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16
(115)
베란다. 빨래 건조대와 날이 좋아 열어둔 창문.
눈이 부셔서 잠시 찡그리고 있다가 손에 들린 축축한 빨랫감을 내려다봤다.
나 방금 뭐 하고 있었더라?
아, 집에서 빨래 너는 중이었지.
나는 티셔츠를 털고 건조대에 걸쳤다.
날이 좋아서 빨리 마를 것 같네.
등 뒤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형은 지금까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뭐야?
“나? 나는 책 잘 안 읽잖아. 나한테 물어도 잘 몰라.”
-영화는?
“영화도 잘 몰라. 요즘은 영화 티켓값이 금값이라서 맘먹고 보러 갈 수가 있어야지. 그건 갑자기 왜?”
-형이 재미있어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던가.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바구니에 남아 있는 빨랫감을 전부 건조대 위에 쏟아부었다.
노란색의 망토가 빨랫감에 섞여 있었다.
“내가 뭘 안다고. 그런 예술 쪽은 하나도 모르니까 네가 좋아하는 대로 써도 돼.”
-요즘은 버스에서도 이런 거 자주 읽는대. 형도 출퇴근하면서 심심할 때 읽어볼래? 내가 써줄게.
“버스에서 잠이나 자면 되지. 그래, 무슨 이야기를 쓸 건데?”
-일단 형이 엄청 수상한 세계로 떨어져. 그리고 거기서 주인공을 만나거든.
“재미있겠다. 그래서?”
-그리고 거기서 일단 죽어.
“……어?”
뒤를 돌아보자 거긴 집이 아니었다.
기분 좋은 햇빛 대신 소름 끼치게 밝고 커다란 달이 머리 위로 떠 있었다.
그 앞에서는 옆구리가 파먹힌 변이 보르미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 어.”
아냐. 여기가 아닌데.
조금 전까지 집에 있었잖아.
나는 옷을 더듬다가 손에 묻은 진득한 체액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숲에서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멀리서 공작가가 불타고, 숲이 갑작스레 끝난 끝에는 동부의 구덩이가 보였다.
구덩이 너머로 보이는 건 거대한 대양.
파도 소리와, 어인의 노랫소리가 뒤섞였다.
그 광경에 천천히 뒷걸음치다가 뭔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자 처음 보는 갑주를 입은 유릭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가 튀어 엉망이었고, 새빨간 눈은 광기와 충동에 번득였다.
-내가 도망가라고 했잖아, 공작.
“나, 나는, 나는.”
-벌써 마흔 번째야. 언제까지 죽을 거지?
새빨간 혀가 창백한 입가의 핏자국을 핥았다.
유릭은 검이 높게 들어 올렸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만!”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한 방울 미끄러졌다.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흐린 빛이 간신히 시야를 밝혀주고 있었다.
시선을 위로하니 익숙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부터 여기까지 올라오시고는 쓰러지셨습니다. 이대로 멀리 가는 건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조금 이동한 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어?”
“예.”
목이 갈라져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나왔지만 레안드로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분명 저 아래에서 아품 자와 거래를 하고 있었을 텐데.
중간부터 기억이 끊겨서 흐릿하기만 했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올라와서…….”
“제게 무언가를 건네주시고 바로 의식을 놓치셨습니다. 온몸이 차가우셔서 임시로 몸을 덥히려고 했습니다만,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아냐. 잘했어.”
레안드로스는 제 망토를 나한테 둘러준 채였다.
여기는 저 아래만큼 춥지는 않아서 레안드로스의 망토를 벗어 돌려주면서 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공작님께서 장갑을 떨어뜨리지 않으셨습니까. 갱도에서 무슨 일은 없으셨습니까?”
“무서운 소리가 들려서 몸을 피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 뭐야. 멋대로 움직여서 미안해.”
“잘하셨습니다. 갱도 안에는 마수들이 우글거리더군요. 피하실 수 있으셨다면 다행입니다.”
레안드로스는 내 오른팔에 손을 댔다.
아, 맞다. 이거 잊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중간에 굴러떨어져서…….”
“어깨가 빠진 쪽은 다시 끼워두었습니다만, 팔이 부러진 건 제대로 의원에게 보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프시진 않습니까.”
“공작답지 않게 솔직히 말해도 돼?”
“참아주십시오. 계단은 위험한 일이 없으니, 위로 천천히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영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나는 레안드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아까 준 거. 보여줘.”
“이거 말씀이십니까?”
레안드로스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되돌려주었다.
싸늘한 냉기가 어려 있는 작은 환.
순백색의 알약은 겉보기만 봐서는 눈을 작게 뭉쳐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손바닥 위에서도 녹지 않고 그저 차갑기만 했다.
“제게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만.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극권의 군주. 광산 아래에 유폐되어 있었지.”
“극권의 군주라면.”
“유릭이 강제로 이 땅에 현현시킨 옛 신 중 하나. 그를 만났는데, 나와 거래를 하고 싶어 하더라고.”
“어떤 거래입니까?”
“그 신이 나에게 힘을 빌려주는 대신, 내가 그 신의 꿈에 가서 만나기로 했어.”
“신의 꿈에 인간이 갈 수 있는 겁니까?”
“모르지. 신 마음대로 아니겠어?”
레안드로스에게 하얀색 환을 되돌려주자, 그는 그걸 이리저리 돌려서 살펴보며 찡그렸다.
“그 신이 이걸 준 겁니까?”
“그걸 먹으면 얼음과 눈이나 냉기 같은 걸 다룰 수 있게 된대.”
“그걸 제게 주신다니요. 이토록 귀한 것을 모처럼 얻었으니 공작님께서 바로 드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비전투 인원이라 안 돼. 그런 거 먹었다가 무슨 부작용이 있으려고. 당연히 네가 먹어줘야지.”
“그렇습니까. ”
부작용 운운은 농담이었는데, 레안드로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릴 새도 없이 입 속에 환을 털어 넣었다.
“맛이 어때?”
“호위 기사답지 않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그건 좀…… 참아주라.”
레안드로스도 제법 치는군.
계단 몇 개에 걸쳐서 길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남부에서 문어에게 쥐어짜인 이후로 처음 느끼는 통증이었다.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레안드로스는 다시 나를 눕혔다.
“조금 더 누워계십시오. 앞으로 올라가야 할 길이 멉니다.”
“그래도 바닥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무거웠을 텐데 고마워.”
“아닙니다. 저 혼자만 한 일이 아니었으니.”
“어?”
“공작님께서 데리고 오신 저것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가 뭘 데리고 왔는데……?
얼어붙은 나를 보는 레안드로스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공작님과 함께 온 그것 있지 않습니까. 공작님을 옮기는 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옛 신을 만난 후 얻은 것이 아니셨습니까?”
그렇게 말한 레안드로스는 친절하게 손을 들어 아래쪽을 가리켰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하얗고 동그란 몸통.
몸통보다 약간 조그만 머리.
통통하고 살짝 길쭉한 팔다리.
머리에 다닥다닥 붙은 까만색 돌.
이런 특징만 보면 꼭.
“누, 눈사람?”
계단에 동그마니 앉아있는 눈사람을 본 순간 내가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졌나 싶었다.
하지만 레안드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공작님께서 쓰러지실 때 잡아드리면서 뒤에서 따라 올라오고 있는 놈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나는 저런 걸 받은 기억이 없어!”
“받은 기억이 없다니. 공작님께서 데리고 오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받았겠어? 저런 수상쩍은걸? 그보다 그 옛 신이 잘도 저런 아기자기한 걸 줬겠다!”
레안드로스는 나와 눈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슥 일어나더니 검을 뽑았다.
“그럼 베겠습니다.”
하지만 레안드로스가 막 검을 뽑으려고 할 때 눈사람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잠깐.”
“으아악! 눈사람이 말했다!”
“베면 말을 못 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잠깐이라고 했다.”
눈사람이 어기적거리며 짧은 다리와 팔을 휘적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눈사람은 나를 올려보더니 양손을 쫙 펼쳤다.
“나는 극권의 군주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 극권의 군주는 그렇게 안 생겼어.”
“이해한다. 지금 모습은 다르다. 불길은 불씨로도 나뉜다. 나는 내 힘의 일부다. 나는 분리된 자아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이거 스토킹이야!”
“나의 신도를 감시한다.”
“뭐?”
눈사람이 제 키의 절반만 한 계단을 끙끙거리며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나를 가리켰다.
“나의 첫 번째 신자. 감시한다. 신자는 위대한 아품 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보호한다. 위대한 신은 신자를 버리지 않는다.”
“벗어나다니 무슨.”
“벗어난다? 처형한다. 즉결심판 한다. 신을 배신하는 불신자다? 죽는다.”
AI같이 딱딱 잘라 말하는 무미건조한 말투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신자와 나. 마력으로 연결한다. 신자 죽는다? 나 없어진다. 나 자신의 곁으로 간다. 신자 멀어진다? 나 녹는다. 나 자신의 곁으로 간다. 떨어지지 않는다.”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누구 마음대로?”
“신자는 마력 많다. 나는 없다. 신자의 마력과 의식을 공유한다. 나는 신자의 공동 운명체다.”
“레안드로스! 어떻게 좀 해봐!”
말하는 눈사람을 구경하던 레안드로스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기대하던 것처럼 눈사람이 갈라지진 않았다.
그 대신,
-쩡!
“으악!”
눈사람에게 부딪힌 검에서 쇳소리가 났다.
레안드로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눈사람은 레안드로스에게 머리를 돌렸다.
“나 죽는다? 신자 드림랜드에서 괴롭힌다. 위대하신 아품 자가 꿈에서 죽을 때까지 괴롭힌다. 불경하다. 불신자다? 필요 없다. 죽는다. 이해한다?”
“……공작님, 외람되지만 이 눈사람은 자신을 공격하면 공작님께서 어느 방식으로든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대체 왜!”
“버리고 갈 수도 없을 것같이 보입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그러니까 종합해보자면 아품 자가 내가 딴 길로 샐까 봐 감시인을 붙여놨다는 건데.
멀리 떨어져도 안 되고,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 몰래 어디 버리고 가는 것도 불가능한 놈을.
눈사람은 끙차끙차 올라와서는 내 발등 위에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레안드로스는 나를 흘금 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데리고 가십니까?”
“……씨발.”
이번 회차 꼬이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다.
결국 눈사람과 나, 그리고 레안드로스는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레안드로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올라가다가 쉬기를 반복하던 차에, 웬만큼 올라오자 내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저기는.”
“내려오면서 보니, 다른 곳은 선로가 이어져 있어도 다 막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기만은 수레가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었습니다.”
벽에 숭숭 뚫린 구멍.
선로와 연결되어 있는 막혀 있는 갱도 입구.
그중 단 하나만이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수레도 알아서 움직였지.
운반 시스템이 반자동화 되어 있다면, 최근까지 미스릴 광석을 옮긴 곳은…….
“저기로 가자.”
“이런 상태로 말씀이십니까?”
“수레 한 대가 우리 셋보다 무거울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거든. 저쪽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어떻게든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레안드로스는 한숨을 쉬며 팔을 걷어 올렸다.
위태로운 철로를 건넌 우리는 갱도를 따라 쭉 위로 향했다.
캄캄하고 좁은 길, 레안드로스의 작은 횃불에 의지하며 한참을 걸었다.
쉬고, 걷고, 쉬다가 걷고.
좁은 갱도에서 그렇게 있으려니 영 불편하고 무서웠다.
폐소공포증이라는 게 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야 공간이 넓어지면서 바닥이 단단해졌다.
돌을 깔아서 바닥을 다진 너른 공간.
여기가 평범한 광산 작업장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레안드로스가 삐걱거리는 철창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어쩐지 익숙한 건축 양식이 보였다.
“변경백의 성과 이어져 있군.”
짐작한 대로였다.
어디인지는 잘 몰라도, 지난 회차에서 봤던 성의 홀과 비슷한 장식이 음각되어있는 기둥이나 단단한 벽의 재질이 흡사했다.
레안드로스가 물었다.
“여기로 이어지는 길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신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거든.”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동원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스릴 광석에는 마력이 함유되어 있잖아.”
지난 회차에서 이본느가 미스릴 부족을 알리면서 말했던 게 기억났다.
-미스릴이 광석 단계에서 어느 정도 마력을 내포하고 있어서 마수의 일부와 상성이 잘 맞기도 해요.
게다가 처음 이 성에 찾아왔을 때 보인 건 산더미 같은 미스릴 광석이었다.
변경백이었던 괴물은 그걸 씹어먹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광석에 있는 마력을 흡수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신을 부르기 위해 사람을 바치는 게 가장 정석적이라지만,
그 시점에서 북부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남부에서 어인족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신을 불러내려고 했었지.
인간이나 타 종족도 일정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내 눈알 하나로 신의 강림을 앞당기게 된 이유는?
유릭의 피가 바다에 흩뿌려진 것처럼, 나의 피 역시 구덩이의 별걸음쟁이를 깨웠다.
어쩌면 유릭과 나는…….
“성에 광산과 이어진 굴이 있는 걸로 봤을 때, 광석이 여기에 집중된 것도 무리는 아니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 앞에 어떤 마수가 있을지 모릅니다.”
“마수는 없어.”
“마수가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장서서 걷던 레안드로스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눈사람을 쳐다봤다.
“성안이라면 잠시 떨어져 있어도 돼?”
“괜찮다.”
“레안드로스, 성에 도착하게 된다면 이 눈사람을 데리고 홀로 올라가. 거기에 변경백이 있어. 그의 더듬이를 자세히 봐.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을 잘 쓸 수 있도록 연습해봐.”
“……예, 알겠습니다.”
레안드로스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보며 북부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삶에서는 레안드로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북부의 진상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따로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
레안드로스가 내가 하려는 짓을 몰라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