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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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 늙은이가 해야 할까요?”
“그럼 제가 할까요? 모른 척하셔도 소용없어요. 어제 저희가 말하는 거 다 들으셨잖아요. 지금도 존대로 바꾸셨으면서.”
에리히는 죽상으로 갈색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정심은 하나도 안 생겼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어떻게 뱃사람들 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온다고 하라는 겁니까! 저는 어인학자입니다, 어인이요!”
“바다나 어인이나. 학자는 학자잖아요? 효과 있을 것 같으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빨리 안 가면 밤새도록 달리셔야 할 걸요.”
내가 에리히에게 시킨 건 여론전이었다.
해안 마을은 바다의 기상 변화에 민감했다.
기상의 변화가 곧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큰 파도, 풍랑, 폭풍 같은 것들.
뱃사람뿐만 아니라 마을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사람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겠지.
그럼 대피 권고도 훨씬 더 잘 수용할 거고.
하지만 에리히는 그런 사기를 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리 학자라고 해도 분야가.”
“빨리 가세요. 마수에 미쳐가지고 일국의 공작을 미끼로 썼다고 소문내고 손수 죄를 묻기 전에.”
“하지만!”
“도망가면 제 기사가 손수 모셔올 테니 그렇게 아시고요. 하긴, 남부는 봉쇄당했으니 도망가도 거기서 거기겠지만.”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게 누가 덥썩덥썩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래?
에리히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가 빌려준 말을 타고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나는 아른트에게로 돌아섰다.
“아른트.”
“네, 맡겨만 주세요.”
아른트는 반대로 검은 말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말은 아른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자꾸 땅을 발굽으로 파고 있었다.
나는 성질을 부리는 말을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주의사항을 되새겨줬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다시 말할게. 관할령의 관리인을 거쳐서 영주에게까지 이번 일의 심각성을 알리는 게 중요해.”
“네.”
“유릭이든 나든,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도 좋아. 돈으로 회유해도 좋고, 다른 걸 걸어도 돼. 나중에 뒤처리는 내가 할 수 있을 테니까.”
“네!”
“그리고 영주의 인장과 함께 사람들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것까지. 하지만 거기서 가장 중요한 건 네 안전이야.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가.”
“명심하겠습니다.”
아른트는 든든하게 말하고 말에 훌쩍 올라탔다.
검은 말도 약간 들썩이기만 하고 아른트를 떨구진 않았다.
둘 다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른트를 두 번째 주자로 보내고 난 후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레안드로스가 물었다.
“제게 시키실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 당장은 없는데.”
“경계를 강화할까요.”
“굳이? 자객을 보내진 않을 것 같아.”
묘하게 붕 뜬 느낌이었다.
레안드로스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안드로스는 공작부인이자 아렌하이트의 어머니를 지독하게도 섬겼다.
하르트만의 일원들이 줄줄이 잡혀갔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유릭을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들뜬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경계를 서도 좋지만, 먼저 머리 좀 식히고 오는 건?”
“…….”
“흥분하면 뭐든 잘 안 되는 법이잖아. 산책이라도 하다 와. 나는 한숨 잘 테니까.”
“예.”
물론 진짜 산책을 하러 가진 않을 것이다.
나는 문 앞에서 보초를 서기 시작한 레안드로스를 지나쳤다.
온갖 생각을 했더니 피곤하고 졸렸다.
지금 나에게 당장 필요한 건 긴 휴식이었다.
* * *
한 사람이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날씨는 청명했지만 밝은 기운은 미처 실내까지 파고들지 못했다.
걷는 이의 얼굴에는 흐린 빛만 번지고 있었다.
도기같이 하얀 얼굴.
신이 정성을 다해 섬세하게 빚은 이목구비.
옅은 색의 흐린 금발은 한쪽으로 단정하게 묶어 어깨 앞으로 내리고 있었다.
일견 병약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검은 정복과 복잡하게 꼬인 끈, 견장에서 늘어뜨린 금색 술은 평상시 정무를 볼 때 입던 옷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공적인 장소로 갈 때나 입는 옷 같았으니.
남자가 멈춘 곳은 왕의 침실 앞이었다.
침소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남자를 보자 예를 갖추었다.
남자는 병사들의 인사를 한 손을 드는 것으로 막아내고 바로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이라고는 하지만 내부가 지나치게 어두웠다.
쿰쿰한 공기에 짙은 향내가 배어 있었다.
남자는 텅 빈 침대를 지나, 유일하게 가려지지 않은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마치 좋은 날씨를 감상하려는 것처럼 놓인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노쇠한 이가 앉아 있었다.
머리는 백발이 된 지 오래였고, 그조차 드문드문 빠졌다.
얼굴에 무성한 검버섯이 노인의 나이를 증명했다.
남자는 노인을 보다가, 그 손에 들린 황금 잔을 들여다봤다.
“이런. 미처 다 드셨다 말씀 주시지 않고.”
남자는 옆에 있던 황금을 두른 유리 주전자를 들었다.
그 안에는 맑은 황금색 액체가 그득했다.
황금 잔 안에 채워지는 음료에서부터 달콤하고 짜릿한 향기가 풍겼다.
“제가 불효를 하게 되지 않습니까. 어서 드시죠.”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그 눈은 흐려진 지 오래였고, 이 세상에 정신이라는 게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거기서 굴하지 않았다.
그는 노인의 손에 잔을 쥐여 주고 마실 수 있도록 도왔다.
음료가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반은 넘어가고 반은 턱으로 줄줄 흘러내렸지만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했다.
“이렇게 직접 먹여드리는 효자 중의 효자가 또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입에 잘 맞으시죠?”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흐른 액을 닦아준 남자는 뒷짐을 지고 창문을 바라봤다.
그의 양부이자 일국의 왕인 노인은 아무래도 곧 오늘내일하지 싶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대역을 세워야 할 텐데.
남자는 허심탄회하게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혹 마음에 드시는 후계가 있으십니까? 물론 지금 계시는 곳에서는 여기를 보시지 못하시겠지만.”
아니면 여기는 신경 쓸 틈도 없으려나.
아무래도 다른 차원에서 여러 가지를 보다 보면 이런 사소한 일은 뒷전이 되기 마련이니까.
남자는 노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지만 10년은 더 살아계셔야 합니다. 지금 새끼를 치려니 좀 바빠서요.”
잠시만, 인간은 몇 달간 새끼를 품었더라.
3년이던가? 아니면 더 짧았던가?
지금 새끼를 배게 시켜도 3년은 더 걸리나?
남자는 갑작스레 찾아온 현실적인 고민에 한숨을 쉬었다.
“양자는 이렇게 동분서주 바쁜데, 양부께서는 편하게 다른 곳으로 떠나계시니 서럽습니다. 그게 더 편하실 수도 있지만요”
노인의 목구멍에서 끔찍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연이었지만, 마치 그 소리는 남자의 말에 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는 미소 지었다.
“불만은 없으시잖습니까. 얼마나 흥미진진한 걸 보고 계시기에 그리 즐거워하시는지. 아, 저는 괜찮습니다. 사양하죠. 오래전에 다 본 것들이라.”
확실히 흥미진진하기는 했다.
인간이 가진 정신력의 허용치를 넘기는 하지만, 한 번 미치면 그때부터는 흥미진진할 거다.
남자는 계속해서 노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스치는 머리카락에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늠름한 청년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폭삭 늙어버렸는지.
그때는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 수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 했던 생각이 난다.
물론 지금은 닮았다는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늙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이로만 따지면 몇 대손인지도 잘 모르고, 단순히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대타에 불과한 존재.
그게 바로 이 노인이었다.
남자는 손을 뗐다.
갑자기 감상이 유치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이렇게 감상에 젖을 수 있던 건 아마 오늘 아침에 도착한 편지 때문이겠지.
남부의 하르트만 공작으로부터 도착한 서신.
어인과 접촉했으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 원하던 바를 이루어 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직접 오셔서 확인해 보라는 이야기까지.
아무래도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 보다.
대체 거기서 뭘 했을까.
자기 팔이라도 잘라서 던져줬나?
아무래도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지.
남자는 조금 즐거워졌다.
마침 하르트만이 뒤에서 뭘 그렇게 쑤석거리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다가 빌미가 생겨 들른 하르트만 공작저에서는 뜻밖의 수확물도 챙길 수 있었고.
게다가…….
남자는 자신의 집무실 서랍 안에 있는 낡은 책을 상기했다.
하르트만은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던 거지.
남자는 간만에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처럼 가볍게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껏 가지고 논 인간은 빨리 죽어버리니까.
자중 좀 해야지.
남자는 침실을 나서기 전까지 활짝 웃고 있었다.
물론 병사들이 볼 수 있는 건 비통하기 짝이 없는 슬픈 노인의 표정뿐이었다.
정신을 놓은 왕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며 제발 일어나시라 비는 불쌍한 왕세자.
정무를 도맡으면서도 왕위에는 절대 닿을 수 없는 비운의 계승자.
궁의 모든 이들은 유릭 덴 메나디아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릭은 발걸음을 재촉해 제가 머무는 궁으로 돌아왔다.
하인들을 죄다 물린 그는 한결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옷이 하나씩 떨어지고, 그의 맨 가슴팍 위에서는 검은색의 길쭉한 돌이 달린 목걸이가 달랑거렸다.
하얀 백지 위에 떨어진 잉크처럼 이질적인 기운을 띠는 조각.
유릭은 돌조각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입에 갖다 댔다.
휙,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유릭이 셔츠를 집어 들어 걸쳤을 때는 이미 방 안에 거대한 검은 준마가 서 있었다.
말의 눈동자가 지옥불처럼 뜨거운 붉은색으로 빛났다.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주인의 명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말은 유릭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늘씬한 검까지 허리에 찬 유릭이 습관적으로 말의 콧잔등을 쓰다 듬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도 같은 걸 가지고 있었지. 어때, 비야키. 동족을 만나니 반갑든?”
말은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본래대로라면 제대로 소환해 길을 들여야 하는 이계의 존재일 텐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니.
이번 하르트만 공작은 재주도 참 좋지.
유릭은 답지않게 킥킥 웃다가 안장도 없이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는 유쾌하게 외쳤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빠르게 갈까. 괜히 ‘친척들’ 눈에 띄고 싶진 않아.”
악마의 눈을 가진 말이 앞발을 치켜들고 길게 포효했다.
불길한 말과 기수는 벽을 향해 힘차게 돌진했고,
다음 순간에는 방 안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