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06)
◈ 206화. 바람을 이뤄줄 손님
내력을 회복한 진무립은 한 마리 비조처럼 표홀하게 성벽을 타고 넘었다.
‘역시.’
아침과 함께 거리의 인파가 늘어나자 곳곳에 표국의 무인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육병흑궤가 문제로군.’
민가의 담을 넘은 그는 빨랫줄에 걸린 천을 걷어 흑궤를 덮었다.
‘이 정도면 천값으론 차고 넘치겠지.’
은자 두 개를 내려둔 진무립은 내친김에 옷까지 한 벌 골라 입고 낡은 죽립까지 챙겼다.
옷을 제대로 갈아입고 나니 마치 떠돌이 행상처럼 보인다.
진무립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릴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덩치 큰 아낙이 튀어나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미친 인간아! 또 아침에 들어와서 쥐새끼처럼 몰래 나가려는 거지?”
남편의 옷을 걸친 그 모습에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진무립은 저도 모르게 죽립을 끌어내렸다.
“……아니오.”
“아니긴 뭐가 아…… 엉?”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진무립이 꺼지듯 사라졌다.
도망치듯 거리로 나선 진무립은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다.
“말씀 좀 묻겠소. 풍령객잔이 어디요?”
털이 덥수룩한 사내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가다가 은천포목의 옆 골목으로 들어가시오.”
“고맙소.”
가볍게 인사한 진무립은 죽립을 눌러쓴 채 빠르게 북쪽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풍령객잔 별채의 큰 방에 모든 인원이 모여들었다.
밖을 둘러보고 온 금성우가 말했다.
“숫자가 좀 줄어든 것 같긴 합니다만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이어서 주인환이 입을 열었다.
“북문 밖으로 이어진 길목에 놈들이 주르륵 깔렸습니다. 연락체계를 견고히 만든 것을 보면 더 이상 본진 습격은 통하지 않을 듯합니다.”
“음.”
이하빈은 그날 운화결을 만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러나 아쉬워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정보력은 상천의 유일한 약점인 데다가 적지나 다름없는 개봉이니 이 정도 허점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가항력을 아쉬워하기보단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자.’
진무립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적모개들이 입을 다문 이상 시간은 아군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때 이하빈의 고개가 문을 향해 휙 돌아가더니 냉막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오셨구나.”
모두가 그녀의 시선을 좇아 고개 돌리는 순간, 문이 열리며 마침내 죽립을 눌러쓴 진무립이 나타났다.
“잘 지냈나?”
“진공자!”
진설란이 환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주군을 뵙습니다.”
이하빈과 부하들이 밝은 얼굴로 예를 갖추는 가운데 진무립의 시선이 당천에게 닿았다.
“뭐냐?”
당천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당분간 너를 따라다니라고 하셨다.”
주변을 스윽 훑어본 진무립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알 때도 되긴 했지.”
상천의 위기를 외면하지 못한 조부가 수뇌부에 이야기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당조가 당가의 후계자가 될 당천에게 무림행을 지시했을 것이다.
그 짐작대로 당천이 말했다.
“공위맹은 언제든 상천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고맙군.”
진무립은 유대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
유대하가 반갑게 웃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진무립은 미소로 그들을 치하했다.
“수고 많았다. 우선 당면한 상황부터 들어볼까?”
“예.”
진무립이 자리에 앉은 가운데 유대하는 자신들이 개봉에 도착한 시점부터 오늘까지의 일을 최대한 간추려서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난 뒤, 진무립은 대견한 듯 이하빈을 바라보았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그녀는 공손히 고개를 저었다.
“금성표국주를 잡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딱 적당하다. 이 시점에 그놈은 살려두는 것이 나아.”
구심점이 사라지면 표사들이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도 있다.
악계화가 온 이상 적으로 남아있어야 할 자들이 사라진다면 계획이 어긋난다.
진무립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출발하기에 앞서 태산표국의 생존자들이 이곳 중원에 발을 들였다. 아마 지금쯤 외부 어딘가에서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고 있을 거다.”
이하빈이 물었다.
“태산표국의 생존자입니까?”
“아직 소식이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군.”
정보를 공유해야 다음 일에 손발을 제대로 맞출 수 있다.
진무립은 태산표국주 청금환이 아군의 배신에 목숨을 잃은 것부터 회남표국주의 사망까지 모든 일을 설명했다.
육군명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대표국의 국주 중 살아남은 자는 운화결 한 명뿐인가?”
“그래. 악계화들이 적에게 먼저 발견된다면 곤란해. 그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결정적인 순간을 노릴 계획이다.”
당천이 말했다.
“성안으로 데려올 생각인가?”
“이 계절에 밖에 둘 수도 없지. 어설프게 돌아다니다가 발각되느니 차라리 내 눈이 닿는 곳에 두는 게 좋다.”
진무립은 쉴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봉 봉쇄를 풀고 그 틈에 악계화들을 데려온다. 육군명과 유대하는 안가로 쓸 장원을 구해라. 은무대는 본래의 임무로 복귀, 이하빈과 세 사람은 적을 하나씩 유인해서 제거한다.”
이하빈은 곧장 진무립의 의도를 눈치챘다.
시야 밖에서 하나씩 부하들이 사라지다 보면 적은 봉쇄를 풀고 웅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천과 함께 거리에 나선 진설란은 죽립을 깊게 눌러쓴 채 주변을 살폈다.
[붙었어요.]미약한 내력을 흘리기 무섭게 귀신같이 감시의 눈이 따라붙는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인적 드문 골목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조용히 그 뒤를 따른 표사가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쉭.
싸리나무로 만든 담장 틈으로 날카로운 창두가 튀어나와 그의 목을 꿰뚫었다.
푹!
“큭!”
벼락같은 기습에 표사가 억울한 얼굴로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뒤를 돌아본 진설란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살수도 아닌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적의 숨통이 끊어졌다.
‘함께하는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머릿속에 각인시켜라.’
당천의 말을 다시금 상기한 진설란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알겠어요. 똑똑히 봐둘게요.’
그녀가 속으로 각오를 다질 때, 이하빈과 용추가 담장을 뛰어넘어 골목에 내려섰다.
“흔적을 남기지 마라.”
이하빈의 기습은 정확히 요혈만 꿰뚫었기에 시간을 들여야 할 만큼 피가 많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예.”
히죽 웃은 용추는 시신의 상처를 묶고 준비한 자루에 담았다.
그리곤 발로 몇 번 지면을 슥슥 문지르니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하빈이 말했다.
“가자.”
시선을 교환한 네 사람이 다음 장소로 움직였다.
네 사람이 계획에 돌입할 무렵.
육군명과 유대하는 복잡한 거리를 오가며 장원을 물색하고 있었다.
“음.”
“뭐야?”
“이런 계절에 빈집을 찾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려울 거 같단 말이야.”
겨울에 집을 팔고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당장 서른 명을 동시에 수용할 장원이 쉽게 나타날 리 없었다.
육군명의 말에 유대하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발품 파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가만히 생각하던 육군명이 씩 웃었다.
“잘하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개봉에서 가장 큰 집을 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자.”
앞장선 육군명은 익숙하게 유대하를 이끌었다.
조용히 뒤따르던 유대하는 왠지 본듯한 거리의 풍경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길은?”
“익숙하지?”
잠시 후, 두 사람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홍월루였다.
유대하가 뜨악한 얼굴로 어깨를 잡았다.
“설마 기루를 빌리겠다는 말이냐?”
“일단 따라오기나 해.”
주변을 살핀 유대하는 전음을 보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육군명은 성큼 기루에 들어섰다.
의자를 올리고 청소에 한창인 가운데 지난번 봤던 총관이 나타났다.
“송구하오나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닙니다.”
육군명은 내부를 슥 둘러보고 말했다.
“루주를 만나러 왔다.”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그래. 가서 이 층 난간의 친구가 찾아왔다고 전해.”
총관의 가늘어진 눈동자가 육군명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그런 약속은 듣지 못했는데.’
그런데 당당하게 나오는 상대를 보면 마냥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고개를 갸웃한 총관이 계단을 올라 화명의 집무실을 찾았다.
“루주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탁자 앞에 앉아 장부를 보던 화명이 고개를 돌렸다.
“찾아올 손님이 없을 텐데. 누굽니까?”
총관의 볼살이 미미하게 꿈틀거린다.
“이 층 난간의 친구라고 합니다. 혹시 약속을 잡지 않으셨습니까?”
“이 층 난간의 친구?”
말을 듣는 순간 누군지 대번에 떠오른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 당당한 눈빛을 가졌던 그 청년이 분명하다.
“하하하! 친구라.”
“돌려보내겠습니다.”
이어진 화명의 목소리가 돌아서는 총관의 발을 잡았다.
“아닙니다. 제 손님이 맞으니 이리 안내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일 층으로 내려온 총관이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나를 속이다니.’
육군명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뭐야? 우리 바쁜 사람이야. 어서 안내해.”
총관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린다.
그러나 루주의 명이 떨어진 이상 이들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었다.
“따라오시오.”
짧아진 말투에서 그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대하가 조마조마하게 육군명을 쳐다봤다.
[거짓말이 들킨 거 같은데?] [내 알 바냐. 목적만 이뤘으면 됐지.]뻔뻔하기로 따지면 용추에 못지않다.
한숨을 삼킨 유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상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이 마침내 화명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화명은 환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이들을 환영했다.
“어서 오게나. 친구.”
넉살 좋기론 화명도 육군명에 못지않았다.
두 사람은 고작 두 번의 만남에 서로를 친구라 부르고 있었다.
육군명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마주 웃었다.
“너라면 왠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하하하! 앉게.”
그사이 준비했는지 탁자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둘에게 자리를 권한 화명이 총관에게 말했다.
“중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니 주변을 물려주십시오.”
“예. 루주님.”
총관이 나가며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육군명이 말했다.
“인사하자고. 나는 육군명, 이쪽은 나와 함께하는 친구, 유대하야.”
유대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친구라면서 이제 통성명을 하는 거냐?’
육군명이 툭 치자 유대하가 먼저 포권을 취했다.
“유대하라고 합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들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한 화명은 이내 예를 갖췄다.
“반갑습니다. 홍월루주 화명입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자 육군명이 말했다.
“별일 있었지?”
“그날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한바탕 떠들썩했을 거야.”
무림인이 전쟁을 하든 말든 기루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무림에 한 발을 걸친 상단.
중원무림맹의 움직임에 귀추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보통 무인은 아닌 것 같더라니.’
중원무림맹의 무인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꺼낸 이야기를 보면 상대는 그에 얽힌 곳의 무인임이 분명했다.
화명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해보고자 노력 중일세.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기루에 남는 방을 좀 빌리고 싶네.”
대뜸 방부터 달라는 말이 나왔음에도 화명의 눈빛은 진중했다.
“몇 명이나 묵을 생각인가?”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방 안에 깔린다.
“여유롭게 마흔 명 정도. 며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외부에 노출되어선 안 돼.”
“음.”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인 화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부를 정하기 전에 확실히 알아둬야겠군. 자네는 누군가?”
짐작 가는 것은 있으나 그의 입에서 듣고 싶었다.
육군명은 느긋하게 목을 축이며 말했다.
“그날 자네는 내게 분명 이런 말을 했었지.”
“내가 했던 말?”
“전쟁에서 오대표국이 승리하면 자네의 세상이 어려워질 거라 하지 않았나?”
“그랬던 것 같군.”
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 층 난간에 기대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있다.
그의 집안인 천하상단은 무림 제일 방파인 화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상단주 화영이 화령의 대군사 화윤의 형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까지 오대표국의 손이 미치지 않았으나 저들이 중원을 거머쥐고 화령보다 덩치를 불린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화명의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이 이어지는 가운데, 육군명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에 짙게 깔렸다.
“태산표국은 무너졌다. 회남표국 역시 무너졌지. 자네의 바람을 이뤄줄 손님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