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44
(43)
만찬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새벽.
아른트는 신나서 성에 들일 물품을 쓰다가 피곤하다며 들어갔다.
레안드로스는 모처럼 많이 먹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평소처럼 외부 순찰을 돌았다.
확실히 여러 날을 밖에서 지낸 탓에 느슨해진 감은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최근에는 반사신경이 너무 떨어져 있었다.
아른트가 포위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그를 뒤로 보내고 자신이 나설 수도 있었는데.
감각이 무뎌지기라도 한 건지.
공작 부인이 있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깨어 있었고, 눈만 붙인 후 침실 앞에서 경비를 서곤 했다.
조그만 소리라도 바로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는데.
아렌하이트와 지내다 보니 친밀감이라도 생긴 건지.
격 없이 시종과 호위기사를 대하는 새 공작을 보면 한숨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전 공작부인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봐 와서?
아니면 아렌하이트가 부쩍 정상적인 사람처럼 느껴져서?
잘 모르겠지만, 성에 돌아왔으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레안드로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성의 중정을 휘 돌아봤을 때였다.
“……같아.”
어디선가 들린 소리.
레안드로스는 중정을 둘러싼 회랑의 기둥을 붙들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아렌하이트였다.
아렌하이트는 침실로 올라간 지 한참 지나서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중정에 나와 있지 않은가.
아픈가?
레안드로스가 가까이 가자, 아렌하이트의 발치에 쏟아진 토사물이 눈에 띄었다.
소화가 되지도 않고 씹어 삼켰던 그대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레안드로스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공작 대신에 흙으로 현장을 덮어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 아무것도 아냐. 체했나봐. 어쩐지 속이 안 좋더라니.”
“무리하게 드실 것 같다면 말씀을 주셨어야 했습니다.”
“아른트가 너무 신나 보여서.”
손수건. 손수건이 어디있더라.
레안드로스는 제 품을 더듬다가 문득 공작부인의 사망 이후로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아렌하이트에게 제 망토 자락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뭐지?”
“닦으십시오. 입.”
“마음은 고맙지만 좀 비위생적이야. 토가 묻은 걸 입고 다니게?”
토사물이 묻은 입은 위생적입니까?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아렌하이트는 이미 제 소매로 입을 닦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아른트에게 공작님의 실내복을 갈아입혀야 한다고 일러줘야겠다.
레안드로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한 화단에 공작을 앉혔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 나온 김에 그냥 더 있자.”
공작은 유독 핏기가 없어 헬쑥해보였다.
레안드로스가 생각해도 공작은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크게 앓은 후에는 식사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살은 붙질 않고.
그런데도 용케 말을 달려서 산맥을 넘고 왕국을 횡단했지.
사람인가.
레안드로스는 아렌하이트의 얼굴을 뜯어보던 차에 미묘하게 복잡한 감정을 읽어 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보여?”
“유릭 왕세자와 어떤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아렌하이트는 침묵했다.
레안드로스는 그 침묵을 기꺼이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아렌하이트가 답해주었다.
“하르트만이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나 봐. 남부로 가라고 하던데.”
“계시 때문입니까?”
“동부에서부터 알고 있던 것 같아. 그게 유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머니를 거쳐서 나한테 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아른트는.”
“미끼였지.”
아렌하이트는 그의 시종을 너무나도 쉽게 ‘미끼’라고 인정했다.
레안드로스는 제안했다.
“원하신다면 아른트를 없애실 수 있습니다.”
“응? 내가 왜 그래야해?”
“걸림돌이 되실 것 같다면 그리 하시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걸림돌. 걸림돌이라.”
아렌하이트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 바람에 술로 탈색한 옅은 색의 적발이 헝클어졌다.
“걸림돌은 아냐. 아른트는 아른트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쓸 생각을 한 건 왕세자였어.”
“제가 경솔했습니다.”
“아른트랑 사이좋게 지내.”
“그를 싫어해서 제안을 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합리적이기 때문이잖아. 이미 알고 있어.”
아렌하이트는 잠시 간격을 뒀다가 밀을 이었다.
“널 탓하는 게 아니라. 나는 너희 둘이 잘 지내면 좋겠어. 단순히 너희가 내 시종이고 기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너희가 행복했으면 하는 거야.”
“지금 같은 시대에 어려운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어려운가?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고 봐. 처음에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봐.”
처음에 왔을 때.
레안드로스는 그때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렌하이트는 아팠고, 성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부서지고 도망간 것들에게 가슴 아파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빨리 다가왔다.
상념에 젖을 틈도 없이 내일 먹을 걸 걱정해야 했으니까.
“확실히 상황이 나아지긴 했습니다만.”
“응.”
“여전히 생각은 바뀌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황금을 조금 얻어서, 좋은 식사를 해서 어쨌다는 건가.
유릭은 여전히 살아 있고, 뻔뻔하게 성으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아른트의 목숨줄을 손에 쥐고서.
아렌하이트가 어두운 갈색의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걸로 바뀔 거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유릭이나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반대편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도와달라고 했잖아. 그리고 너는 맹세했고.”
레안드로스는 아렌하이트가 아른트의 앞을 막아서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손수 시체가 그득한 굴 밑으로 밀어 넣던 아렌하이트도 기억해 냈다.
그 두 명은 다르다.
아무 증거도 없는데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역겹다고 생각하던 존재가 조금씩 시선을 뺏어간다.
영혼이 없는 추한 본능을 가지고 있던 존재가, 언젠가부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의지에 부모님의 복수, 명예, 어떤 이름이 붙어도 상관없었다.
-너는 그 애를 따르게 될 거야, 레안드로스. 네가 지금 나를 그렇게 숭배하는 것처럼 그 애를 숭배하게 될 거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
공작부인은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던 걸까.
레안드로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를 검으로 쓰십시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공작님 곁에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안드로스는 감히 미처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생각을 했다.
아렌하이트의 발아래에 유릭의 시신이 뒹굴 때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의 공작이 바라보고 있는 미래가, 아주 먼 훗날에 이른다면…….
두 사람 위로 동부의 것과 같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렌하이트의 머리 위로 붉은 별이 빛났다.
* * *
“그러므로 남부로 떠나기 전에 청소를 하겠습니다.”
“방금 공작님께서 청소라고 말씀 하셨어요?”
“갈 때는 가더라도 할 건 해야지.”
밤에 레안드로스에게 했던 이야기를 아침에 일어난 아른트에게도 털어 놓았다.
아른트는 이미 예상하고 있는 반면,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른트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성의 청소를 제안했다.
지금껏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성은 꽤 더러웠다.
얼마나 더럽냐고 한다면, 아놀드 남작과 유릭을 대접하기 전에 비꼰다고 한 말이 전부 사실일 정도.
아른트가 아무리 가사일에 만능이라고 해도 이 넓은 성을 전부 커버할 수는 없었다.
아른트는 몸이 하나라고.
현재 가장 신경 써서 관리하는 구역은 부엌, 내 침실, 두 사람이 자는 장소였다.
그 이상으로는 청소가 어려운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먼지와 흙가루가 풀풀 날리는 성 안에서 지내는 건 무리가 있다.
“우리가 자거나 자주 다니는 쪽 위주로 하자. 탑은 가급적 올라가지 말고. 거기는 방문할 일도 없잖아?”
“응접실과 홀은요?”
“응접실은 청소. 홀은 앞으로는 들어가지 않으면 돼.”
“혹시 예배당은 어쩔까요?”
“그런 게 있었…… 아니, 아니. 거기는 나중에 내가 가볼게.”
“질문이 있습니다. 공작님께서도 참가 하시는 겁니까?”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나는 부모님의 서재와 집무실…….”
레안드로스의 말에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가 주변 공기가 싸해진 걸 느꼈다.
고개를 들자 아른트와 레안드로스가 진심이냐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왜?”
“혹시 공작님께서 기운이 너무 넘치시는 걸까요? 레안드로스 경, 혹시 제가 없을 때 몸을 단련하셨나요?”
“그럴 리가. 빠르게 걸으셔도 숨이 차신 분이신데.”
“세상에! 그건 정말 심하지 않습니까! 아침 식사도 속이 안 좋다며 물만 드셨죠? 저 같으면 침대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텐데요!”
“동감이다.”
이 꼴값 희극성 멘트는 뭐야.
두 사람은 앉아 있던 나를 번쩍 들어서 연행했다.
“왜! 나도 한다니까! 두사람이서 청소를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공작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반란이다! 모함이다!
나는 끌려가 유폐당한 왕족처럼 침실에 갇혔다.
청소 후 먼지가 가라앉기 전까지는 나오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얌전하게 침대에 누운 나를 보고 만족해서 돌아갔다.
하지만 정확히 10분 후.
나는 공작부인의 서재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이 한 당부는 안중에도 없이 온 게 좀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쪽도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바쁘다니까.
내 목에는 하인에게서 뺏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내가 걸면 가슴까지 길게 내려오는 목걸이.
내가 걸어도 이런데 아멜리아나 공작부인이 걸었을 때는 얼마나 길었을까?
나는 끝에 달린 길쭉한 검은 돌을 만지작거렸다.
공작부인의 것이었다 하니 일단은 뺏어왔는데, 어디다 쓰는 거지?
아멜리아가 공작부인에게서 받았다고 했으니, 그녀가 뭔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아멜리아는 이미 죽어 있었고.
내가 아멜리아만 두고 나가지만 않았더라도 혹시…….
‘아니. 그건 아냐.’
이건 유릭이 사람을 심어 뒀을 때부터, 그리고 내가 저택을 방문했을 때부터 정해진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접촉한 아멜리아는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바보같은 감상에 빠지지 말자.
나는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아멜리아는 부인의 전담 시녀였던 적이 있었다.
공작부인이 전담 시녀에게 이 물건을 맡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직 전담 시녀와 자신이 드나들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장소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후보는 몇 개 없었다.
침실, 욕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용 서재.
공작부인의 서재는 무척 넓었다.
꼭 공작의 서재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벽에 조각한 화사한 장식만 아니라면 정말 공작의 서재라고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천천히 안을 둘러보며 발을 내딛자 찢긴 페이지가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한 때 수백 권의 서적이 있었던 걸 증명하는 커다랗고 텅 빈 서가.
서가 근처에 각각 서 있는 우아한 깨진 램프들.
벽에 못 박힌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동물 박제.
약간 부서진 커다란 나무 집필대.
뭐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장식대와 빈 유리 진열대.
서재는 가문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준다.
공작부인에게 있어서 서재가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어서 구석구석을 한참 살펴봤다.
몇 번이고 와본 것 같은 기시감.
데자뷰라고 부르는 감각.
그건 이 몸의 원주인이었던 아렌하이트의 것일까, 아니면 순전히 내가 느끼는 감정일까.
서재를 한 바퀴 돌아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그러다가 벽면을 가린 먼지투성이 빌로드 커튼이 눈에 띄었다.
어두운 색이라 몰랐는데, 커튼 뒤에 가려진 거대한 액자틀이 살짝 보였다.
묵직한 커튼을 걷어내자, 형편없이 훼손된 커다란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벽 한 면을 통째로 가린 그림.
캔버스는 갈기갈기 찢겨서 원래 어떤 그림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언뜻 알 수 있는 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배경화라는 것 정도일까.
가운데에 있는 걸 중심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남은 그림의 잔해를 보고 있으려니 점점 이상하게 느껴졌다.
보면 안 되는 걸 목격한 느낌.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동시에 돌릴 수 없이 눈길을 잡아끄는 강렬함.
불경함과 동시에 그게 뭔지 알아내고 싶다는 본능적인 호기심.
그림 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흐린 빛이 기울어졌다.
빛을 보던 나는 손을 뻗어서 그림의 면을 더듬었다.
평평해야할 면이 어느 부분만 움푹 들어가 그림자가 져 있었다.
파인 부분 근처의 그림은 피리를 부는 사람이나 천사 같은 것들이 정렬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오목한 장소가 왠지 손에 익었다.
무심코 내가 목에 걸고 있는 돌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 부분에 돌조각을 밀어 넣자 마치 퍼즐조각처럼 딱 맞아 들어갔다.
-철컥.
철컥?
잠기는 소리가 났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틀린 건가.
나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돌조각을 떼고 다시 넣어 봤다.
-찰칵.
이번에는 확실히 소리가 달랐다.
하지만 방 안을 둘러봐도 달라진 걸 눈치챌 수가 없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트릭이 있는 건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찰나, 그림이 약간 달라진 게 보였다.
그림 구석에 배경처럼 있던 커다란 낡은 문.
처음 조각을 밀어 넣었을 때는 닫혀 있었는데, 지금은 또 열려 있었다.
나는 홀린 것처럼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평범한 문처럼 힘을 주자, 그림의 문이 그대로 밀리며 길을 터주었다.
까맣게 뻥 뚫린 공간.
그림의 너머에, 내가 발을 딛을 수 있는 계단이 실재했다.
교묘한 잠금장치에 감탄하기도 전에 문득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씩이나 시도했는데.
왜 문이 지금에야 열린 거지?
처음에 문이 열려 있었어?
이 열쇠는 공작부인이 죽기 전에 아멜리아에게 맡겼다.
아멜리아가 성에 왔을 리는 없을 테니, 내내 잠겨 있어야 할 문이…….
누군가가 최근 공작부인의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장치를 이해하고 열었다.
“레안드로스! 거기 아무도 없어? 이리 잠시만 와봐!”
그 새끼가 과연 누구인지는,
굳이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