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39)
◈ 139화. 승리의 외침
정점을 지난 태양이 서서히 기울어간다.
시산혈해의 참혹한 전장.
삼천여 명의 혈교도는 전멸, 이천오백에 달하던 사천의 무인 중 살아남은 이는 천오백이었다.
적의 전력을 생각하면 말로 설명하기 부족할 만큼의 대승이다.
그러나 동료의 죽음 앞에서 쉽게 기쁨을 드러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살아남은 무인 중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숫자는 겨우 오백.
그들은 녹초가 된 몸으로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물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경건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들의 엄숙한 분위기는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린 남궁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쟁이로군요.”
남궁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리의 부모님과 전대의 선배들께서도 이와 같은 수라장을 헤쳐 나오셨겠지.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그분들이 흘린 피로 이룩한 것이다.”
“저들의 후손들도 같은 생각을 할까요?”
“물론이다. 후대의 기억에선 저들이 바로 사천의 평화를 지켜낸 영웅이 될 거다.”
마지막 말은 근방에 머무는 무인들의 뇌리에 선명한 기억으로 새겨졌다.
“영웅이라.”
“그렇지. 선대의 피로 이룩한 평화 위에 우리가 산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네.”
나직한 대화들이 오가는 가운데 남궁설이 오라비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도중에 광룡과 혈마가 산속으로 사라졌잖아요. 상천의 무인들이 뒤늦게 그쪽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그들이 혈마를 함께 상대했던 걸까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진다.
“광룡이 혈마를 죽인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느냐?”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거 같은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녀와 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상천의 무인들이 뒤늦게 나타난 것은 혈마를 협공하기 위함이 아니다.”
남궁도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사라졌을 때, 나는 그들이 사라진 산속에 다녀왔소. 산에서 마주친 자들은 혈마를 따라간 부하들의 시신을 발아래 두고 있었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결코 여러 명이 싸우는 소리가 아니었소.”
남궁도는 자신이 산에서 보고 겪은 것, 묻고 들었던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남궁설이 말했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그래. 적을 모두 제거한 그들은 골짜기에서 연신 굉음이 터져 나오고 있음에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광룡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던 게 분명해.”
유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광룡은…….”
이어서 장오가 입을 연다.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늘 일이 알려진다면 진무립이 먼저 그 자리에 올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때마침 얼마 전 칠맥의 종주께서 은퇴하시어 십대고수의 한 자리가 비어있었지.”
“무면산왕에 이어서 또 하나의 십대고수가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우리 또래 중에 말이야.”
“만일 그리되면 화령은 속이 좀 쓰리겠는데.”
천하의 후기지수 중에 십대고수에 오르는 자가 나온다면 그들은 당연히 소천무군 단자룡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본 광룡 진무립의 활약은 남은 십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육군명은 웃음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혼자서 천하십대고수의 두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도 재밌겠군.’
문득 저들이 무면산왕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건 그렇고…….’
육군명의 시선이 슬며시 사라지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에게 닿았다.
‘저놈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단 말이지.’
싸움이 시작되고 끝이 날 때까지, 모두의 시선이 복잡하게 옮겨가는 와중에 유독 저 사내만큼은 혈야광인만 쳐다보고 있었다.
혈야광인이 모두 쓰러진 뒤에는 사색에 잠겨 전장을 살필 마음도 없어 보였다.
‘어디에서 온 녀석이냐?’
조용히 몸을 뒤로 뺀 육군명이 천천히 그의 뒤를 쫓았다.
비록 온전한 몸 상태는 아니었으나 세작 한두 명 정도는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구릉에서 빠져나온 중년인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냈다.
‘혈야광인은 쏟아붓는 돈에 비하면 단점이 너무 크다. 차라리 그 돈으로 낭인을 사는 게 나을 지경이로군.’
종이를 채워가던 검은 글자가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였다.
퍽!
“큭!”
뒷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며 눈앞이 컴컴해졌다.
쓰러진 중년인의 뒤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육군명이었다.
육군명은 그의 입에서 작은 독단을 꺼낸 뒤 혈도를 점했다.
‘어디에서 온 놈이냐?’
종이 속 복잡한 밀문을 확인한 육군명은 그를 어깨에 걸치고 사라졌다.
전장에서 이백여 장 떨어진 나지막한 능선에 국영승과 투월초가 나타났다.
“대승에 비하면 분위기가 좋지 않군.”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예요.”
천하대전의 경험자인 투월초는 저들의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짐작은 투월초 본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가 존경하는 단소룡이 슬퍼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투월초는 단소룡과 그의 주변인을 제외하면 누가 죽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공위맹 무인들을 응시하던 국영승이 조용히 물었다.
“광룡 진무립이라. 상천에 이어서 생각지도 못한 녀석이 튀어나왔군.”
무천극과의 싸움 대부분은 골짜기에서 이뤄졌기에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혈천장을 찢어낸 가공할 일격과 자폭공을 쓰는 자들을 상대로 겁 없이 달려든 담력은 마치 젊은 시절의 단소룡을 보는 듯했다.
저 멀리 진무립을 눈에 담은 투월초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만일 우리에게 보여준 무공이 전부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국영승은 미간을 좁혔다.
“저 나이에…… 지금 이상의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냐?”
“대목(大木)은 저 나이에 황운천을 꺾고 천하제일의 자리에 올랐어요. 안 될 것도 없죠.”
대목은 단소룡의 측근들이 그를 부르는 말이다.
“그에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투월초는 천하 이황의 일인.
내뱉는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국영승이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단려화를 살펴본 투월초가 몸을 돌렸다.
“돌아갈게요.”
“그냥 가는 게냐? 저곳에 소룡의 딸이 있다면서?”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싫어할 거예요.”
신법을 전개한 투월초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홀로 남은 국영승이 투월초의 말을 상기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보이는 것 이상의 능력이라…….”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있던 국영승도 잠시 후 몸을 돌려 사라졌다.
* * *
분주한 시간이 지나가고 벽산의 기슭에 어둠이 찾아왔다.
육군명이 잡아 온 세작은 놀랍게도 천산에서 온 무인이었다.
몇 차례 발뺌하던 그는 품에서 마교의 표식을 발견한 적모개로 인해 모든 것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적모개의 추궁이 이어지는 동안, 슬픔 속에 시신을 모두 정리한 무인들은 사방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다른 것을 할 여유도, 체력도 없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전쟁, 목숨을 건 사투 속에 지치지 않은 이는 없었으니까.
“이겼구나.”
별을 눈에 담은 조영성의 목소리가 고요한 산속에 나직이 퍼져 나간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던 이들에게 지금의 말은 새삼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실감하게 했다.
곁에 앉은 곽도진이 같은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나직이 퍼져 나간 울림은 제법 멀리 떨어진 천무대주 구양무의 귓속까지 스며들었다.
“우리가…… 이겼구나.”
잘려나간 왼팔의 고통이 무뎌질 만큼 짙은 희열이 차올랐다.
곁을 지키던 당자경이 울먹이며 물었다.
“기뻐해도 되겠습니까?”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그래도 되겠는지 묻는 것이다.
대답은 두 사람의 뒤에서 들려왔다.
“눈물은 충분히 흘리지 않았는가. 모두가 함께 싸워 이뤄낸 승리일세. 분명 먼저 간 이들도 이해해줄 게야.”
돌아보니 옅은 미소를 짓는 초평천이 보인다.
당자경의 눈가에 어린 뿌연 습막은 이내 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다!”
만감이 교차하는 외침이 밤하늘에 길게 울려 퍼진다.
그의 외침에 이어 사방에서 억눌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겼다-!”
“우리가 사천을 지켜냈다!”
뒤늦은 승리의 함성이 벽산의 밤을 뒤흔들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진무립의 곁으로 단려화가 다가왔다.
그녀는 진무립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당신도 해요.”
“싫어.”
단호한 거절에 단려화의 눈매가 샐쭉하게 올라간다.
“그냥 좀 하라면 해요.”
“…….”
어느새 주변인의 시선이 모두 진무립에게 모여든 상태였다.
전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진무립이 없었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 진무립은 잔뜩 인상을 쓰며 외쳤다.
“이겼다!”
그 모습을 본 무인들은 슬픔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한경이 말했다.
“유소저 말씀은 잘 듣는다니까.”
“그래서 광룡과 광녀가 아닌가?”
대꾸하는 전유에게 단려화의 찌릿한 눈빛이 쏟아진다.
“닥쳐요.”
“그러지요.”
멀리서 진무립을 바라보던 자소가 곁에 앉은 당조에게 말했다.
“마도림의 소공자라. 그의 활약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네.”
“누가 부정하려 하겠습니까?”
당조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분명 그가 없었더라면 사천 무림은 혈교의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무뚝뚝한 당조에게 있어서 지금의 말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이었다.
잠시 이채를 띄고 그를 바라보던 자소가 빙그레 웃었다.
“공위맹주의 역할도 작지 않았어. 이제…… 마도림은 다시금 사천 무림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지. 서운하지 않은가?”
그런 욕심은 당가가 무너지던 날 버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사태께서는 서운하십니까?”
“불자 된 몸으로 아직도 그런 삿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야.”
듣고만 있던 강유월이 말했다.
“전부 부질없는 욕심이었습니다.”
이어서 하종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우리 사대거파는 과욕의 대가를 크게 치른 셈이지요. 많은 것을 배운 전쟁입니다.”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대거파의 수장들이 마도림을 다시금 사천제일세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 * *
내리쬐는 땡볕으로 뜨거운 죽림에 수문위사의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달음에 안림원으로 달려간 그는 정문을 넘어서기 무섭게 외쳤다.
“대부인! 대부인!”
때마침 식사를 들여가던 나이 든 시비가 곱게 눈을 흘겼다.
“언성을 낮추세요. 이곳이 어딘지 잊으셨습니까?”
정가장에서부터 그녀를 모셔온 시비에게 함부로 대할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때 안에서 문이 열리며 정인령이 나타났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위사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그녀는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분명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낭보이거나, 비보이거나.
초평천과 초무강이 없는 이상 이곳의 책임자는 그녀였다.
낭보라면 반가운 일이겠으나 비보라면 다음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문위사는 답답하게 무릎까지 꿇으며 예를 갖췄다.
“대부인을 뵙습니다.”
“소식을 전해왔습니까?”
이어서 고개를 든 그는 활짝 핀 얼굴로 말했다.
“예! 승전보입니다! 소공자께서 혈마의 목을 베셨답니다! 적도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답니다!”
정인령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가운데 시비가 놀란 눈으로 상을 떨어뜨렸다.
“아, 아가씨!”
활짝 웃은 정인령은 치맛단을 움켜쥐며 발을 옮겼다.
“당장 이 소식을 모두에게 알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