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89)
◈ 289화. 구슬픈 메아리
전투가 끝났다.
소걸개의 승리를 확인한 적모개가 그제야 힘을 잃고 쓰러진다.
지금의 상처는 한참 전에 우군보에게 당한 것이다.
애써 괜찮은 척, 전투가 끝날 때까지 소걸개가 동요하지 않도록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던 것이었다.
“분타주!”
소걸개를 눕힌 동초개가 한달음에 달려와 적모개의 곁에 꿇어앉았다.
지혈을 위해 혈도를 두드리는 그의 손이 다급하다.
방도들의 죽음을 앞에서도 억눌렀었던 눈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 슬며시 움직인 적모개의 눈길이 오랜 부하에게 닿았다.
“이 녀석아.”
내뱉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동초개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피가 쏟아지는 가슴을 짓눌렀다.
“됐으니까 말하지 말아요.”
“들어라.”
“그 입 다물라니까!”
오열로 뒤섞인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솟구친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흩어지던 동공에도 초점이 돌아온다.
적모개는 희미한 미소로 말했다.
“……들어라.”
피로 흥건한 동초개의 손이 적모개의 가슴을 애절하게 짓누른다.
“제발요. 죽지 말아요. 같이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잖아요. 살아서 같이 사천으로 돌아가잔 말이에요!”
절절한 목소리가 구슬프게 메아리친다.
적모개가 물었다.
“적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눌하던 말에 힘이 붙자 동초개가 반색하며 답했다.
“흩어진 방도들이 뭉치니까 물러갔어요.”
“기습을 가하고 빠졌다는 것은 놈들이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거다.”
관제묘를 떠나 이곳까지 오면서.
그리고 우군보에게 당한 채로 버티고 서 있는 와중에도 적모개의 머리는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회동이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여월이 아니란 말씀이세요?”
“그래.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하세요.”
적모개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서천림 밖에 머무는 적의 숫자를 파악해야 한다. 숲을 공격한 자들이 전부라면 적의 선발대일 거다. 그러나 이곳의 개방도와 비슷한 수가 남아있거나 그보다 적은 숫자라면 다른 놈들은 이미 감시망을 통과했을 거다.”
동초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저들의 기습으로 감시망이 흔들리지 않았느냐?”
순간 동초개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아!’
적모개의 차가운 손이 동초개의 손등에 얹어진다.
“생각보다 수가 많다면 지원을 요청하고 백 리 밖으로 물러나라. 수가 비슷하거나 조금 적다면 너는 무림맹에 전서로 알리고 사천으로 가라.”
“그리고요?”
“초평천 대협에게 당장 무인을 이끌고 소화산으로 출병하시라고 전해라. 서천림을 통과했다면 사천은 공격받지 않을 테니 비워도 상관없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치료를…….”
“크윽.”
순간 평온하던 적모개의 숨결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아, 아!”
놀란 동초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진다.
그를 향한 적모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힌다.
얼빠진 구석이 있지만 어디 가서 굶고 다닐 녀석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 동초개와 함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몫까지 잘…… 살아라.”
“분타주! 분타주!”
동초개의 다급한 외침이 점점 아득해지며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개방에 들어간 뒤 소걸개와 친구가 되었던 어린 시절부터.
역모를 일으킨 스승으로 인해 머나먼 사천으로 떠나던 그날과.
사천에서 허송세월하던 자신이 무림맹 비각의 부각주가 되기까지.
곡절 많은 인생 속에, 돌이켜보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그를 알게 된 순간부터였다.
한 번 좌절했던 인생을 다시 불태울 수 있게 해준 그날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네 꿈은 무엇인가?’
‘거지에게 꿈은 무슨. 그저 여기서 제자들과 몸 성히 잘 먹고 잘 지내는 게 꿈이라면 꿈이겠지.’
‘앞으로 나를 도와라. 나와 함께한다면 언젠가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자신은 허풍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소공자.’
진무립이 천하를 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실패란 없으니까.
천하를 구한 영웅에게 기억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죽음도 없을 것이다.
‘부디 강녕하시오.’
흩어지는 미소와 함께 빛을 잃어가던 눈동자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들었고.
마지막 빛을 발한 불씨가 이곳 서천림에서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분타주-!”
동초개의 애처로운 절규가 밤하늘로 솟구쳤다.
* * *
소화산 남서쪽으로 백 리 밖의 야산.
진무립과 단려화는 오목하게 들어간 동굴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단려화가 동굴의 입구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맑은 그녀의 눈동자에 무수한 별 무리가 아름답게 수 놓인다.
‘이 기분은 뭘까?’
아까부터 줄곧 가슴의 고동이 멈추질 않는다.
눕다 말고 일어난 진무립이 그녀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잠이 안 오나?”
“그러네요.”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진무립이 이내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신경 쓰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단려화가 저도 모르는 사이 미소 짓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공유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큰일을 앞둔 지금, 그녀는 굳이 진무립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동굴 안쪽의 모닥불 곁으로 걸어갔다.
“별거 아니에요.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그만 자요.”
진무립이 모포를 들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
“그럴게요.”
벽에 나란히 기대앉은 두 사람이 같은 모포를 덮고 눈을 감았다.
“전쟁이 끝나면…… 사천에 다녀오고 싶어요.”
기나긴 여정의 시작점이 된 곳이다.
그곳에서 진무립을 만났고 많은 이들을 사귀었으며 오늘까지 다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이들은 잘 지내는지, 사천의 드넓은 평야와 웅장한 산새는 예전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반겨줄지 궁금해졌다.
진무립은 살포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답했다.
“그래. 이 전쟁을 끝내고 함께 가자.”
묵묵히 끄덕인 단려화가 진무립의 품으로 파고든다.
타오르는 모닥불과 함께 깊어지는 산중의 밤.
동굴 밖의 밤하늘에서, 무수한 별 무리에 섞여 있던 작은 별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 * *
서천림의 전투가 멈추고 개방도들이 바쁘게 수습을 할 무렵.
천마 장천무는 신교의 정예들과 함께 황하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시원하게 흐르는군.”
부교주 천살염마 군도가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우리가 서천림을 통과했다는 걸 알면 놈들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장천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쳐 간다.
천정각주 임화교가 곁으로 다가왔다.
“후발대에서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계속하라.”
“감시망을 흔들고 빠르게 숲을 돌파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소걸개를 죽이지는 못했답니다.”
장천무의 미간이 좁아진다.
“멍청한 놈들.”
“아무래도 무림 칠경의 이름이 허언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나 중독으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그와 함께 있던 비각의 부각주를 죽였다고 하니 한동안 혼란을 수습하느라 바쁠 겁니다.”
“비각의 부각주가 누구지?”
“적모개라는 자입니다.”
확실하진 않으나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장천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지.”
임화교가 깊게 읍을 하며 말했다.
“강을 건너 후발대를 기다리겠습니다.”
* * *
치열한 사투가 벌어진 서천림의 아담한 공터.
전투 현장을 정리한 개방도 일부가 소걸개의 곁으로 모였다.
의술에 조예가 있는 오결제자가 혼절한 소걸개를 살피는 가운데 뒤에 선 방도들이 다그치듯 물었다.
“좀 어떠냐?”
“뭐라고 말 좀 해봐라. 그 입은 처먹을 때만 열리는 거냐?”
“……시끄럽네.”
잔뜩 인상을 쓴 중년 거지, 오결제자 정무개가 소걸개의 맥을 놓고 돌아봤다.
“일단 독이 퍼지는 건 막았다. 하지만 이 이상은 못 해. 당장 마을로 옮겨서 의원을 데려와야 해.”
그들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운다.
“소방주는 이렇게 됐고…… 부각주까지…….”
고개 돌린 오결제자의 눈에 가지런히 수습된 적모개의 시신이 들어온다.
동초개가 소걸개의 곁에 가지런히 눕혀둔 것이다.
졸지에 이곳 상황을 수습할 두 사람이 쓰러졌으니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누군가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동초개는 어디에 갔지?”
수십 명의 방도가 모여든 이곳 어디에도 동초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각.
동초개는 이미 서천림을 돌파해 서쪽 들판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우거진 수풀 속, 몸을 숨긴 동초개의 시야에 눈 덮인 평야와 백 장 남짓한 폭의 협곡이 들어온다.
‘확인하려면 지금 당장 해야 돼.’
스승처럼 따랐던 적모개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라면 기습을 마치고 돌아간 지금이 염탐의 적기다.
은밀히 움직인 동초개는 협곡 좌측의 산을 빠르게 올라갔다.
‘분타주.’
멋모르던 자신을 데려와 마치 혈육처럼 대해주었던 스승이다.
자주 투닥거리며 다투기도 했으나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바쁘게 발을 움직이는 동초개는 차오르는 슬픔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분타주가 맡긴 마지막 임무. 반드시 해낼게요.’
자신이 해내지 못하면 그의 죽음은 개죽음이 된다.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한다.
동초개는 그것이 자신을 돌봐준 스승에 대한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협곡 아래에서 바람에 섞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바짝 붙은 동초개가 협곡을 주시하며 살금살금 올라간다.
“협곡의 입구가 좁으니 정면에서 오지는 못할 것이다. 개방도 피해 수습에 정신이 없을 테니 지금 당장 움직이지는 못할 테지. 부상자의 수습이 끝나면 조를 짜서 순차적으로 좌우의 산을 감시해라.”
동초개의 눈이 가늘어진다.
‘있다.’
확실히 목소리를 들었다.
눈에 부딪힌 달빛이 제법 밝다곤 하나 여기선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
조금 더 올라간 동초개는 툭 튀어나온 절벽 끝에 엎드려 협곡을 확인했다.
달빛이 은은히 반사되는 절벽 밑에.
족히 수천에 달하는 흑의인들이 숨어서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숫자를 헤아리는 동초개의 뇌리에 적모개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수가 많다면 지원을 요청하고 백 리 밖으로 물러나라. 수가 비슷하거나 조금 적다면 너는 무림맹에 전서로 알리고 사천으로 가라.’
적의 본대라면 물러나고 아니라면 알리라는 얘기다.
소리 없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사방을 확인하던 동초개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수가 적다!’
동초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분명 아까 공격이 아니라 감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적모개의 말대로 저들의 본대는 감시망이 흔들린 사이 서천림을 돌파했을 확률이 높다.
동초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타주. 역시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고금에 유례없는 천재와 함께한 탓에 가려진 감이 있으나 적모개의 두뇌 또한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시대를 잘못 타고나 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을 뿐이다.
곡절 끝에 겨우 진무립과 만나 날개를 펼쳐보나 했는데 억울하게도 너무 빨리 가버렸다.
동초개는 사무치는 슬픔을 억누르며 절벽 밖으로 조심스럽게 기어 나왔다.
확실하게 확인했다.
이젠 적모개의 말대로 움직이면 된다.
소매로 눈가를 훔친 동초개가 빠르게 산을 내려와 서천림에 스며들었다.
잠시 후, 숲의 동쪽 하늘로 한 마리 전서구가 힘차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