 후에는 전쟁이 없었지.”
몇 백 년 전인가, 네가 소꿉장난처럼 벌인 전쟁이 있기는 했었지만 말이야. 교주가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지금부터 벌어질 전쟁은 그런 것들과는 달라. 몇 천 년 전에 있었다는 설정 속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나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최초로 전쟁을 일으킨 NPC로 기억될 거다.”
교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성벽 쪽을 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승패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렇게 기억되겠지.”
악희는 그런 교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악희가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파괴하고 날뛰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악희는 라덴을 떠올렸다. 그 빌어먹을, 그러면서도 갈증과 허기를 느끼게 만드는 인간. 제베른 숲에서 라덴에게 두들겨 맞은 기억은, 악희에게 있어서는 치욕스러우면서도 황홀한 기억이었다. 악희는 교주의 강함에 매료되
어 황혼의 편에 붙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진심으로 교주를 위하거나 전쟁에서 황혼의 승리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악희가 바라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 뿐이다. 라덴은 악희가 만족을 느낄만한 상대였다. 악희는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열리는 성문을 노려 보았다.
제노미아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나름대로 전열을 갖춘 플레이어들이었다. 평균 레벨도 안 되거나, 간신히 평균 레벨을 웃도는 플레이어들이 그 선봉을 맡았다. 어차피 전투 도중에 활약하지 못하는 이
들이다. 저들 스스로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스스로 선봉의 역할을 자처했다.
“고기 방패로군.”
뒷짐을 진 교주가 비웃음을 흘렸다. 머릿수만 많을 뿐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저런 놈들은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하여도 교주의 손짓 몇 번이면 몰살시킬 수 있다.
하지만 교주는 그러지 않았다. 교주가 직접 벌이는, 플레이어와 NPC가 엮인. 머나 먼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벌어지는 전쟁이다. 전쟁이라면 전쟁답게. 학살이 아니라. 교주는 얼굴 가득 웃
음을 머금었다.
성벽에서 쏟아져 나온 플레이어들이 평원을 가득 채운다. 그 플레이어의 뒤에는 상위 랭커들이 진을 쳤다. 그들은 무장 수준부터가 선봉의 플레이어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그 뒤에는 팔라레스 후작이 이끌고 있는 정규
군들이 선다. 성문은 끝없이 전사를 쏟아냈다. 교주는 그를 보면서 하나 뿐인 오른 팔을 치켜 들었다.
교주의 등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준비하고 있던 황혼의 군대가 몸을 일으킨다. 오딘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머릿수만 채울 뿐인 저 레벨 플레이어들. 전쟁에 기여하는 것쯤은 가능한 상위 랭커들. 수도에서부터 끌고
온 제국군. 황혼의 처형대.
드넓은 평원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깃발이 바람에 흔들린다. 하나는 오딘의 문양을 박아 넣은 깃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혼의 깃발이었다. 제국군을 이끌고 있음에도 제국의 깃발은 없다. 교주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오딘의 군대를 가리켰다.
“진군하라.”
교주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평원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악희가 흥분이 가득 섞인 호흡을 내뱉으면서 교주를 보았다.
“가도 돼?”
“가라.”
교주가 허락했다. 악희는 소리 높여 웃으면서 땅을 박찼다. 악희의 등 뒤에서 시커먼 날개가 돋아나 활짝 펼쳐졌다. 악희는 날개를 크게 펄럭거리면서 하늘을 가로 질렀다. 황혼의 군대가 제대로 진군을 시작하기도 전에 악
희는 한 명 뿐인 선봉이 되었다.
“검왕님.”
전열의 후미에 위치한 라덴은 곁에 있던 검왕을 불렀다. 악희를 마크해주기로 한 것은 검왕이다.
“무식한 계집 같으니.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서 날아오는 것인지 모르겠군.”
검왕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패천을 꺼내 쥐었다. 염화를 제외한 다섯 괴물의 강함은 비슷한 정도이지만, 검왕은 그들 중에서도 근소한 차이로 가장 높은 레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왕은 악희를 무시하지
는 않았다.
검왕은 처음부터 패천을 꺼내 쥐었다. 오딘의 레어에 들어가고서, 검왕은 여러 가지 검을 보았다. 하지만 검왕은 그곳에 있는 검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뛰어난 검은 많았지만, 패천이 아닌 다른 검을 쥐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검왕이 선택한 것은 이것이었다. 신기 슬레이프니르. 무기도 아니고 갑옷도 아니다. 슬레이프니르는 신발이다.
검왕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검왕의 능력으로도 하늘은 날 수 있지만, 슬레이프니르의 능력은 단순히 하늘을 날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검왕의 발이 허공을 딛은 순간,
검왕의 몸이 사라졌다. 그는 공간을 도약하여 허공을 가로지르던 악희의 앞을 막아 섰다. 무턱대고 질주하던 악희가 움찔 놀라서 검왕의 앞에 멈춰섰다.
“…검왕?”
“천둥벌거숭이같으니.”
검왕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패천을 들어 올렸다. 악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나를 막으려는 거야?”
“나 말고 누가 널 막을까.”
“나는 너랑 놀고 싶은 마음이 없어…!”
악희가 끓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물론, 검왕은 악희를 고전시킬 몇 안 되는 상대 중 하나다. 하지만 악희는 검왕과의 싸움을 즐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악희는 자신과 같은 다섯 괴물, 불사성을 가진 괴물들
과의 싸움을 즐기지 않았다. 서로가 죽지 않는 괴물인데 싸움이 무슨 재미가 있는가?
“그런 네 입장이지.”
검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악희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다. 싸움을 이어가 봤자, 검왕은 악희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검왕의 검은 날카로웠지만, 불사성을 완전히 베어낼 정도로 단련되지는 않았다. 봉인
이라는 수단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검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악희가 다른 곳에서 날뛰지 않도록 붙잡는 것뿐이다.
“비켜…!”
악희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악희의 눈빛과 공명하여 붉은 빛을 토해냈다. 악희가 몸에 두르고 있던 시커먼 마력이 부풀어졌다. 악희가 가진 신기의 능력은 육체를 강화하고 마력을
증폭시킨다. 불사성을 가진 악희였지만, 육체 자체는 그리 강건하지 못하다. 라덴과의 근접전에서 악희가 쉼없이 얻어 맞았던 것이 그 증거다.
이 신기는 악희의 그런 약점을 보완한다. 악희의 몸이 폭발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녀는 날카롭게 세웠던 손톱을 크게 휘둘러 검왕의 목을 노렸다.
검왕은 당황하지 않았다. 악희의 움직임은 빠르고 매서웠지만 검왕의 눈은 이 정도의 속도에는 익숙했다. 검왕이 신고 있던 슬레이프니르가 빛을 발했다.
검왕은 딱히 기동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슬레이프니르는 검왕에게 과한 기동성을 부여해준다. 검왕의 몸이 허공에서 미끄러진다. 악희가 휘두른 손톱이 공중을 찢었을 때, 검왕은 이미 악희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 있
었다.
검왕의 손에서 패천이 빙글 돌았다.
콰드득! 패천의 칼날이 악희의 복부를 꿰뚫었다.
“우선 한 번 죽어라.”
검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패천을 크게 휘둘렀다. 악희의 몸이 대각선으로 베어졌다. 피가 뿜어지고, 내장이,
쏟아지지 않았다. 피도 뿜어지지 않았다. 패천이 악희의 몸을 갈랐을 때, 이미 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달라붙으면서 재생하고 있었다.
“비키라고 했잖아!”
상처 하나 없는 악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외쳤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