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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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좀 더 세게 밟아주세요! 안 그래도 먼지투성이인데 잿물까지 안 빠지면 어쩌실 겁니까!”
“…….”
성의 안뜰.
레안드로스는 피곤한 얼굴로 거대한 빨래통 아래에서 느릿느릿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발을 벗어두고, 바지까지 둥둥 걷은 그는 영락없이 시골 촌부처럼 보였다.
물론 촌부라기에는 사람 하나 죽이고 온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아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더 밟아주세요! 팍팍! 공작님 침실에 깔 시트니까!”
“……원래 하인 너덧이 동반되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아무래도 그렇죠? 빨래 밟는 게 쉬운 줄 아세요?”
“그런데 왜 내가 혼자 하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는 레안드로스에게 아른트는 어깨를 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제가 하다가 몸살 나면 공작님 식사며 침실 청소며 자잘한 일은 누가 챙기죠?”
“이걸 하다가 몸살이 난다고?”
“아, 역시! 경처럼 훈련받으신 분들은 이해 못하신다니까요. 물 안에서 하루종일 철벅거리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그러니까 왜 내가.”
“경은 쉽게 아프지 않으시잖아요?”
레안드로스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지금까지 자잘한 병치레를 한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넓은 통 안에 그득한 빨랫감을 혼자 밟고 다니라니.
묵묵히 빨래를 밟는 발에 힘이 조금씩 더 들어갔다.
아른트는 그제야 성에 차는지 까르륵 하고 만족했다.
“성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만 좀 참으세요, 경.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한데 어떡합니까. 사람을 함부로 뽑을 수는 없잖아요?”
“남부로 떠나기 전에 관리인 하나는 들여야 할 텐데.”
“지금 가구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에 관리인을요? 그거 관리인 학대예요.”
“…….”
그것도 그렇긴 하지.
아른트는 빨래통에 기대서 조잘조잘 입을 놀렸다.
“우선 가구도 주문하고 청소도 해서 좀 번듯하게 갖춰놓자고요. 남이 보기에도 안 부끄럽게 말이죠. 그런 후에 천천히 사람을 가려가면서 뽑는 게 제 계획이랍니다.”
“알아서 해.”
“주방에 먼저 두 명을 넣고, 하인을 다섯 정도는 고용해야 일상적으로 지낼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병사도 뽑아야 할 텐데, 지금은 약간 시기상조 같거든요? 이건 공작님의 인가가 필요하겠네요.”
“알아서 하라니까.”
“공작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인데, 왠지 좋은 예감만 들어요. 가문을 정말로 일으켜 세우실 것 같아요. 뭔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요.”
레안드로스도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대답하기에는 레안드로스의 기력이 없었다.
“동부까지 오셨을 때 솔직히 감동했거든요. 기대하기는 했지만 공작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고요. 거기서 뵙는 순간 솔직히 천사가 오신 줄 알았어요. 어떻게 저렇게 온후하고 자비로운 분으로 크셨을까? 앞으로는 성에 뼈를 묻으려고요. 죽기 전까지 공작님을 모실 거예요.”
“……마음대로 해.”
“질투는 하지 마세요! 제 충성심일 뿐이니까. 보상이나 이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아아, 그냥 평생 무급으로 지내도 공작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러던가.”
“예전에는 이런 분이 되실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둘은 잠시 침묵했다.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른트는 잠시 성을 올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예전에는 이상하고 무서운 분이셨고.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정상과는 동떨어지신 분이라고 해야 하나.”
“…….”
“범인(凡人)은 아니셨죠. 성에 오신 이후 갑자기 바뀌셨어요.”
그 말에는 레안드로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문득 레안드로스는 아른트의 동그란 머리를 바라봤다.
그에게도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공작부인이 자신에게 은밀히 부탁한 일을 공유해야할까?
그 숲에서, 그와 아렌하이트와 죽은 공작부인밖에 모를 일을?
아마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아무리 전 공작부인의 유언이 있었다고 해도 그런 짓은 금기시 된다.
아른트에게 말해봤자 아렌하이트를 향한 존경심을 훼손할 뿐이었다.
그러니 말하지 않는 게 옳은 일인데.
레안드로스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성의 2층에서 안뜰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야외식 복도에서 외침이 들렸다.
“아른트!”
아렌하이트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하게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아른트는 당황해서 바로 그 앞까지 달려갔다.
“공작님, 위험하세요!”
“혹시 우리가 여길 비운 사이에 누가 왔다 갔나?”
“네? 손님이라고는 어제 남작과 그 병력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안에 들어왔었어?”
“아무래도 성에 아무도 없는지 수색은 하지 않았을까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아렌하이트는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른트와 레안드로스는 서로를 쳐다봤다.
“도난품이 있었나?”
“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뜻모를 일을 벌이는 건 똑같군.
레안드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빨래통에서 내려왔다.
아무래도 무슨 일인지 살펴봐야겠다.
* * *
이제까지 살면서 기분이 더러웠던 적은 많다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친다거나, 부장이 나에게 슬쩍 업무를 떠넘긴다거나, 성과를 남에게 뻿긴다거나.
하지만 이 순간 정정한다.
진짜 기분이 더러운 건 내 물건을 두 눈 뜨고 뺏겼을 때다.
“책을 도난당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정확히는 공작부……. 아니, 우리 어머니의 책을.”
내가 그림을 넘어가 도착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빛이라곤 하나도 들지 않고, 습기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마감만 마친 공간.
방의 한 가운데에는 서서 읽을 수 있는 독서대가 있었다.
독서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구겨지고 찢긴 페이지 외에는.
누군가가 직접 쓴 글씨는 많이 흐려져 있었다.
그 페이지를 본 순간,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페이지가 붙어 있던 책.
분실한 책에는 그만한 가치와 위험성이 있었다.
“혹시 두 사람 중 어머니의 서재에 들어가 본 사람 있어?”
레안드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간 적은 있습니다만.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혹시 벽에 걸린 커튼…… 남색 어두운 커튼 있잖아. 그걸 봤어?”
“예, 기억납니다. 늘 벽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 너머에 있던 그림도?”
조금 기대했지만 레안드로스는 이번만큼은 고개를 저었다.
“전 공작부인께서는 커튼을 걷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방금 공작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그림이 걸려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훼손한 것도 책을 가져갈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나도 방에 들어갔을 때는 거기에 그림이 있는 줄 몰랐으니까.
그 그림의 위치, 그림의 역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텐데.
상식적으로 아놀드 남작은 아니었다.
분노로 날뛰는 사람이 방을 뒤지고 비밀문을 발견할 만큼 치밀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럼 범인은 하나지.
“유릭 이 엿같은 새끼.”
마음이 조급해졌다.
유릭이 그걸 어떻게 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왕성에 달려가서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동부, 왕성, 남부.
동부로 안 가려고 했다가 아른트 때문에 가야만 했는데, 내 발로 왕성에?
스스로 이전 회차의 루트를 착실히 밟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책을 되찾을 수 있지?
머리를 쥐어뜯던 내게 레안드로스가 물었다.
“긴급한 사안이라면, 서둘러 남부로 가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뭐?”
내 죽을 자리로 빨리 가버리라고?
미친 사람 보는 눈으로 레안드로스를 보자, 그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세자와 도난품이 연관이 있다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공작님께 맡긴 일이 있으니, 남부로 가셔서 왕세자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
“굳이 공작님께서 왕성으로 가지 않으셔도, 그가 남부로 올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왕세자는 엉덩이가 무거운 이는 아니니까요.”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지능이야!
눈앞의 일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릭은 내게 자신도 남부로 갈 거라고 말했었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지?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지체할 것 없이 지금 당장 남부로…….”
-투둑.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얼굴로 쏠렸다.
인중과 턱을 타고 흐르는 뜨듯미지근한 액체.
문질러 닦으니 손등이 온통 빨갰다.
레안드로스는 말이 없는 나를 앉히고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해 콧대를 지압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부로 가시기 전에 충분한 조치가 필요하겠습니다.”
왜 하필 지금 같은 타이밍에 터진 거지.
젠장.
침실에 끌려간 나는 누워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른트가 보양식을 내내 만들어왔지만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조금 먹고 몰래 토하고의 연속이었다.
내가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있는 동안 두 사람은 남부 여행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돈이 충분해서 준비도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둘은 나를 위한 작은 마차까지 마련했다.
한 번 봤는데 바퀴는 두 개, 지붕은 있지만 앞면이 트여 있어 관광용 마차처럼 보였다.
마부 자리는 마차의 뒤쪽 상단에 마련되어 있었다.
마차는 튼튼하게 짜여 있는 데다가 도색도 제대로 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무심코 ‘와, 나 진짜 귀족 같다.’고 말하니 아른트가 옆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까지 저희가 돈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이제부터는 아무 염려 마세요. 정말 잘 모시겠습니다.”
그거 어쩐지 없는 살림에 품 팔아가며 키운 자식이 대형 로펌에 들어가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선물 잔뜩 사주면서 하는 소리 같은데.
눈물을 찍어내는 아른트를 본 이후로 앞으로는 발언에 자중하기로 했다.
애 앞에서는 물도 맘대로 못 마신다더니, 진짜 그 짝이네.
그렇게 열흘이 넘게 지났다.
남부로 떠나는 날 새벽부터 아른트는 분주했다.
직접 목욕통에 끓인 물을 부어다 나르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약 냄새가 나는 약초다발 묶음까지 넣었다.
내 아랫배는 흉터도 없이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다 씻고 난 후에는 새 옷을 걸쳤다.
몸에 꼭 맞는 셔츠, 허리끈, 조끼, 길고 두터운 망토와 편한 바지, 새 신발과 하얀 장갑 한 켤레.
뭐든 가볍고 감촉이 좋은 게 확실히 돈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을 꾸미라고 했는데 정작 내 옷만 엄청 샀네. 흰 장갑은 쉽게 더러워질 것 같지 않아?”
“공작님, 저는 그 장갑만 다섯 켤레를 들고 갑니다.”
“다른 옷도……?”
“당연하죠! 공작님 전용의 옷상자도 샀는걸요.”
“그 정도로 많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른트가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잘 풀고 있다는 건 알겠다.
아른트도 수도에서 남작가를 방문할 때 입었던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보기 좋네.”
그 말에 아른트가 헤죽 웃었다.
그는 치장을 마친 나를 위해 공손하게 문을 열어주었고, 밖에는 레안드로스가 경갑을 입고 번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공작님.”
지난 삶에서 성을 처음 떠날 때는 어땠더라.
다들 굶주리고, 혼란스러워서 예민해져 있었지.
성의 황폐한 내부는 그대로였지만 옷을 다르게 입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무너져가는 이 성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른트가 호언장담을 했으니 잘 꾸며진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볼 수 있을까…….
활짝 열린 성문의 앞에는 말과 검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에는 갈색 말이 매여 있었다.
아마 성질이 온순하니 마차를 끌도록 배정한 모양이었다.
“마차가 가벼워서 한 마리로도 충분할 겁니다. 짐은 검은 말이 끌게 될 것 같습니다. 마부는 제가, 검은 말은 레안드로스 경이 탈 예정입니다.”
레안드로스의 의견이니 문제 없겠지.
나는 레안드로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내가 계단을 밟아 오르자 뒤에서 아른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아! 가만히 있어!”
-히이이잉!
검은 말이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짐수레를 이으려는 아른트를 피해 마구 뒷발질을 하고 위협적으로 이를 딱딱거렸다.
그러더니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갈색 말에게 다가가서 주둥이로 마구 쥐어박기까지 했다.
-푸르르륵.
누가 봐도 건방지게 투레질을 하는 모습에 다들 아연히 볼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러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아까까지는 얌전했는데요. 뭔가 마음에 안 드나?”
앞발을 피하는 갈색 말의 자리에 들어가려는 듯 온 몸으로 갈색 말을 밀어내는 검은 말 덕분에 짐수레에서 짐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른트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공작님, 미쳤나봐요! 얘는 가까운 마을에서 내다 팔까요?”
“아니, 잠시만 있어봐.”
가지가지 하는 검은 말에게 다가가자, 말은 몇 번 다그닥거리며 발을 구르더니 내게 대뜸 주둥이를 내밀었다.
-푸르릉.
나한테 코며 머리를 비벼대며 무언의 호소를 하는 놈의 갈기를 쓸어주다가 물었다.
“말의 위치를 바꾸지 그래?”
“하지만 저 말은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공작님. 제가 마부석에 타면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아른트는 방금 제 머리를 뜯어먹을 뻔한 말을 흘금거렸다.
말은 빨간 눈을 순진하게 깜박거리고 있었지만, 아른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른트에게 수도 관문에서 만났던 대머리 경비병의 비극을 안겨줄 필요는 없다고.
결국 전체적으로 포지션을 재조정 해야하만 했다.
마부석에는 레안드로스가, 그리고 짐말에는 아른트가 오르는 걸로.
말의 위치를 바꾸자, 검은 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섭게 얌전해졌다.
하여간에 똑똑한 놈이라니까.
동부에서 냉큼 레안드로스에게 달려간 것도 그렇고.
“출발하겠습니다, 공작님.”
마차가 느리게 움직였다.
한 치 앞길을 알 수 없는 남부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