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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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이 바다로 되돌아가고 난 이후 날이 밝자마자 왕성에 편지를 보냈다.
관문을 넘을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뭐.
왕성으로 보내는 긴급 전보라는데 간 크게 막아서진 않겠지.
유릭이 시간에 늦으면 남부는 전멸할 테고.
그 책임은 관문을 봉쇄한 영주에게 있겠지.
어쨌든 내 잘못은 아니거든?
그렇게 우리는 뜻밖의 휴식 시간이 생겼다.
유릭이 남부에 등장하는 시간이자, 인어와의 거래 데드라인이자, 또 모처럼 얻은 공백 기간.
원래대로라면 남부의 멋진 해안선을 따라 놀러갈까 생각했지만.
“……아직 화났어?”
“화 안 났습니다.”
“레안드로스, 너도 아직까지 여전해?”
“…….”
이쪽은 대답조차 해주지 않는군.
우리는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에리히의 오두막을 빌렸다.
에리히는 그 사건을 목격하고 나서 우리 셋 사이의 분위기를 직감한 듯, 자신은 친척집에 가서 자면 된다며 도망갔다.
결국 이 오두막에 남은 건 아른트, 레안드로스, 그리고 나뿐.
“저기,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그리고 둘은 나를 완벽하게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아른트는 집을 청소하고, 요리를 하고, 침대를 깨끗이 정돈하고 환기를 시켰다.
레안드로스는 어디선가 숫돌을 구해와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감히 시종이나 호위기사가 모시는 공작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냐,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건 맞지.’
내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를 만지며 생각했다.
인어와의 거래로 넘겨준 눈.
꼭 필요했다고 하지만 두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해 버린 건 나다.
그러니까 나는 무시당한다고 화를 낼 자격도 없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 또 뭐더라.
나는 전투적으로 냄비를 휘젓고 있는 아른트를 보다가 슬쩍 밖으로 나섰다.
밖은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오두막은 바다 풍경을 보기 딱 좋았다.
집 뒤에 매어둔 말 두 필 중에서 검은 말의 고삐를 풀었다.
“밥 먹으러 가자.”
-히히힝.
“많이 안 달려서 답답하지 않고?”
-푸르르륵…….
“신물 나오도록 달렸으면서. 산맥을 넘은 경험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검은 말은 껑충거리면서 루비같은 눈을 빛냈다.
우리는 그렇게 산들바람이 부는 길을 느긋하게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 풀밭이 여기저기 있었다.
이곳으로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모양이라 마음 편하게 검은 말을 풀어줄 수 있었다.
말은 달리는 게 아니냐는 듯 아쉬운 눈을 하고 천천히 땅의 풀을 골라 먹었다.
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바다를 내려다봤다.
“몰랐는데 어인이랑 이야기가 가능하더라.”
-푸륵.
“너랑도 묘하게 말이 통하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야?”
말은 풀을 씹다가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한참 서로를 보다가 외면했다.
그런 건 좀 묻어두자는 마음까지 통한 모양이었다.
그래, 네가 마수면 어떻고 아니라면 또 어때.
적어도 너는 나를 잡아먹진 않잖아.
한가하게 흐르는 구름.
맑은 하늘에 내리쬐는 부드러운 볕.
아직 욱신거리는 오른쪽 눈.
빛나는 파도를 삼키는 푸른 물결.
멸망과는 하등 관계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한때.
폭풍전야의 낮.
등을 따끈따끈하게 데우는 햇빛에 몸이 나른해졌다.
그러다가 조금 덥다 싶어질 때,
누군가가 내 머리 위로 하늘하늘한 천을 떨어뜨렸다.
“남부 햇빛은 강해서 피부에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딱딱한 어조가 꼭 어디 사는 기사를 닮았네.
나는 옆에 풀썩 앉는 아른트를 흘금거렸다.
“화가 풀린 건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나가셔서 한참 안 오셨잖아요.”
“얼마 안 지났는데?”
“그거나 그거나!”
“……?”
아른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도록 해야겠다.
덮어준 천을 꽁꽁 싸매자 햇빛이 차단 되어서 한결 나았다.
우리는 한참 바다를 구경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아른트였다.
“뭔가 계획이 있으셨죠?”
“응?”
“그 눈 말이에요. 어인이랑 하셨던 이야기도 그렇고.”
“그렇지 뭐. 무모하게 덥석 준 건 아니었어.”
눈이 백 개나 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막 주겠니.
하지만 아른트는 무릎을 세워서 제 얼굴을 파묻었다.
“아뇨, 무모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공작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셔도, 저는 그렇게 느꼈다고요. 공작님의 생각을 저는 몰랐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아른트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른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말해주시면 안 돼요?”
“나는.”
“레안드로스 경이랑 무슨 논의를 하셨는지는 몰라도, 저한테도 말 좀 해주시면 안 되나요? 전부 말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른트.”
“수도에 가서도, 아놀드 남작가에 갔을 때도 그러려니 했었어요. 공작님께서 말을 안 하시는데 제가 여쭈어볼 권리는 없죠. 집사장도 아니고 한낱 시종이니까. 그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쭈지 않았어요.”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른트는 계속해서 토로했다.
“동부에 와주셔서 기뻤습니다. 공작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해 주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놀드 남작을 하르트만에서 만났을 때, 저 때문에 왕세자의 거래를 받아들이셨으면서 저한테는 아무런 책망도 않으시고.”
“그건 네게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그래도 최소한 혼자서 결정하시지 않을 수는 있었잖아요. 저희가 들었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었잖아요.”
말문이 턱 막혔다.
그야, 유릭은 아른트나 레안드로스가 덤빈다고 해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이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당연히 빙의자인 나였고.
하지만 아른트에게는 완전히 다른 문제로 다가간 것 같았다.
“제가 멍청한 건 저도 알아요. 감히 레안드로스 경이나 공작님께 비할 바는 못 되겠죠.”
“그런 게 아냐, 아른트.”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말해주실 수 없는 건가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지도 모르고, 그냥 계속 이렇게 공작님만 따라다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꼭 폐만 끼치고, 계속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른트의 말이 점점 잦아들었다.
무릎에 묻은 얼굴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른트는 계속해서 말해왔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자신의 역할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른트는 최선을 다해왔다.
도망치고, 연기하고, 기대하고, 내게 알려주고, 뭐든 열심히 해서 마주해 왔는데.
죄책감이 다시 나를 짓눌렀다.
아른트의 말이 맞았다.
레안드로스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의 조력이 가장 급했기 때문에.
그래서 레안드로스에게만 이야기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로 했다면.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 나는 아른트에게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됐다.
우리는 하르트만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니까.
뭘 이야기해줘야 할까.
뭐부터 말을 하는 게 좋을까.
한참동안 생각한 끝에 가장 처음 나온 말은 딱 한마디였다.
“미안해.”
“…….”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간 계속해서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 급해졌던 것 같아.”
“…….”
“게다가 여러 가지 심각한 일이 얽혀 있었거든. 너희가 알고 나면 부담에 시달릴 것 같아서 계속 미뤘어. 사실 내 맘 편하자고 한 짓이지.”
“내가 잘못한 거야. 미안해.”
반성하자, 유예성.
네가 인간쓰레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하자 아른트는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에 눈가가 새빨개져 있었다.
“말하기 싫은 건 안 말해주셔도 좋은데, 그래도 제가 알아야 할 건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머리는 나쁘지만 기억은 잘 하니.”
“너 머리 안 나빠. 너 아니면 누가 재정을 책임지겠어.”
그건 레안드로스도 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안드로스는 그냥 금전 감각이 덜하고, 나는 금화와 은화와 동화의 가치를 짐작하지 못해서.
그 말에 아른트가 겨우 웃었다.
나는 아른트의 등을 두드려줬다.
“앞으로는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할게. 가끔은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적어도 레안드로스와 차별을 하진 않겠다고 약속할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경에게만…… 아니, 아닙니다.”
“……진짜 미안해.”
“괜찮습니다. 공작님께서 시종에게 사과하시는 걸 보면 다들 비웃을 거예요.”
“비웃으라지 뭐.”
아른트는 흘러내리고 있는 천을 다시 꼼꼼하게 여며 주었다.
“그래서 이제 말씀하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마땅한 이유가 없진 않으시겠죠. 인어와 무슨 거래를 하셨어요?”
“거기부터군.”
어디 보자, 뭐부터 말하지?
죽었다가 깨어났을 때 레안드로스에게 뭐라고 했더라.
아, 맞다.
“우선 나는 유릭을 없애고 싶어서,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
“아른트? 왜 그래? 아른트?”
침묵이 이어졌다.
아른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아른트의 눈을 보니 내가 너무 거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
아른트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걸 지금 와서야 말해주시면 어떡합니까!”
* * *
“대체 밖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별 말 안 했어. 진짜야.”
저녁 식사 자리는 완전히 살얼음판이었다.
아른트는 레안드로스에게도 분노의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그 덕분에 레안드로스가 나에게 말을 걸 지경이었다.
우리는 서로 소곤거리면서 아른트의 눈치를 봤다.
아른트는 수프를 퍼먹으려는 건지 그릇을 부수려는 건지 모를 정도로 동작 하나하나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레안드로스도 가끔 아른트를 보고 있었다.
-탁.
투박한 나무 스푼이 테이블에 부딪혔다.
레안드로스와 나는 얼어붙어서 눈만 굴려 아른트를 흘금거렸다.
“……그렇게 눈치 보지 마세요!”
“아니, 하지만 화났으니까 그런 거지.”
“화 안 나게 생겼어요? 저는 이제까지 공작님께서 그런 중대한 목표를 숨기고 계셨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미, 미안.”
화난 아른트는 화난 레안드로스보다 세 배는 무섭구나.
아른트는 다소곳하고 공손하게 자세를 고쳐앉은 나를 보다가 한숨을 길게 뱉었다.
“그래서 어쩌실 작정이세요?”
“앗, 넵. 그러니까.”
“넵?”
“아니, 아니. 그러니까.”
긴장하니까 존대가 막 나오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움직이며 말했다.
“유릭이 해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오는 게 중요해.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할 건 세 가지.”
“세 가지?”
“첫 번째, 유릭이 가져간 하르트만 가문의 서적에 대해 알아내는 것. 두 번째, 유릭의 ‘사업’이 어디까지 있는지에 대해 알아내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세 개가 모인 컵.
스푼으로 컵을 살짝 치자, 안에 담긴 물에 파문이 일었다.
“살아남는 거.”
“살아남는 거…….”
“아까 설명했지만, 동부와 남부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의 원인 제공자는 왕세자라고 봐도 무방해.”
“왕세자인데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안 믿겨요.”
“유릭에게 중요한 건 왕세자의 직위가 아니야. 그보다 중요시하는 게 있을 거야.”
그에게도 의지는 있겠지.
레안드로스는 묵묵히 그릇을 비워낸 후에 입을 열었다.
“어인과의 거래는 어떤 내용입니까?”
“해저에 잠든 걸 깨우는 거. 어인들은 동족까지 바쳤지만 뭔가 부족한가봐.”
“그래서 눈을 내어 주신 겁니까?”
“왠진 모르겠지만 그걸 바라더라고. 유릭에게서 책을 돌려받고 죽일 수 있다면 나에게는 오히려 이득인 셈이지.”
“대체 그 책에는 뭐가 쓰여 있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말하기가 좀 그래.”
레안드로스는 내 말에 착잡한 모양이었다.
아른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든…… 그거? 그게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동부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지. 그러니 방법이 필요해.”
동부처럼 남부에서도 검은 흙이 창궐한다면?
동부는 그나마 황무지라는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남부의 해안가는 흙이 덮친다면 그대로 휩쓸리고 말 것이다.
인명피해가 극심할 게 뻔한 일을 그냥 추진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답답한 가운데 아른트가 말했다.
“그 해구는 어디에 있는 건지 여쭤도 됩니까?”
“먼 바다 아래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어인들이 관리한다고 하니까.”
“거기에서 잠들었던 뭔가가 일어나는 거죠?”
“시기를 앞당기는 거지.”
“공작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그 진흙에 닿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했어요. 혹시,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아른트는 망설이다가 마지막을 뱉었다.
“해구 바로 위에 가기만 해도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네?”
해구가 충분히 멀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뭍에 도달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겠지.
적어도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부 도시를 관할하는 영주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지경까지 되면 나서지 않을 수 없을테고.
설령 나몰라라 한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슬슬 우리 장원에도 영지민을 꽂아 넣을 때가 됐지?
“아른트, 식사 끝나면 에리히 좀 찾아봐.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른트는 ‘네!’ 하며 바로 일어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리히도 한 역할 맡게 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