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44)
◈ 244화. 복령천주 황천패
“일어났냐.”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에 이어 발을 내디딘 중년인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난다.
팔 척 장신에 텁석부리 수염, 범과 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는 마치 불가의 사천왕을 연상케 할 만큼 매서웠다.
“괜찮어?”
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그 모습은 범인이라면 오금을 지릴 만큼 오싹할 것이다.
‘황천패.’
무려 십여 년 만에 만난 그는 그때보다 더욱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일어나지 못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개처럼 두들겨 맞고 돌아왔는데 말이야.”
모욕적인 말이었음에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황천패 특유의 분위기가 반발심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네?”
“놈의 공격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순간 시신을 바꿔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음. 그래.”
가만히 끄덕이던 황천패가 운화결의 팔을 슬쩍 움켜쥐었다.
“진짜냐.”
마치 찍어누르듯 묵직한 목소리에 이어 황천패의 부리부리한 눈이 운화결을 꿰뚫어 보듯 직시한다.
순간 왠지 모를 오한이 느껴지며 서늘한 공기가 실내를 지배했다.
“……예.”
운화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황천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히죽 웃었다.
“잘했다. 여자가 하나 있었다며. 상심이 크겠어.”
임교영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운화결은 모르지 않았다.
더불어 황천패의 빛나는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꿰뚫어 보듯 주시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
운화결은 입술을 깨물어 말을 아꼈다.
어색한 정적 속에 운화결은 뛰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지그시 바라보던 황천패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표국의 일은 들었다. 진무립이라는 아이가 팔천영신공을 사용한다고?”
어차피 소문이 돈 이상 어설픈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운화결은 자신이 느낀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 초식과 초식의 연결, 출수와 회수의 완숙도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내력까지. 놈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저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눈가를 찡그린 황천패가 탄성을 흘렸다.
“크으! 그놈 천음지첸가 뭔가 그거라던데. 그런 괴물이 팔천영신공을 익혔다면 네가 당해내긴 어렵지. 어쨌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죄송합니다. 표국을 잃었습니다.”
당초 보고한 계획은 중원과 상천을 상잔시키는 것.
그런데 진무립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어긋나 오대표국과 중원이 싸우게 된 것이다.
황천패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나간 거 어쩔 수 있나. 그것들 정체는 나도 몰랐는데 뭐. 중원의 힘을 그만큼 빼놨으면 됐어. 지금은 잘 처먹고, 푹 자고, 잘 싸면서 쉬어.”
운화결의 어깨를 두드린 황천패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천주님.”
“응.”
“제게 놈을 잡을 기회를 주십시오.”
순간 운화결의 전신에서 쏟아진 오싹한 살기가 실내를 잠식했다.
고개 돌린 황천패가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본다.
“되겠어?”
전투가 이어진 과정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화결이 다시 싸운다 한들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판을 깔아주신다면 반드시 잡아 보이겠습니다.”
“무슨 판.”
“분하게도 저 혼자선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조력자가 있다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습니다.”
설지량과 자신이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복령천은 소수정예.
진무립을 잡을 정도의 조력자라면 적지 않은 전력을 데려가야 한다.
운화결은 복령천의 정예를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턱을 매만지던 황천패가 작게 끄덕였다.
“음. 알았어. 생각해본다.”
그 말을 끝으로 초옥을 나선 황천패가 심산유곡의 절경을 눈에 담았다.
계곡물이 곁으로 흐르는 아담한 분지.
옹기종기 모인 수십 채의 초옥이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할 만큼 아름답다.
“좋구만.”
“주군.”
밖에서 기다리던 곱사등이 노인이 실실 웃으며 다가온다.
주름 가득한 그 얼굴은 흡사 지옥의 마귀를 연상시킬 만큼 흉측하다.
“약환.”
전대 수장 황운천을 곁에서 모신 노고수이자 과거 팔황문의 회천대계를 계획한 장본인.
만일 그가 내상을 입고 은거하지 않았더라면 전쟁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복령천의 중론이었다.
혈야광인의 제조법을 보완해 혈교에 흘린 것도 바로 그였다.
약환이라 불린 노인이 언덕을 내려가는 황천패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킬킬킬. 운가놈은 좀 어떻습니까?”
솜털이 쭈뼛 설 만큼 기괴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황천패는 익숙한 듯 담담했다.
“비싼 걸 처먹었으니 달포 안에는 일어나겠지. 그보다…….”
일순 주변에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공기가 감돌더니 황천패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자네. 마을에 다녀왔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고압적인 눈빛에 약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약환의 존재는 설지량조차 알아내지 못했을 만큼 복령천 내부에서도 극비에 다루고 있었다.
“영감. 내 분명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건데.”
그저 노기를 드러냈을 뿐인데 주변 공기가 얼음장처럼 얼어붙는다.
서릿발 같은 기운이 전신을 감싸고 있음에도 약환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주군. 급히 실험 재료를 구해오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순간 차가운 공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쓸데없이 싸돌아다니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애들한테 말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듣냐. 나이를 처먹어서 못 알아먹냐?”
“명심하겠습니다.”
황천패가 노기를 거두자 약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실실 웃는다.
“운가놈이 뭐라고 합니까?”
직전에 황천패의 진노를 한 몸에 받았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황천패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살아 돌아온 과정은 그럴싸해.”
“그렇습니까?”
“광룡을 잡겠다며 판을 깔아달라고 하던데.”
“흘…….”
“이대로 버리기엔 놈의 무재와 공들인 세월이 아깝단 말야. 오죽하면 경극까지 하면서 잡아 온 게 아닌가. 자네 생각은 어때.”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모르면 그저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아닌가.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겠는데?”
약환은 아차 싶었는지 곧장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군요. 킬킬!”
인상을 쓴 황천패가 약환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한 번에 알아들었으면 좋잖아.”
“분명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생존자는 전무.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과정도 왠지 석연치가 않습지요.”
순간 황천패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치고 사라졌다.
“저쪽에 붙었다?”
“화가보의 멸문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살인멸구하지 않으셨습니까? 내막을 모르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히죽 웃는 약환의 눈에 광기가 스쳐 갔다.
“혹시 모르니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들어보지요. 킬킬킬!”
황천패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야 내 지낭이지. 그건 자네한테 맡기고, 검존 그 인간은 어디에 있어.”
팔존이 모두 죽고 남은 이는 오로지 검존 한 명뿐이었다.
“얼마 전 폐관에서 나온 모양입니다. 강남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기에 보냈지요.”
“그 인간, 신룡한테 품은 원한이 진짜 살벌하던데 그냥 보내도 되겠는가?”
“클클클. 대계를 앞두고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영감. 설마 그 인간도 의심하냐?”
약환은 히죽거리며 답했다.
“소인이 의심하지 않는 자는 주군밖에 없습니다.”
황천패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그건 또 모를 일이지. 안 그런가?”
“킬킬킬!”
약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성큼 발을 내디딘 황천패가 앞서 나가며 물었다.
“어느 마을에 다녀왔어.”
“동령촌입니다.”
이곳에서 팔십 리 떨어진 산속의 작은 촌락이다.
고개를 끄덕인 황천패가 어깨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어이. 왕조야.”
뒤따르던 호위 왕조가 순식간에 곁으로 따라붙는다.
“예. 주군.”
느긋하게 뒷짐을 진 황천패가 성큼성큼 나아가며 말했다.
“동령촌이란다. 니가 알아서 좀 해라.”
섬뜩하게 눈을 빛낸 왕조가 즉시 예를 갖췄다.
“다녀오겠습니다.”
홀로 남은 운화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간의 행보를 보아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족쇄를 채우려 하겠지.’
무엇이든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교영.’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운화결은 각오를 다졌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 * *
맑게 갠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모처럼 마당에 나온 임교영은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저와 같은 하늘을 보고 계실까요.’
부상조차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떠난 부군.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만 느껴진다.
“아가씨.”
부엌에서 나온 지여령이 애써 웃으며 다가왔다.
“아직 춥습니다. 찬바람은 산모에게 좋지 않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요.”
그녀의 서글픈 미소에 지여령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운화결이 향한 곳은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복마전이다.
물론 그를 믿고 있으나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만큼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대로 우릴 두는 건가?’
안가를 마련해준 뒤로 상천의 무인이 방문하는 것은 식재료를 사다 줄 때뿐이었다.
설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볼까 싶어 문밖으로도 나가보았으나 그 어떤 제지도 없었다.
‘이대로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칠까?’
잠시 고민하던 지여령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운화결이 목적을 갖고 복마전에 들어간 이상 섣불리 돌아다니다 발각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수문화는 그것을 알기에 굳이 감시를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디 무탈히 돌아오십시오.’
* * *
거대한 범선이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물살을 가른다.
불어온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에도 만사평의 교룡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족히 수십 명은 들어설 만한 선실.
상석에 앉은 만사평이 흰 수염을 매만지며 침음했다.
“으음.”
결국 그의 시선을 참지 못한 진무립이 물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리 봐도 닮았단 말이야.”
“뭐가 닮았다는 겁니까?”
“자네의 얼굴 말일세. 내 젊은 시절을 빼다 박았단 말이지. 자네, 혹시 부모가 어디서 주워온 자식이 아니던가?”
“풉.”
순간 용추가 마시던 술을 내뿜었다.
곁에 앉은 동초개가 입가에 손을 올리고 속삭인다.
“저 영감님. 혹시 노망났대요?”
“노망이 뭐냐.”
“형님도 차암. 늙어서 정신이 나갔다는 소리예요.”
“그럼 노망인가?”
“수로채의 미래가 어둡군요.”
만사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 들린다. 이놈들아.”
“억.”
움찔한 동초개가 자라목을 하고 입을 가렸다.
눈을 흘기던 만사평은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놈의 젊을 때를 보는 듯하구나.’
불패신도 양삼.
왠지 그의 얼굴이 생각난 것이다.
단려화가 맑은 미소로 말했다.
“백부님. 못 보던 사이 훨씬 젊어지신 것 같아요.”
“흘흘흘. 역시 내 조카로구나. 보는 눈이 있어. 어떻게, 무림행은 재미있었느냐?”
“그럼요. 화령도에선 배우지 못한 것들을 많이 배운 느낌이에요.”
“돌아가는 길에 사내도 하나 낚아서 가고 말이야.”
단려화는 싱긋 웃었다.
“그렇죠.”
농담을 던졌는데 진심이 돌아온다.
“……어?”
순간 휘둥그레진 만사평의 눈이 휙 돌아갔다.
“자, 자네가…….”
그의 찌릿한 시선에 동초개가 가자미눈을 뜨고 말했다.
“저 아닌데요.”
“안다. 네 옆에 있는 인간 말이다.”
동초개 너머에는 실소를 흘리는 진무립이 있었다.
만사평이 믿기지 않는 듯 단려화에게 묻는다.
“정말 상천의 천주란 말이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허허.”
만사평은 문득 구석에 앉은 탁이신을 쳐다봤다.
“네놈 생각은 어떠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탁이신 역시 단려화와 진무립 사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지금 섣불리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
만사평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화령과 오랜 관계를 유지해온 만사평은 대부분의 무인과 친분이 있다.
그런데 단 세 사람.
악왕 탁이신과 검황 천영, 무결천검 검신운만큼은 수십 년이 지나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왜 하필 저 재미없는 녀석이 온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