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27)
◈ 127화. 한천월의 죽음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시신을 차갑게 매만지며 붉은 피를 닦아낸다.
세가에 남아 있던 팔백의 무인 중 쓰러진 무인의 숫자는 무려 오백.
가솔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칠백으로 늘어난다.
주거지에 난입한 혈교도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와 여인, 일꾼들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눈앞을 붉게 물들인 시산혈해의 참상.
당가의 무인들은 참담한 마음을 안고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먹먹한 하늘에서 쏟아내는 비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당조의 가슴을 후벼판다.
“…….”
그의 심정을 익히 아는 자소가 천천히 곁으로 다가갔다.
“괴로운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아네만 지금은 지체할 시간이 없네. 당장 떠나야 해.”
“떠나다니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당가는 사천맹에서 너무 가깝네. 일단 식솔과 부상자들을 숨기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우리와 함께 가세.”
“그 말씀은…… 사천맹이 무너질 거란 말입니까?”
자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와 당가가 당하고 청성이 무너졌네. 사천맹이 끝나는 건 시간 문제야.”
“사태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렇네. 모두 진공자의 생각일세.”
무너지는 당가에 나타나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킨 은인.
그가 아니었더라면 가솔들의 처절한 절규가 아직도 당가의 하늘을 울리고 있을 것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당조는 조금 전의 전투를 떠올렸다.
‘혈야광인 다섯 구에 본가의 장로 스무 명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천맹의 정무원도 그들을 막아낼 순 없을 것이다.’
상대를 익히 아는 지금 쓸데없는 고집으로 가족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마도림이라. 역시 마도림인가.’
사천제일세 마도림.
명가의 부활을 견제하고자 뭉친 사천맹이 되려 구원을 받고 있다.
당가의 입지를 지키고자 아등바등하던 세월이 헛되이 느껴지자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우린 대체 무엇을 위해서…….’
당조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존폐의 기로에 선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조금 전 보여준 진무립과 부하들의 신위라면 충분히 미래를 걸어볼 만하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사람의 목숨과 수백 년간 축적된 무공비급뿐.
당가의 모든 무공이 머리에 들어있는 이상 굳이 무거운 서책을 들고 갈 필요는 없다.
그는 즉시 무인들에게 비급을 태우라 명했다.
그리곤 식솔들에게 간단한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분주한 움직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진무립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준비는 됐습니까?”
당조는 진무립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눈앞에 선 사내는 아들과 같은 또래의 젊은 후기지수가 아닌, 당가를 멸문지화에서 구해준 은인이었다.
“인사가 늦었소이다. 오늘의 도움은 절대 잊지 않겠소. 은공의 은혜는 본가가 무림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날까지 대대손손 기억할 것이오.”
“인사는 나중에 나눌 시간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사천맹의 무인들을 구출해야 할 시간입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무인들을 소집하겠소.”
“혹시 아미와 연결된 전서구가 있습니까?”
일반적인 전서구는 띄워놓는다고 알아서 목적지로 가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훈련을 시켜야만 제대로 날아간다.
당조는 돌아서다 말고 진무립을 바라보았다.
“물론이오.”
진무립은 자소에게 말했다.
“사태. 아미도 이곳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자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도 그게 걱정이라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선 배후의 안전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연락을 취해 그들을 여러 길로 나누어 중경으로 보내십시오. 당가의 식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경으로?”
“그곳엔 중소방파의 식솔들이 있습니다. 전력의 열세인 지금 지킬 곳을 분산하기보다는 한곳에 뭉치는 게 낫습니다.”
진무립을 믿는 자소는 두말없이 답했다.
“은공의 말에 따르지요. 가주는 전서구를 빌려주시겠는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진무립은 반쯤 무너진 전각의 대들보를 뽑아 뭔가를 새겼다.
그리곤 정문으로 달려가 부서진 현판을 대신해 글귀가 적힌 대들보를 높게 걸었다.
수하들을 소집한 진무립은 당성을 찾았다.
“먼저 갈 테니 가주께 정리가 끝나면 사천맹 동쪽 숲으로 오라고 전해주시오. 당가의 무인이라면 성도에 들어설 수 있을 터, 곧장 오지 말고 반드시 성도의 동문을 나가 최소 삼백 장 밖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북동쪽으로 달린다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당성은 두말없이 예를 갖추며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당가를 나선 진무립 일행이 빠르게 북동쪽으로 달렸다.
* * *
사천맹의 처절한 절규와 비명이 숲속까지 울려 퍼진다.
부르르 떨리는 강유월의 손등에 적모개의 손이 얹어진다.
“아직 아닙니다. 지금은 참으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저들이 먼저 성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했던 이들의 비명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를 바짝 낮춘 적모개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천무림의 노고수로 구성된 호천단원이 오십.
멀찍이 떨어진 곳에는 마도림 성도지부를 구성했던 관초걸과 삼십 명의 무인이, 조금 전 도착해 내력을 회복하는 광룡대가 오십이다.
거기에 챙길 식솔이 없는 육군명과 사대거파의 후기지수들까지 포함하면 도합 백오십여 명에 달했다.
사천맹으로 쳐들어가 저들을 구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들이 소수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위맹의 거의 모든 무인이 사문의 식솔을 옮기느라 자릴 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진무립이 무엇보다 가족의 안전을 우선시한 까닭이었다.
‘지부를 빼앗을 땐 그런 냉혈한이 없더니만 남다른 구석도 있어.’
식솔들의 안전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무인을 소집했다면, 승패는 장담할 수 없으나 당장 일전을 치를 만한 전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무립의 선택은 중소방파의 안전이었다.
‘소공자에게 생각이 있겠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놓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걸 채워야 한다.’
부상자를 옮길 마차와 말은 충분히 준비해뒀다.
공위맹의 총단과 중경, 그리고 이곳과의 연락도 언제든 수월하게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뒀다.
적모개가 재차 지난 일을 점검할 무렵.
바로 옆으로 다가온 동초개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세상 태평한 그 표정에 적모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넌 좋겠다.”
“왜냐고 물으면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겠지.”
“이럴 땐 정말 귀신같네.”
동초개의 입꼬리가 마치 비웃듯 길쭉하게 올라간다.
“소공자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죠. 우리 같은 범인이 걱정해봐야 못난 얼굴에 주름만 늘어요. 강노사님이랑 얼굴로 친구 먹고 싶어요?”
“…….”
고개를 흔든 적모개는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저 앞에선 혈교와 사천맹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곧 저들과 마주치게 될 텐데 넌 무섭지도 않으냐?”
“뭐가 무서워요? 우리 형님이 날 지켜줄 텐데.”
“우리 형님?”
동초개는 해맑게 웃으며 용추를 가리켰다.
“저기 우리 형님.”
용추는 비를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다.
슬며시 시선을 거둔 적모개가 인상을 썼다.
“……꺼져. 거지새끼야.”
적모개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숲을 넓게 감시하는 육군명과 후기지수들이 있었다.
사천맹의 무인들이 탈출하거나, 혹시 모를 혈교도가 나타날 것에 대비한 것이다.
후기지수들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비록 사천맹의 부조리에 그곳을 떠났다곤 하나 사형제들과의 인연까지 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님. 집은 무사하겠지요?”
당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당소소는 애써 웃어 보였다.
“본 가에는 가주께서 계시질 않습니까?”
“역시 그렇겠죠? 아버지께서 계시니까.”
“물론입니다.”
그녀의 미소에 불안이 녹아내린 당우는 한결 안정을 되찾았다.
반면 동료들을 둘러보고 온 육군명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아직 다른 이들은 모르는 눈치였으나 육군명은 전방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부 뒈지기 전에 얼른 나와라. 미련한 놈들아.’
곧이어 남서쪽에서 오싹한 기운이 굉장한 속도로 가까워진다.
왠지 익숙한 그 느낌은 바로 진무립이었다.
‘왔구나.’
* * *
사방에 널브러진 시신, 코끝을 자극하는 뜨거운 혈향과 끈적한 피로 점철된 사천맹의 거리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천에 달하던 무인 중 두 발로 선 자는 고작 오백.
동료들을 격려하던 외침도, 부하들을 다그치던 긴박한 목소리도 거짓말처럼 끊겼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유는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었다.
“쿨럭!”
왈칵 피를 토해낸 한천월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왼팔, 검붉게 변색된 옆구리는 장기가 비칠 만큼 깊게 갈라졌고 지면에 무릎 꿇은 두 다리는 발목 밑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 남은 한천월의 눈에 비릿한 무천극의 미소가 담긴다.
“사천 무림을 좀먹는 노인네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제법이었다.”
쉽게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한천월은 기대 이상으로 대단한 고수였다.
서장에서 싸운 판천라마에 비하면 다소 손색이 있으나, 한천월의 천광비선검(千光批仙劍)은 가히 강호 일절이라 부를 만했다.
그러나 그것이 서장의 절대자를 상대로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부하들의 만감이 교차하는 시선 속에 한천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자신의 무공은 분명 죽은 사형 고중선보다 강했다.
그럼에도 대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성의 장문인이 될 수는 없었다.
청성에 남아 뒷방 늙은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세상에 자신만의 성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사천맹이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한천월은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움켜쥐었다.
“이곳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벼락같이 떨어진 검신이 그의 남은 팔을 잘라낸다.
서걱!
“나만의 성이…….”
기울어지는 상체와 함께,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온갖 악명을 감당하며 필사적으로 지켜온 나만의 성이 눈앞에서 기울어간다.
“나는 분명…… 꿈을 꾸는 것일 테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내뱉는 말과 달리, 하나 남은 눈동자에는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시간을 두 손으로 힘차게 끌어당기듯, 빠르게 흘러온 지난 세월이 이윽고 현재에 도달했을 때.
“잘 가라.”
빗살같이 떨어진 시뻘건 검신이 흘러가는 한천월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었다.
서걱!
목에서 솟구치는 피가 무천극의 얼굴을 혈귀처럼 뒤덮어간다.
“맹주님께서…….”
“아아!”
맹주의 목이 떨어지자 사천맹 무인들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정무원의 노사들은 혈야광인과 혈교도의 합공에 쓰러진 지 오래.
그 과정에서 상대의 피해도 적지 않았으나 아군의 피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노사들에 이어 맹주까지 죽은 이상 도무지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두려움에 깃든 눈으로 무천극을 응시하고 있을 때, 진설란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파고들었다.
[설란.]당천의 전음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천무대와 함께 후방으로 이동한 구양무가 당천과 시선을 교환한다.
[탈출하세.]수장이 죽은 이상, 각주들까지 모두 죽은 이상 버티는 의미가 없다.
[예.]슬금슬금 퇴로를 확보하던 구양무의 눈이 무천극의 섬뜩한 미소와 맞닿았다.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낸 구양무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맹도들은 전원 동문으로 퇴각하라!”
“동문으로 퇴각하라!”
그와 동시에 혈교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며 잠시 멈췄던 전투가 재개됐다.
“킬킬킬! 이제 와서 어디로 도망치겠다는 거야?”
태광삼귀의 셋째, 광귀 상위겸이 지독한 사기를 발산하며 바람같이 달려든다.
퇴각하는 무인의 등이 상위겸의 주먹에 닿기 직전, 한 줄기 섬광이 길쭉하게 늘어지며 그의 전진을 막아냈다.
“응?”
그의 고개가 향한 곳에는 암기를 쏘아낸 당천이 있었다.
“혈교에는 미친놈들이 많군.”
“킬킬! 너는 안 도망치는 거야?”
지면을 박찬 상위겸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든다.
당천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칠사독장(七死毒掌)을 전개했다.
쏴아아!
비를 뚫고 쏘아진 시꺼먼 독장이 상위겸을 때리기 직전, 우측에서 날아든 섬광이 독장을 단숨에 파훼했다.
파직!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은 태광삼귀의 둘째, 백귀 소위민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쓸어넘긴 그는 혀를 차며 상위겸을 쳐다봤다.
“이거 정통으로 맞으면 일곱 걸음 안에 죽는다고. 이 모자란 녀석아.”
“킬킬킬!”
혼신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당천은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서 담장을 밟고 올라선 그의 눈에 퇴각하는 아군과 추격하는 적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는 수밖에 없지.’
어금니를 강하게 깨문 당천은 남은 내력을 남김없이 끌어올렸다.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가 쏟아져 나오며 쏟아지는 빗줄기가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이어서 주변으로 엄청난 바람이 용솟음치며 좌우로 펼쳐진 소매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저놈 뭘 하려고…….”
그때 사방에 널브러진 암기와 묵직한 무기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구암환영공 만월천비(萬月千飛)의 초식.
반월천비보다 한 단계 더 고절한 수법은 다수를 상대하기에 부족함 없는 초식이었다.
하지만 위력이 큰 만큼 단전의 내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한계에 도달한 당천의 입술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이게 나의 의지인가?”
언제나 명령에만 복종하던 자신이 아군을 지키고자 스스로 나섰다.
동문에 가깝던 금호대의 안전은 확보된 상태.
지금 도망치는 이들 중 태반은 말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자들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자신이 스스로 움직였으니 꼴이 왠지 우습게 느껴진 것이다.
“그놈 때문인가.”
어쩌면 서장행의 막바지에, 설원에서 적을 막겠다며 뒤에 남은 진무립이 떠오른 까닭일지도 모른다.
단전에서 시작된 통증이 점차 전신으로 번져가며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나도 참 미련하구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두 팔이 가슴 앞으로 모이는 순간, 떠올랐던 수백 개의 병기가 유성우처럼 일거에 적들을 내리찍었다.
쿠콰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