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5)
◈ 5화. 하겠습니다
우가산과 함께 멍하니 서 있던 유대하는 진무립이 사라진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외림원주님.”
상념에 잠겨있던 것은 우가산도 마찬가지, 그도 유대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뭔가?”
“소공자께 호위를 고르라고 한 것은 원주님이라고 들었습니다. 호위의 임무는 아직도 유효합니까?”
유대하가 소속된 묵검대는 외림원 산하. 유대하를 대주에 임명한 것도, 평대원으로 강등한 것도 우가산이었다.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지?”
“그걸 어떻게······.”
“철상이 그러더군. 근래 자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말일세.”
“······.”
유대하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를 따라가고 싶은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 유대하는 짧은 생각을 거쳐 입을 열었다.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자존심을 내세운 것은 본 림만이 아닙니다. 제가 떠나려 했던 것도 그 자존심 때문이니까요. 소공자는 이곳에 제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면 왠지 저도 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잿빛 하늘, 무채색의 세상에서 다른 빛을 볼 수 있다면 그의 곁에서가 아닐까 싶었다.
“소공자의 사고방식은 늙은 나로선 이해 불가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우가산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소공자의 말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네. 젊은 자네라면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
우가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공자를 잘 모시게.”
유대하는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유대하가 진무립을 쫓아 사라지자 우가산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진무립은 자신의 시험을 통과했다.
만일 무력을 사용해 객잔을 빼앗았다면 대검문에게 움직일 빌미를 주었을 터, 진무립은 자존심을 내려놓은 대신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객잔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소공자가 맞고 돌아왔으니 무인들의 자존심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이래선 소공자에게 어떤 자릴 맡겨도 따를 놈이 있을지 모르겠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매만진 우가산은 조금 전 말하지 못한 진실을 고하기 위해 다시 태경원으로 향했다.
***
소문이 중경 전체로 번지자 우가산의 염려대로 무인들의 자존심은 크게 상했다.
소공자라는 사람이 흑도 무리에게 얻어맞고 돌아왔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퍼렇게 부은 얼굴을 마주칠 때면 예를 갖추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며칠간 진무립을 따라다니던 유대하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무인들이 소공자께 존중을······.”
“어쩔 수 없지.”
“예?”
의외의 대답에 유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며칠 전 했던 말을 생각하면 지금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무립은 이런 상황에서도 웃었다.
“원주쯤 되는 사람이라면 전체를 봐야 하기 때문에 내 말뜻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앞만 보고 걷는 저들은 다르다.”
“마음이 상하지는 않으십니까?”
“마음 상한다고 달라질 게 있느냐? 하나씩 붙잡고 나는 이런 생각으로 그리했다. 하고 설명하고 다닐 순 없지 않나?”
느긋하게 뒷짐을 진 진무립의 앞에 마영각(魔靈閣) 무인들이 나타났다.
점점 가까워지던 그들은 경멸의 눈초리로 진무립을 흘겨보곤 사라졌다.
진무립은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의 인식이란 말로 붙잡고 설명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지. 행동으로 보여주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위에 선 자가 해야 할 일이다.”
유대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무립을 쳐다봤다.
‘연배는 나와 비슷하거늘······.’
사냥꾼의 아들로 살아왔다고 들었는데 생각하는 것은 마치 거대 방파의 수장을 연상케 한다.
‘나와는 무엇이 다른 건가?’
앞서 나가던 진무립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한 가지 좋은 점도 있군.”
“그게 뭡니까?”
“욕은 전부 내가 처먹으니 너를 향한 비난의 눈초리는 사라졌잖아?”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처럼 보이다가도 이럴 땐 마치 장난꾸러기 어린아이 같다.
유대하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고마워해야 합니까?”
“당연하지. 답례로 저녁에 술이나 한 병 가져오너라. 하하하!”
죽림에 진무립의 웃음소리가 길게 퍼져 나가자 유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엇이 소공자의 진짜 모습인가?’
곁에서 관찰하며 진무립의 본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
처가의 행사로 자리를 비웠던 림주가 복귀했다.
죽림의 청무전.
태사의에 앉은 다부진 체구의 중년인, 마도림주 초무강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부친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부친 초평천이 멸문의 위기에서 마도림을 구해냈다면 아들 초무강은 과거의 전력을 되찾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단상 아래를 둘러본 초무강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소식은 들었소. 소공자가 맞고 돌아왔다고?”
각주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려 할 때, 외림원주 우가산이 앞으로 나섰다.
“모든 것은 소공자의 잘못이 아닌 제 불찰입니다. 벌은 노신에게 내려주십시오.”
초무강은 손을 내저었다.
“누구를 탓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오. 과정이야 어쨌든 내기에서는 내림원주가 이긴 모양새가 됐군. 무립에게 어울리는 자리로 생각해둔 것은 있으시오?”
수뇌들은 하나같이 초무강의 눈을 피했다.
통제하기 힘들며 무인들 사이에서 평판조차 나쁜 소공자를 자신의 부처에 소속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결국 말을 꺼냈던 상호군이 나섰다.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다곤 하나 소공자의 기지는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내림원 비선당(秘線黨)에······.”
비선당주 문강유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 우가산이 그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정보를 다루는 비선당은 소공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초무강이 물었다.
“그럼 원주께서는 어느 자리가 적합하다고 보시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우가산은 생각해온 것을 말했다.
“소공자를 위한 부처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서북부관(西北部官)의 신설을 건의합니다.”
“서북부관?”
과거 마도림이 패권을 차지했던 시기, 중경의 사업장을 관리하는 곳이 중경부관이었다.
지금은 세가 많이 기운 탓에 중경부관은 동북로를 관리하는 동북부관으로 축소된 상태.
우가산은 지금 중소방파들이 차지한 서북로에 서북부관을 신설해 진무립에게 맡기자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사이에 초무강이 물었다.
“아직 우리의 사업장 중에 서북로에 남은 것이 있었소?”
“이번에 소공자께서 되찾아온 청하객잔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나 듣고 있던 상호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외림원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소공자께 남은 앙금이라도 있단 말인가!”
“내가 고작 사사로운 정으로 이런 말을 한 것 같소?”
“그게 아니면 무엇이오? 소공자는 그대의 말도 안 되는 시험을 통과하느라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셨소. 정말 관을 봐야 만족하겠소?”
“시험이 내 실수였다는 것은 인정하겠소. 나는 소공자가 정말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오. 나는 이번 일에서 소공자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 건을 제안한 것이오.”
“가능성?”
“소공자에겐 남이 만든 판보다는 스스로 판을 만들 수 있는 자리가 적합하오. 그분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소.”
상호군은 적잖이 놀랐다.
며칠 전만 해도 누구보다 진무립을 탐탁지 않게 보던 우가산이었기 때문이다.
상호군에게서 시선을 거둔 우가산은 초무강을 향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소공자라면 남들도 예측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서북부관을 신설해주신다면 외림원의 무인을 지원하겠습니다.”
외림원에 속한 각주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원주님!”
우가산은 손을 들어 그들의 반발을 일축했다.
상호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가산을 쳐다봤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누구보다 진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우가산의 주장에 놀라지 않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림주 초무강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서북부관 신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시오?”
마도림이 서북로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벌써 오 년 전이다.
서북로를 차지한 중소방파들은 모두 대검문과 손을 잡은 자들. 최악의 경우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었다.
우가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검문의 무인이 많기는 하나 고수의 숫자는 백중세지요. 서북로를 완전히 손에 넣는다면 반등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대검문이 나날이 우리의 자금줄을 조여오는 이상, 변화가 필요하다면 소공자에게 걸어봐도 좋다는 것을 노신은 확신합니다.”
우가산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변화인가, 안주인가.
변화를 택하는 것은 각오가 필요하다.
기로에 선 초무강은 혈육의 정을 떠나 마도림을 위한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했다.
무거운 침묵이 장내에 감돌고 있을 때, 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림주님. 소공자가 도착했습니다.”
“들이거라.”
“예.”
정문이 열리고 붉은 융단을 밟은 진무립이 예를 갖췄다.
“림주님을 뵙습니다.”
예를 받으며 진무립의 얼굴을 본 초무강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부기는 가라앉았으나 아직 얼굴에는 그날의 흔적이 푸르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데려온 누님의 아들이다.
미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얼굴을 보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괜찮은 것이냐?”
진무립은 웃으며 답했다.
“별것 아닙니다.”
“밀린 업무 탓에 너를 찾아갈 여유가 없을 것 같아 불렀다. 청하객잔을 되찾아왔다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따스한 초무강의 눈길, 호의적인 두 원주의 시선과는 달리 각주들의 눈빛은 싸늘했다.
괜한 분란을 일으켜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외림원주는 너를 서북부관의 관주에 임명하자고 하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서북부관이 뭡니까?”
“중경 서북로의 사업장을 총괄하는 자리다.”
진무립은 초무강의 말뜻을 이해했다.
‘변화를 택하는가.’
보여준 것이라곤 고작 청하객잔을 되찾은 일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런 중책을 맡기고자 한다는 건 자신을 향한 우가산의 믿음에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마냥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아니었군.’
진무립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를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직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거절하시오. 소공자에겐 어려운 일이오.] [망신은 한 번으로 족하오. 괜한 분란은 만들지 마시오.]진무립이 고개를 돌리자 전음을 보냈던 두 각주는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진무립이 아니다.
“림주님.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마영각주와 환마각주가 전음으로 뭘 거절하라고 하는 통에 듣지 못했습니다.”
두 각주의 표정이 소태 씹은 듯 구겨지자 초무강은 실소를 흘렸다.
‘우원주의 말대로 역시 예측하기 어려운 녀석이로구나.’
초무강은 자중하라는 듯 두 각주를 쳐다보곤 다시 말했다.
“서북부관은 서북로의 사업장을 총괄하는 자리다. 그곳에 자리한 방파들은 모두 대검문과 손을 잡은 이들이지.”
“섣불리 자극하면 대검문이 나설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 대검문의 무인은 우리의 배가 넘는다. 하지만 서북로의 중소방파를 굴복시킨다면 숫자의 열세를 어느 정도 좁힐 수 있지. 해보겠느냐?”
성공한다면 대번에 격차를 좁힐 수 있지만 실패하면 더 큰 위기가 올 것이다.
이 일의 위험성을 모르는 초무강이 아니었으나 대책 없이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세한 숫자를 가지고도 굳이 자금줄을 조여오는 이유, 그것은 전력을 온존한 채 우릴 굴복시키기 위함이다. 저들도 정면충돌은 원치 않을 것이니 설령 무립이 실패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야.’
진무립은 장내의 따가운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하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좋다. 외림원에서 무인을 지원해줄 것이니 네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거라.”
졸지에 무인을 빼앗기게 된 외림원의 각주들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어진 진무립의 말에 그들의 고개는 휙 돌아갔다.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우가산이 서둘러 말했다.
“소공자. 서북부관의 관주가 된다는 것은 지난 일과는 경우가 다르오. 청하객잔에서 당했던 일보다 더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오. 호위를 늘려줄 테니 항시 같이 움직이시오.”
초무강도 우가산의 의견에 말을 덧붙였다.
“서북로가 중경의 한 구역일 뿐이라곤 하나 그곳 역시 도산검림의 무림과 마찬가지다. 우원주의 의견에 따르거라.”
진무립이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저를 따르고자 하겠습니까? 무인은 필요 없습니다.”
진무립의 눈빛을 보아하니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초무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님의 고집까지 그대로 닮았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천천히 걸어간 진무립은 태사의로 향하는 계단 아래에서 몸을 돌렸다.
“다들 나를 못 믿는 것 같은데 그리 걱정할 것 없소.”
좌에서 우로.
쏟아지는 시선 속에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진무립이 씩 웃었다.
“서북로를 가져온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