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31
(130)
이런 거 싫어.
더 이상 싫어.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 기억들이 깔깔 웃었다.
본래 아렌하이트의 기억인지, 아니면 나의 기억인지 모를 만큼 두 개가 뒤엉켜 있었다.
유릭과 아빠가 데리고 왔던 이름 모를 여자가 함께 달려왔고, 내가 기억하던 엄마와 전 공작부인이 울부짖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만해! 제발 그만!
눈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어서 속삭였다.
“왜 그렇게 도망가는 거지? 이건 네가 한 번 목격한 것들인데. 드림랜드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거쳐 가는 절차야. 너는 여기서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을 텐데. 뭐가 두려운 거지?”
미친 새끼!
눈사람이 말한 것처럼,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몸은 숨이 쉽게 차지도 않았다.
도망갈 용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멀리 도망갈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두 개의 비스듬히 뜬 달이 이지러지는 동안 끔찍한 숲을 벗어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푸른 태양이 뜨고 차가운 빛이 새로운 아침을 알려올 때 나는 거대한 보랏빛 성벽을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나를 비웃고 힐난하던 망령들의 소리가 멀어져갔다.
“신자치고는 꾀를 썼다. 울타르로 바로 들어오다니. 드림랜드의 입장객이 떨어지는 곳은 다양하다지만 설마 울타르의 인근일 줄은 몰랐네.”
“너, 헉, 허억, 이 자식.”
“그래도 달릴 만하지? 신자의 원래 몸으로는 이만큼 달리는 게 가당키나 한가. 어때, 가볍게 뛴 것처럼만 느껴지지 않아?”
어느새 내 옆에 따라붙은 눈사람이 이죽거렸다.
숨을 고르다가도 솟구치는 분노에 눈사람을 향해 주먹질을 해댔지만 그는 가뿐하게 피하면서 웃어댔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신자.”
“너, 이 개만도 못한.”
“설마 방금 그거 때문에 그래? 다른 인간들의 기억보다는 확실히 피곤하기는 했지. 하지만 내 탓은 아냐. 신자도 알고 있잖아.”
“입 닥쳐! 그 얼굴로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이 몸도 재미있게 구경했으니까 조용히 해 줄게.”
눈사람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얄밉게 웃고 있는 놈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겨우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이곳의 하늘은 현실과는 다르게 푸르스름한 잿빛에 가까웠다.
그 아래로 섬뜩한 푸른 구름이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뭉쳐지며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짙은 녹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숲, 연둣빛 벌판 사이로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것마냥 노란 벽돌길이 깔렸다.
텁텁하고 수분이 많은 공기가 꼭 안개가 낀 산속같이 느껴졌다.
“여기는…….”
“말했잖아. 울타르라고. 본격적으로 도시의 영역에 들어온 건 아니고, 그 근처지만 성문을 지났으니 외곽에 들어온 셈이지.”
“울타르?”
“그러고 보니 신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눈사람은 내 곁에 서서 나의 눈높이에 맞추어 손을 뻗었다.
손은 내가 가던 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스카이 강과 울타르로 들어가는 다리.”
손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내가 왔던 길이었다.
“뒤는 마법의 숲으로 돌아가는 길.”
손은 오른쪽과 왼쪽을 각각 한 번씩 가리켰다.
“흘라니스, 달라스 린으로 통하는 길. 전부 드림랜드에 실존하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그대가 꿈꾸는 곳이지.”
“그게 무슨 의미지?”
“인간의 상식이나 관념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신자.”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건데?”
“그야, 무수한 드림랜드를 방문했으니 알겠지. 물론 본체로 다녔어. 행성과 행성 사이를 움직이는 건 꽤 고달픈 일이니까.”
이쯤이면 드림랜드가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 알아내는 것도 지친다.
눈사람의 말이 끝나자 울타르라는 도시로 향하는 길을 곧장 밟았다.
눈사람은 군말 없이 나를 졸졸 따라왔다.
“이대로 울타르로 가게?”
“안 될 거 없지. 죽어도 그 숲으로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나를 향해 덤벼들던 수많은 얼굴이 떠오르자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한 번 더 죽는 게 낫지.
얼마간 걷다 보니, 아까 지났던 보라색 성문과 비슷한 색의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아래로는 세찬 강물이 넘실거렸다. 아마 스카이인지 뭔지 하는 강인 듯싶었다.
다리에는 여러 추상적인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전부 오래되어서 닳아 희미해진 모양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선명하게 눈에 띄는 문양이 있었다.
“……고양이?”
“울타르는 바스트가 수호하는 도시다. 바스트는 고양이의 신이라고 불린다.”
“왜?”
“취향. 일례로 어떤 노부부가 고양이를 살해했을 때, 그걸 본 소년이 바스트에게 기도하자 바스트가 고양이들을 이용해 노부부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고양이를 좋아하는 정신 나간 신격체지. 그래서 도시에 들어가면 고양이가 수두룩하다고 하더군.”
대체 여긴 제정신인 게 없네.
우리는 천천히 다리를 건너서 열려있는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도시라고 하기에 사람들이나 번잡한 거리를 상상했는데, 막상 들어서니 거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당황해서 눈사람을 보자 그 역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흐으음.”
“이거 왜 이래? 다들 이사했나? 아니면 드림랜드가 원래 사람이 이렇게 없는 편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다른 곳에 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레안드로스의 외형을 한 눈사람은 쉴 새 없이 자신의 입가를 톡톡 두드리다가 나를 쳐다봤다.
“울타르에는 사람이 많지. 승려도 있고, 고양이를 죽이지 못한다는 율법 때문에 길가에는 고양이가 널려 있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울타르이건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잖아.”
“지금 추측할 수 있는 건 신자의 드림랜드가 황폐하다는 것뿐이다. 이해하나? 드림랜드가 아니라, ‘신자의’ 드림랜드가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드림랜드는 각자의 꿈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곳. 동시에 다양한 곳에 무수히 존재할 수 있는 차원. 개인의 것이기도 하면서 신들의 것이기도 한 공간.”
“알아듣게 설명해봐.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
“인간들이 사는 현실은 뭐든 하나뿐이지.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쳐봐. 누군가가 그 나무를 잘라버리면, 나중에 온 사람도 잘려서 밑동만 남은 나무만 볼 수 있을 거야.”
“보통은…… 그렇지. 그게 일반적이지.”
“히지만 드림랜드에서는 나무를 잘라도 다른 이가 봤을 때는 멀쩡한 나무일 수도 있어. 그뿐인가? 신자는 녹색 나무를 봤지만 다른 이는 붉은 나무를, 앙상한 나무를, 혹은 나무의 형태를 한 무언가라고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건 나무가 아니잖아!”
“신자의 입장에서나 그렇지. 드림랜드는 변칙성이 많아. 어떤 것은 변하지 않지만 어떤 것은 변한다. 그리고 변칙의 기준은 바로 자신의 드림랜드에 들어온 사람, 신자야.”
내가 변칙의 기준이라니.
눈사람은 텅 빈 거리를 손짓했다.
“신자의 꿈은 아무것도 없어. 하다못해 들고양이 한 마리 없지. 신자의 꿈에서 허락된 존재는 나나 다른 신들 정도일까.”
“왜 그런 거야?”
“그건 신자가 텅 비었기 때문이지.”
“텅 비었다고?”
“그래. 신자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열망도 없고, 목표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 신자는 참 신기하고 이상한 인간이야.”
잠시만. 그게 뭐야.
“그러니까 정리하면 내가 아무것도 없어서, 내 꿈도 이렇게 황폐한 거라고?”
“신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어느 것도 소원하지 않으니까 꿈도 그런 경향을 띠고 나타날 수밖에. 아, 저 마법의 숲에서부터 따라오던 기억들은 논외지. 그건 악몽 같은 거니까.”
아무도 없는 도시.
원래라면 무언가가 있어야 했지만, 내가 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부 사라졌다.
그 사실을 몇 번이고 곱씹어봤다.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아냐, 그럴 리가. 착오가 있었겠지.
나는 동생을 사랑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고, 레안드로스를 엔딩으로 이끌어주고 싶은데.
이렇게 바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많은 내가 왜 텅 비었다는 거야.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을 때 눈사람은 내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왜 마법의 숲에서 도망갔지? 죽은 동생이 있었잖아.”
“그건, 그건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나와서…….”
“그렇다기에는 신자는 동생이 있는 곳으로 눈길 한번 안 준 게 아닌가?”
“아니야, 아냐!”
고함이 공허한 도시를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걔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겠어! 내가 왜 여기에 남아서 걔 대신 이야기를 써준다고 했겠어? 걔는 내 유일한 가족이었어! 가족이니까 사랑한 거야! 우리는 계속 같이 있었고, 나만큼 걔를 잘 이해했던 사람도 없고-”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있었나?
나는 아직도 동생이 어떤 이유로 이런 끔찍한 세상을 써 내려갔는지 몰랐다.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내가 힘들어 보여서 짐을 좀 덜어주려고?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고 싶었나?
하지만 이 소설은 가혹했다.
활자 안에서 꿈틀거리는 괴이가, 고대의 신이, 사람들의 절망과 공포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런 글을 쓰려면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거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는 글로 누군가가 행복해질 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 애의 본질보다 형인 나와의 관계, 내가 그 애에게서 느끼는 감정만 가지고 으스대고 있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공포심이 느껴졌다.
내가 잘 알고 있던 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막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멀리 서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두려움.
착잡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나를 구경하던 눈사람이 입을 열었다.
“신자와 그 동생에 대해서 언젠가 이야기를 들려줘야겠어. 그게 위대한 이 몸과 신자의 계약이었으니. 하지만 그게 지금이라는 소리는 아냐. 방금 좋은 생각이 났거든.”
“좋은…… 생각?”
“신자가 마음도 머리도 텅텅 빈 바람에 무방비하게 돼지 인간들에게 뜯겼잖아?”
“나 정도면 많이 알고 있는 건데.”
“위대한 아품 자의 신자가 영 못 볼 꼴이니 체면이 서질 않아. 그러니까 드림랜드에 온 김에 좋은 걸 알려줄게. 축복인 셈 치고.”
진짜 좋은 건가.
의심해 보려고 해도 눈사람의 의도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젠장. 언제부터 주변에 믿을 사람 하나 없게 된 거지.
하지만 확실히 이 눈사람이 나보다 드림랜드에 더 많이 알고 있는 건 맞았다.
게다가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전에 분명히 나를 가르치겠다 했으니.
믿어도 본전이지.
“무슨 축복인데? 허튼소리 하기만 해봐. 당장 여기서 나갈 테니까.”
“신자, 까칠하다. 울타르는 단순히 고양이들이 많은 도시가 아니야. 드림랜드에서 신이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도시는 거의 없어.”
“하지만 울타르에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신이 보호한다는 소리야?”
“그렇다, 신자. 울타르에 있는 책 한 권이 그 이유다.”
“책? 무슨 책?”
여기에도 책이라는 게 있나?
어리둥절하게 보자, 눈사람이 씨익 웃었다.
“이 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도서, 프나코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