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57
(56)
“만찬은 생각보다 고역이구나.”
“어제는 별로 안 드셨으면서 그러십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속이 안 좋아.”
내 몸은 보름이 넘는 기간 사이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말해서 식사를 전혀 못 하는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이든은 사업에 대한 논의를 이참에 하고 싶다면서 하르트만 성에 꽤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손님방도 다 정리를 끝낸 마당에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협상을 할 수 있다면 나야 환영이었고.
하지만 문제는 매일 저녁의 만찬이었다.
귀족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방식을 몰라서 아른트에게 전부 일임해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참사였다.
아른트는 아이든의 성의가 마음에 들었는지 매일 저녁 성대한 만찬을 올렸다.
포도주를 포함한 음료 종류만 6가지.
식사는 겹치지 않는 재료로 조리한 해산물, 육붙이, 가금류 요리를 6~9가지.
끝나면 후식 명목으로 각종 단 것들을 여러 개.
나중에는 보기만 해도 질리더라.
게다가 나는 성주라서 꼭 함께 식사를 들어야만 했다.
“아이든이 가져온 선물은 다 풀어봤어?”
“아뇨, 마차로 가져온 것도 있어서요. 다 풀어보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용케 그런 식사를 올리네.”
“전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공작님.”
아른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우후후, 하고 웃었다.
멀끔해진 공작부인의 집무실에서 아른트는 내게 음료를 따라주고 있었다.
원래라면 공작의 집무실을 써야 했지만 여기가 훨씬 더 익숙한 탓에 내 집무실은 여기가 되었다.
어차피 공작부인의 집무실이 좀 더 크기도 했고.
……사실 공작가의 실세는 공작부인이 아니었을까?
“공작님, 에이슬링님이 오셨습니다.”
새로 고용한 시종이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른트는 목을 가다듬고 위엄 있게 말했다.
“안으로 안내해드려라.”
집무실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아이든은 최근 개운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쭉쭉 치고 나가는 게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줬다.
“좋은 오후입니다, 공작님. 오찬에 뵙지 못해 유감스럽습니다.”
“그대도 좀 편히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어차피 늘 저녁에는 함께하잖나.”
“공작님의 식사량이 유독 적으시지 않습니까.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언제나 건강하네.”
죽었다가 살아나면 리셋이 가능하단다.
나는 아이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좀 앉지. 이제 거의 마지막 단계인가?”
“그렇습니다. 최종은 제가 동부로 돌아가야 확정되겠지만 변경 사항은 없을 겁니다. 공작님께서 양측에게 긍정적인 협상을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그대는 입만 가지고 살 수도 있겠군.”
지난 며칠 내내 이어진 논의를 떠올리자 쓴웃음이 나왔다.
아이든은 정말로 타고난 협상가였다.
한 치의 양보나 손해도 없이 치열한 논의를 몇 번이고 거쳤다.
물론 내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현재 왕국의 정세나 상계의 흐름도 몰랐으니.
그나마 3번째 회귀인 데다가, 공작부인의 노트가 있어서 견딘 거다.
나는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고 살폈다.
“산맥 일정 부분의 임대료와 공작령에 속하는 인근 토지 대여 기간 및 대여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지. 그 외에도 치안 유지와 환경 보호 조약을 비롯한 기타 내용도 다 들어갔나?”
“예. 지금 보시는 것은 결정 사항을 전부 기록했습니다. 검토해보시길.”
에이슬링 상단이 단독으로 하는 사업이니 동부만큼 큰 스케일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아이든은 동부에 쌓아둔 물자와 예비 인력을 가능한 활용 하고 싶어 했다.
그것도 다 돈이니까.
“마수의 부산물 가공부터 유통까지 상단의 유통망과 인력을 이용하는 대신 이익금은 각각 5:5, 세금은 상인특별세와 대상단 지원금 적용한 최종 내역으로 일정 비율 납부, 토지 임대료는 반년 단위로 별도 지급. 특약에 계약해지 보조금 내용도 잘 들어갔고, 임대에 관한 것도 다른 건 없고.”
“맞습니다.”
“이만하면 됐네.”
“저, 공작님. 혹시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혹시 추가 논의가 있나? 나 진짜 피곤한데.
아이든은 나를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계약 내용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다만 좋은 생각이 나서요.”
“좋은 생각?”
“이왕 상단의 이름을 쓰는 것이니 새로운 이름으로 물품을 내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통은 장인들이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팔지 않나?”
“맞습니다. 대부분의 유통되는 물건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디켄터 산맥에 거주하는 마수들의 악명은 옛날부터 드높았으니 말입니다.”
아하.
아른트의 제안은 마수 가공품 중에서도 고급화를 노리자는 말이었다.
디켄터 산맥에서 반세기를 산 마수의 피를 사용한 영험한 무기.
제법 네임밸류도 생길 것 같고, 나중에 이걸로 영지가 잘 알려지거나 사람이 유입된다면 나로서는 환영이었다.
“좋네. 이름은 정해둔 게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만. 좋은 이름이 있으십니까?”
“그럼 디켄팅이라고 하는 걸로.”
디켄터 산맥에서 나오는 디켄팅.
나는 그 이름을 서류의 가장 마지막에 적어넣었다.
이 세상에서 첫 마수 브랜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아이든이 신나게 성을 떠난 후, 일은 줄어들었으니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공작님, 야외 조각상 추가 유지 보수 건입니다.”
“공작님, 이번 주의 주방 예산안입니다.”
“공작님, 선물 중에서 보석이 박힌 안장이 있는데 보관처가 마땅치 않아…….”
“공작님, 연회홀에서 촛대가 떨어져서…….”
“공작님, 급한 건이지만.”
“공작님.”
이거 뭐지.
나는 내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서류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집무실은 아예 활짝 열려서 사용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었고, 아른트는 그런 사용인들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나씩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일이 많아?”
“사람이 늘지 않았습니까? 손님도 왔다 가셨고요. 게다가 체면치레는 했습니다만, 아직 성이 완벽한 게 아니라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 나이프를 몇 개 살지에 대한 결정을 내가 해달라고?”
“이 성의 모든 것은 공작님의 소유니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삶에서는 왜 집사와 부집사장이 따로 있었는지, 시종장과 하녀장이 다를 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귀족들의 과시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을 처리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내 어머니도 이렇게……?”
“비슷합니다. 참고로 전 공작부인께서는 바깥일까지 관여하시면서 성을 유지하셨습니다.”
“말도 안 돼.”
9-6으로 일해도 다 못해요.
이거 노동자 인권 침해라고요.
여기에 노동법 없어? 유엔권고는 없는 거야?
아른트는 나를 보더니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 그래도 아직은 자잘한 일뿐이니까요.”
“자잘해? 이게?”
“나중에 가문의 기사단이나 용병도 고용해보시면 그때 지옥이라는 게 뭔지 깨달으실 텐데.”
“…….”
좋아.
내가 아무리 한국에서 블랙기업에 다닌 전적이 있다고 해도 여기에서까지 다니고 싶진 않다.
게다가 여기가 더 심하잖아.
1인 블랙기업의 노동자이자 사장이자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아른트.”
“네, 공작님.”
“시종장 할래?”
“네? 안 됩니다.”
“왜! 내가 누워있을 때는 혼자서 다 해줬잖아!”
“그때는 고용인이고 뭐고 성 내부에서 제대로 기강이라는 게 없었던 시절이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안 됩니다.”
“이유라도 대줘.”
“그야, 제가 일하느라 자리를 비우면 누가 공작님을 지키나요?”
“날 지켜?”
“주간에 레안드로스 경이 성 외부를, 저는 공작님 곁을. 야간에는 레안드로스 경이 침실 앞을, 제가 성 내부를 돌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레안드로스가 그런 말 하지 않았던가.
어디선가 자꾸 암살자를 보낸다고, 뭐 그런 뉘앙스였던 것 같은데.
누가 보내는지는 기억에 없는 걸 보니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넌 검도 못 다루면서.”
“공작님을 지킬 방패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걸 뭐…….”
“그런 말씀 하시지 마세요!”
아른트가 갑자기 버럭 해서 나도 모르게 약간 쫄았다.
잠깐. 생각해 보니 뭔가 좀 이상한데.
“알겠어, 알겠다고. 그런데 주간 야간 그렇게 돌아가면서 지키면 잠은 언제 자?”
“교대하기 전 잠깐씩이요.”
“몇 시간?”
“세 시간?”
……아니다.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레안드로스와 아른트 역시 블랙기업의 일원이었다.
갑자기 일하기 싫어서 아른트에게 몰아주려고 했던 내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죄책감에 쩔은 나를 보던 아른트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공작님께서 소공작이셨을 때부터 이런 일과에 적응했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런 연유가 있기때문에, 제안은 몹시 황송하지만 시종장은 못 되어 드려요.”
“시종장 문제 이전에 인력 부족을 해결해야겠네.”
안 그러면 셋 중 하나가 과로로 쓰러질 거다.
그리고 그건 내가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내가 제일 허약했으니까.
“좋아. 호위 기사를 하나 더 뽑자. 그럼 너도 본업에 전념할 수 있겠지.”
“그러면 좋겠지만, 어떻게 뽑으시려고요?”
“아는 기사 친구 있어?”
“공작님을 따라서 도주범이 된 전적만 없어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레안드로스한테 물어보자.”
그렇게 불려 온 레안드로스는 ‘아는 친구 없냐’는 질문에 즉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수도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을 거 아냐?”
“맞습니다. 하지만 아는 이는 없습니다.”
“말 두 마디 이상 섞어본 사람은?”
“없습니다.”
“묵언 수행이라도 한 거냐고! 그럼 보통 대화를 어떻게 했는데?”
“상대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면 ‘꺼져라’라고 답했습니다.”
“왜 사회에 적응을 못 하는 것처럼 굴었던 건데!?”
“말을 섞을 가치를 못 느꼈습니다.”
“대체 왜!?”
“저보다 약한 이들이었습니다.”
“약하다고 해서 사람을 그렇게 푸대접하지 말라니까! 안 되겠어, 아른트. 그냥 공개 모집하자.”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들 텐데 괜찮으세요?”
“어차피 우린 글렀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운이 따르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결국 우리는 실력 좋은 호위 기사를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처음에 여러 길드에 소식을 전할 때는 살짝 기대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올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키는 얼마나 클까. 좀 성격이 좋은 사람이 오면 좋겠다.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기다린 지 며칠째.
나는 죽은 눈으로 성 뒤편의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탕, 타앙, 퍼억!
-휘익, 촤아악!
“크, 크으윽……. 분하……다……!“
-털썩.
내 옆에 서 있던 아른트가 공허하게 말했다.
“32번째 지원자, 탈락했습니다.”
“……응. 봤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32번 지원자의 앞에는 레안드로스가 서 있었다.
어떤 보호구도 없이, 편한 옷차림만 한 그는 대련용 목검을 한 번 휘두르더니 나를 돌아봤다.
“불합격입니다. 공격이 어디에서 올지 예측도 하지 못하고, 검술은 그야말로 잡기 덩어리. 몸이 단단하지 않고 민첩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설명 안 해줘도 돼.”
“그럼 끝내겠습니다.”
기절한 지원자를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질질 끌고 갔다.
레안드로스는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나는 줄곧 손에 쥐고 있던 모집 공고 게시물을 내려다봤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공고였다.
그러나 그 밑에는 작은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레안드로스, 이 개자식아.
이 세계관에서 누가 널 이기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