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05)
◈ 205화. 개봉으로
진으로 돌아온 설지량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하.”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먼저 돌아와 주변을 정리하던 표사들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군사.”
설지량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새어 나온다.
“누구야?”
“송구합니다. 저희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주군께서는?”
“개봉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국주들과 대표두들이 있었을 텐데.”
“모두 당했습니다.”
“음.”
진을 비우고 개봉 전역에 무인을 깔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운화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리를 비웠다면 당해도 싸다.
“상대의 숫자는?”
“최소 다섯입니다. 시신의 훼손이 심해 무공까지 특정하긴 어려웠으나 모두 다른 병기를 사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흔적은 동쪽으로 이어지다가 사라졌습니다.”
한 번 놓친 흔적을 다시 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주들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닌,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게 생긴 탓이다.
설지량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해.”
“예.”
돌아선 설지량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진다.
‘중원맹엔 밖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 테고, 분명 그놈들이야.’
이런 짓을 벌일 자들은 상천밖에 없다.
‘너무 쉬우면 그것도 재미가 없지.’
손을 든 설지량이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그에 허공에서 시꺼먼 연기가 피어나더니 흑의인이 나타나 부복했다.
“예. 군사.”
“상천의 움직임은?”
“산채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의 움직임까지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지량은 분명 물밑에서 그들이 움직이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큭큭큭. 이렇게 또 끌어낼 구실이 생기나?’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반갑다.
차갑게 눈을 빛낸 설지량이 막사로 들어갔다.
지필묵을 찾아 뭔가를 적은 그는 서신을 밀봉해 부하에게 넘겼다.
“그곳에 다녀와 줘야겠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어딜 말하는지 안다.
눈알을 좌우로 굴린 흑의인이 잠시 멈칫하자 설지량은 짓궂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시는 해야겠다 그거야?”
순간 흑의인의 눈동자에 다소 놀란 빛이 스치듯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지량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농담이야. 어서 다녀와. 곧 무면산왕이 올 텐데 잡아야 할 거 아니겠어?”
무표정으로 돌아온 흑의인이 서신을 받아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떠난 직후, 막사의 휘장이 거칠게 펄럭이며 운화결이 들어왔다.
“누구냐.”
주먹을 움켜쥔 운화결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린다.
잠깐 자릴 비운 사이 일이 벌어졌으니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설지량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에게 임교영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손님이 다녀간 모양입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 설지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 미리 손을 좀 써두겠습니다.”
* * *
눈 덮인 들판에 무수한 별빛이 아름답게 쏟아져 내린다.
흐르는 별빛 속에 세 줄기 섬광이 광활한 평야를 혜성처럼 질주한다.
검산채주 대중경과 대별채주 송조광, 그리고 죽산채주 왕유가 바로 그들이었다.
날아갈 듯한 윤건을 꾹 눌러쓴 송조광이 고개를 돌렸다.
“이보게. 중경. 잠시 쉬어 가는 건 어떻겠는가?”
달빛만큼이나 창백한 대중경의 무심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힘들면 천천히 오시오.”
“거 사람 참…….”
수문화의 전서를 받고 대별채를 나선 게 하루 전이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왔으니 제아무리 무공 고수일지라도 지치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대중경은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참는 건지, 정말 지치지 않은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송조광이 재차 말했다.
“좀 쉬어가자니까. 요기도 좀 하고.”
대중경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살아온 자신들이 천하에 그 존재를 입증할 기회가 찾아왔다.
쉬어가는 시간조차 아깝다.
“먼저 가겠소.”
차갑게 대꾸한 대중경이 도리어 속도를 올린다.
“저런…….”
송조광은 울컥 치미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조용히 뒤따르던 왕유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이 급한 모양일세. 자네가 이해하게.”
송조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인이라곤 하나 지천명을 넘긴 왕유였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유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말게. 아직 팔팔하다네.”
“조금만 더 참으시지요. 반 시진 뒤엔 저놈을 때려눕혀서라도 엉덩이를 붙이겠습니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송조광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물론 채주께서도 동참하셔야지요.”
“……허허허.”
멋쩍게 웃은 왕유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그보다 그 녀석이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그가 입에 올린 인물은 얼마 전 회남표국으로 향한 백채륜을 말함이었다.
“우리보다야 늦겠지만 그놈이 주군과 함께 싸울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진무립을 향한 백채륜의 맹목적인 충심은 상천팔기에서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왕유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군, 누구보다 믿음직한 동료가 한자리에 모일 시간이 다가오는 탓이다.
같은 시각.
북쪽의 산서에서도 거구를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남하하는 이가 있었다.
‘드디어 우리의 식구들이 두 발 뻗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다.’
거련채주 연길상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빛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은 바로 이 몸이다!’
굳은 다짐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는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눈밭이 으깨지며 다부진 체구의 사내가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이제 하루 반.’
은은한 어둠 속, 눈 덮인 사방의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상천팔기에서 신법이 가장 고절한 인물은 바로 섬서 화룡채주 마일관이었다.
‘길상이 놈보다 늦을 수는 없지.’
아마 그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용천혈에 내력을 쏟아부은 마일관은 한 마리 비조처럼 거침없이 들판을 질주했다.
결전을 앞두고.
산동의 시평을 제외한 상천팔기 전원이 개봉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 * *
빛 한 점 새어들지 않는 캄캄한 방 안.
붓을 쥐고 탁자 앞에 앉은 설지량의 귀에 나직한 전음이 도착했다.
[군사. 순찰이 오고 있습니다.] [끝나간다.]점점 빨라지던 손놀림은 장계의 마지막 줄을 채운 뒤에 멈췄다.
바쁘게 움직이는 설지량의 눈동자는 써 내려간 글귀를 재차 점검했다.
‘이 정도면 임시방편으론 훌륭하지.’
그가 있는 이곳은 중원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보관하는 기밀서고.
지금 작성한 장계는 산동 인근의 지부에서 보낸 것이 될 것이다.
붓 통을 품에 넣은 설지량은 손바닥으로 장계 위를 슬며시 훑었다.
그러자 이제 막 작성한 문서가 마치 오래전에 쓰여진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완성한 장계를 서고의 한쪽에 올려두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일렁이는 횃불이 내부를 비춘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안을 살피던 무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착각이었나.”
분명 인기척을 느낀 것 같았는데 아무도 없는 것이다.
잠시 안을 둘러본 무인은 이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잠식한 실내에 번뜩이는 두 개의 청광이 나타났다.
[개방에 다녀올 것이다.]중원무림맹에 비각이 있다면 개방에는 전서를 다루는 조당이 있다.
그곳의 당주 지박개는 오래전부터 표국에서 제공하는 향락에 빠진 인물이었다.
비각과 조당에서 입수하는 정보만 손을 보면 설령 산동의 소문을 막지 못한다 해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일러둔 대로 시행해라.]천장에서 나직한 대답이 들려온다.
[명심하겠습니다.]창문이 열리며 방 안에 스며든 달빛은 이내 설지량의 기척과 함께 사라졌다.
* * *
객잔으로 돌아온 이하빈 일행은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전투의 피로를 풀었다.
그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땐 창문 틈으로 아침의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음.’
당천은 낯선 천장을 눈에 담고 다시금 어제의 일을 상기했다.
‘만월천비.’
사천에서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쓰고도 완벽하지 못했던 초식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눈을 감고 몸 상태를 확인해보았으나 평소와 다른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몸은 좀 어때요?”
고개 돌린 당천의 눈에 건너편 침상의 진설란이 보인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진설란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남는 방이 없더군요.”
“복호채주도 여인이다.”
“눈빛이 너무 무섭잖아요.”
“…….”
몸을 일으킨 진설란이 대견한 듯 당천을 바라보았다.
“유소협에게 들었어요. 만월천비를 완벽하게 사용했다면서요?”
당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거 아니다.”
“혈교와 싸울 땐 한계를 넘어선 탓에 마지막 전투에도 참여하지 못했잖아요. 당신은 정말 대단한 성과를 거둔 거예요.”
“…….”
벽에 기댄 진설란의 표정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다들 빠르게 성장하는군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전투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혼자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양이다.
천천히 상체를 세운 당천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강해지고 싶나?”
진설란은 당연한 말을 묻는다는 듯 쳐다봤다.
“물론이에요.”
“나는 내게 부족한 것을 진무립에게 배우고자 사천을 떠났다.”
“알고 있어요.”
“배움의 기회는 내게만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진공자에게 배우라는 말인가요?”
당천은 고개를 저었다.
“흑백독화 이하빈. 만일 여인의 몸으로 천하제일을 노리는 인물이 나온다면 바로 그녀가 될 것이다.”
단 한 번의 전투에 불과했으나 그녀가 보여준 움직임과 판세를 가져오는 지혜는 당천의 뇌리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함께하는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머릿속에 각인시켜라.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의외라는 듯 당천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설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역시 당신은 달라졌군요.”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당천이다.
그런 당천이 다른 이를 관찰하고 칭찬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슬며시 고개 돌린 당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구요?”
“수련이다.”
개봉 전역을 감시하는 표국의 움직임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진을 텅텅 비우고 움직이던 그들이 일부를 진영의 수비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개봉을 감시하는 자들이 유사시 언제든 복귀할 수 있도록 연락망을 재정비했다.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 속에 지나간 시간이 다시 하루.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진무립이 마침내 개봉성을 눈에 담았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성에 들어가려던 진무립이 지나가는 마차 뒤로 몸을 숨겼다.
‘이런 곳까지 감시를 보내는 건가?’
성문의 지붕 마루 위에서 은곡의 심법을 익힌 무인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뿐 아니라 성문 너머에서도 그와 같은 은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대로 육병흑궤를 지고 성문을 넘으면 싫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조용히 성벽을 따라 이동한 진무립은 육포를 씹으며 허기를 채웠다.
‘감시가 이 정도로 삼엄하다면 악계화들은 성에 들어가지 못했을 거다.’
표국이 철저하게 악이 되어야 그에 맞선 상천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
악계화들은 천하대전을 일으킨 팔황문과 표국의 관계를 증명해줄 중요한 증인.
상대의 눈에 띄기 전에 먼저 접촉해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전에 내부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지.’
성벽을 더듬으며 남쪽으로 이동하던 진무립은 돌에 새겨진 미세한 밀문을 확인했다.
‘풍령객잔.’
자신이 올 것에 대비해 은무대가 남긴 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