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5)
◈ 35화. 가을비
궤짝 내부는 차곡차곡 쌓인 은자가 절반을 채웠고 나머지 절반은 전표로 수북했다.
놀란 후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헙.”
진무립이 조장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얼마씩 필요하냐?”
전유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설마 저희에게도 나눠주신다는 말씀이신지요?”
“이걸 설마 나 혼자 다 먹겠냐? 주긴 줄 건데 그 전에.”
은자 몇 개를 손에 쥔 진무립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기루에서 나 의심한 새끼 손들어봐.”
“······.”
역시나 예측할 수 없는 상관이다.
모두가 눈치만 살피는 가운데 과묵한 주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너야?”
진무립의 말에 고개 저은 주초는 천천히 손가락을 옮겨갔고, 풍연을 제외한 조장들은 울상을 지었다.
피식 웃은 진무립은 궤짝을 닫고 일어났다.
묵혈방주의 재산은 그게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침상 밑으로 이어진 밀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어보니 십여 개의 금괴와 수북한 은자가 쌓여 있었다.
물론 전표만큼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묵혈방의 규모를 고려하면 어지간히 긁어모은 모양이었다.
‘궤짝의 전표와 합치면 전부 오십만은 나오겠군.’
전표를 세어 본 진무립은 한 뭉치를 조장들에게 건넸다.
“일 인당 은자 백 개씩 나눠주고 너희들은 그 두 배를 챙겨라.”
부하들에게 베푸는 것은 아낄 필요가 없다.
“감사합니다. 대주!”
통쾌하게 복수를 성공한 것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까지 생기자 모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남은 금괴를 챙긴 진무립은 전유에게 말했다.
“날이 밝는 즉시 부하들을 데리고 묵혈방에게 당한 사람들을 조사해라.”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부른 이는 주초였다.
“삼조는 여기 있는 은자를 모두 금정무문으로 옮겨라. 은자는 피해자들에게 당우와 금정무문의 이름으로 돌려줄 거다.”
수고스럽게 무거운 은자를 들고 가느니 기왕 빚을 만들어두기로 한 거 확실하게 하는 편이 낫다.
고개를 끄덕인 주초가 부하들을 데리러 갔다.
상황이 정리되자 진무립은 밀실을 나왔다.
불길이 잦아든 장원.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묵혈방의 장원을 나섰다.
진무립의 뒤를 따르는 단려화는 생각에 잠겼다.
때론 난폭하고 거침이 없으며 과격하다.
그러나 부하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진무립의 행동에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나니 진무립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적에게는 자비가 없고 부하들에게는 관대하구나.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오늘의 경험에서 얻은 것도 있다.
화령도에서 태어난 그녀가 전쟁을 경험할 일은 없었다.
물론 정체를 감추고 세상을 주유하기도 했고 악적을 처단하며 살인도 해봤으나 오늘 같은 전쟁은 처음이었다.
감시하겠다고 따라나선 진무립의 곁에서 그녀는 진짜 무림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
“크으······.”
정신을 차린 당우의 입에서 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약 기운이 떨어지니 전신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 육신이 아닌 마음에서 느껴졌다.
‘내가······. 내가 그런 짓을······.’
너무 세상을 가볍게 봤다.
당가에서, 성도에서 벗어나면 자신도 두 형처럼 무림의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 치 혀에 놀아나 묵혈방주의 뒷배가 되어준 자신에게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
그녀들의 초췌한 얼굴이 떠오르자 괴로움이 물밀 듯 몰려오며 눈물이 쏟아졌다.
“크흐흑.”
“괴로우냐?”
바로 옆에서 기척도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자신을 먼지 나게 때렸던 진무립의 것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으나 이젠 상관없었다.
자신은 맞아도 싸니까.
정작 원망스러운 것은 진무립의 거짓말이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이놈이 나쁜 놈이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진무립은 자신에게 비난받을 기회를, 그들에게 용서를 빌 기회를 빼앗은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그들의 대협으로 만들었습니까?”
“호위도 없이 혼자 집을 나온 이유는 형들처럼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게 아닌가?”
“나는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거짓 대협을 원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직도 투정을 부리는군. 좀 더 때렸어야 했는데.”
“······.”
“혼자서 자책하고 투정 부리고 속앓이를 하면 네놈이 원하던 진짜 대협이 될 수 있나? 그럴 시간에 저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어른이 될 생각부터 해라. 멍청한 자식아.”
독설을 내뱉은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만났을 때도 오늘과 변함이 없다면 그땐 진짜 지옥을 보게 될 거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팔을 들어 착잡한 얼굴을 가린 당우는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
이튿날 아침.
떠날 채비를 마친 진무립에게 문주 신환이 찾아왔다.
“조금 더 쉬었다 가시지 너무 아쉽구려.”
“충분히 쉬었습니다.”
“변변히 대접도 못 했는데······.”
진무립은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번 들르겠습니다.”
“꼭 그래 주길 바라오.”
웃으며 말한 신환이 품에서 비단으로 감싼 서신을 내밀었다.
“마도림의 림주께 전해주시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내 조만간 한 번 찾아뵙겠소이다.”
“그리 전해드리지요.”
“소공자.”
진무립의 발을 붙잡은 신환은 더없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정말 고맙소. 절대 잊지 않으리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의 진심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진무립도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진무립은 부하들과 함께 장원을 나섰다.
조용한 방 안.
창밖으로 광룡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당우는 아직까지 어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협이라.’
평창현을 나선 일행은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대주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단려화의 말에 진무립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야?”
“당공자를 바른길로 인도하려 했던 게 아닌가요?”
“순진하긴.”
진무립은 피식 웃었다.
“난 그 정도로 호인이 아니야. 내가 뭐하러 그런 놈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겠어?”
“그게 아니란 말인가요?”
진무립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사천맹이라, 조만간 다시 볼 날이 올 거다.’
***
가을비가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하게 쏟아진다.
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잎에 잠시 머문 빗방울은 광룡대의 전신을 빠르게 적셔갔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그칠 줄 모르는 비와 점점 짙어지는 어둠에 단려화가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부지런히 달려도 오늘 안에 중경까지 가는 건 어렵겠어요.”
진무립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하루 거리인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쉬어 갈 곳을 찾아야겠다. 유대하.”
“알겠습니다.”
유대하는 즉시 조장들을 불러모았다.
“조장들은 방향을 정해라. 시간은 반시진. 탐색은 이인 일조로 한다.”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짝을 정하는 사이 진무립은 큰 나무 밑으로 걸어가 손을 붙였다.
단려화가 물었다.
“뭘 하는 건가요?”
“곧 밤이다. 불을 붙이면 찾아오기 편할 거다.”
진무립은 극양의 내력을 끌어올려 장심으로 유도했다.
그러자 축축이 젖은 나무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더니 놀랍게도 불이 붙었다.
“뭐 좋은 거라도 먹었나 봐요.”
“태어나자마자 천양신단(天陽烥團)을 먹였다더라.”
“천양신단?”
단려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양신단의 재료인 천양초는 분화한 화산의 절벽에서 피어나는 꽃으로 용암의 열기를 이겨내고 꽃봉오리를 틔운다.
쉽게 볼 수도 없을뿐더러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에서만 피는 꽃이기에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절대 가져올 수도 없었다.
천양초를 연단해 만든 천양신단은 극양의 기운을 간직한 영단으로 섣불리 복용했다간 체내부터 타들어 가기 때문에 반드시 극음의 영약과 함께 복용해야 했다.
“그걸 먹고 살아남았단 말인가요?”
단려화가 놀라자 진무립이 물었다.
“먹었으니 살아남은 거야. 난 천음지체거든.”
너무 놀란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상천의 천주에 무성의 무공에 천음지체로 태어나 천양신단까지 먹었다고? 어떻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그녀가 놀란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점점 열기를 더해가던 나무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돌아올 땐 불빛을 보고 찾아와라!”
“예!”
부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진무립은 반대편 나무 밑으로 이동했다.
‘제법 걸리겠어.’
정가장주를 구할 때처럼 동굴을 찾아보려 했으나 인근에는 딱히 그런 장소가 없었다.
단려화가 빙그레 웃으며 곁에 앉았다.
“그래도 불을 피우니까 춥지는 않네요.”
“추위를 타는 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군.”
“천음지체라서 그런가요?”
“그래. 재밌는 걸 보여주지.”
검을 뽑아 든 진무립은 나뭇가지 여러 개를 주워 커다란 나무에 박았다.
이어서 진무립의 손이 나뭇가지를 만지고 지나가자 그것은 얼음으로 만든 지붕이 되었다.
빗방울이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자 단려화는 물론이고 연소정마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 때문에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반시진은 가겠지. 좀 돌아보고 올 테니 쉬고 있어.”
“알았어요.”
진무립이 사라지자 단려화와 연소정은 신기한 듯 얼음 지붕을 만져 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비밀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가씨께서 왜 저 사내를 지켜보려 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단려화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고생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처마 밑에 쪼그려 앉은 연소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역시 많은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며칠간 경험한 것은 화령도에서 배울 수 없는 진짜 무림이었다.
연소정은 타오르는 나무를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외유가 길어지면 영주님과 대부인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어쩌면 아가씨를 모셔가기 위해 사람을 보내실지도 모릅니다.”
단려화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건 좀 곤란한데.’
그들이 진무립과 만난다고 바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면 접촉은 피하고 싶었다.
“일단 돌아갔다가 허락을 구하고 다시 오는 건 어떨는지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연소정은 모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두 분께 직접 말씀 올리겠습니다. 서신보다는 상황을 잘 아는 제가 직접 아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응?”
단려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령도를 벗어난 순간부터 절대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연소정이다.
그런 그녀가 자처해서 화령도에 가겠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연소정이 말했다.
“진무립이라는 사내. 비밀스럽고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가 누구를 칭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단려화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게 보여?”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적에겐 더없이 위험한 사람이지만 아군이 된다면 충분히 등을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그의 아군으로 곁에 머문다면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을 듯합니다.”
“생각보다 평가가 후하네. 그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저는 그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저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뭐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진공자를 따라다니는 걸 반대했었잖아.”
“당우 때문입니다.”
뜻밖의 말에 단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공자 때문이라니?”
연소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물 안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란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 않았습니까? 잘난 척은 마음에 안 들지만 진공자는 분명 배울 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곁에 머무는 건 아가씨의 견문을 넓힐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화령도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모든 것이 있는 공간이지만 지난 며칠 간의 경험은 그곳에선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연소정은 친자매처럼 생각하는 단려화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랐다.
단려화는 자신을 위해 이런 말을 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는 진심 어린 미소로 말했다.
“날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당장 가려는 건 아니지?”
“중경까지는 함께 가겠습니다. 어차피 강남으로 통하는 길이니까요.”
“서신을 쓸 시간은 있겠네.”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야.”
주변을 힐끔 둘러본 연소정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 사내를 마음에 두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응?”
내막을 모르는 연소정에겐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당황한 단려화가 할 말을 찾는 사이, 연소정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변했다.
“아가씨. 사내는 전부 도둑놈입니다. 쉽게 믿으시면 절대 안 됩니다.”
“······고마워.”
한숨을 내쉰 단려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무가 시작된 시점부터 정확히 반시진 뒤에 흩어졌던 광룡대가 다시 집결했다.
주초가 찾아온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이틀 뒤 아침, 마침내 중경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