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68)
◈ 68화. 혈교의 안가
흰 눈에 반사 된 햇살이 눈부시다.
눈 덮인 낯선 땅, 보이는 것이라곤 황량한 벌판과 이따금 솟아난 바위뿐.
뒤를 힐끔 돌아본 회의인, 장청은 신법에 박차를 가했다.
원래 대설산맥의 감시는 시곡대의 임무다.
장청을 비롯한 회혈대 일부가 이곳에 파견된 것은 탈출한 혈야광인이 사천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총단에선 혈야광인이 노출됐다면 사천맹이 움직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혈야광인이 그토록 무서운 실혼인인가?’
혈야광인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봤을 뿐 교의 무인들도 제대로 아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설마 천무대를 보낼 줄이야.’
천무대의 강함은 이곳 서장까지 알려져 있을 만큼 유명하다.
포달랍궁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금, 변수가 될 수 있는 그들의 등장은 혈교의 입장에서 달가운 게 아니었다.
장청이 행보를 서두르는 가운데.
‘제법 빠르군.’
뒤를 쫓는 진무립은 마치 지면에 닿을 듯한 자세로 신법을 전개했다.
만일 언덕에 두 명이 남아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생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한 놈은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미끼로 죽음을 택했다.
진무립이 한 명을 살려두고 추격하는 것은 가까운 곳에 대기하는 부대가 있는지 확인하고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지나온 고원에 비해 바람은 많이 불지 않는다.
‘추격전은 자신 있지.’
상천이 세워지기 전, 은곡을 도우며 수도 없이 반복해온 게 추격과 도주다.
진무립은 상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눈 위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인내와 절제, 끈기와 집념 속의 추격은 하루가 꼬박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 긴 시간을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장청도 보통은 아니었으나 한순간도 집중력을 놓지 않고 추격해 온 진무립은 과연 십대고수다웠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짙어지는 햇살에 밀려날 무렵, 장청은 마침내 커다란 마을에 도착했다.
중원과는 사뭇 다른 복식의 사람들이 활기를 더하는 거리.
조용히 골목에 접어든 장청의 신형이 오가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진무립이 그가 사라진 거리에 나타났다.
‘여긴 어디지?’
말투도 사천과 사뭇 다른 것이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주목받기 딱 좋았다.
‘좋지 않군.’
지금까진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을 좇아 왔으나 사람 많은 마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역시나 골목에 접어든 순간 회의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가판에서 파는 목궁과 화살 몇 대를 구입한 진무립은 은자를 내려두고 골목을 벗어났다.
옆 건물 뒤로 이동한 진무립은 번개같이 지붕 위로 뛰어올라 자세를 잔뜩 낮췄다.
‘어디냐?’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폈으나 그 어디에도 그놈은 보이지 않는다.
진무립은 차분하게 목궁에 화살을 걸었다.
지붕 아래는 오가는 인파로 북적였으나 진무립의 세상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렇게 기다린 지 일각이 지날 무렵.
서북쪽 이십 장 밖의 작은 건물에서 눈처럼 하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나왔다!’
건물의 크기로 보아 우려했던 대기 병력은 없을 것이다.
새가 향하는 방향은 서쪽, 상승하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바위처럼 굳어있던 진무립은 즉시 지붕을 박찼다.
한 마리 비조처럼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넘던 진무립이 활시위를 당겼다.
팽!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은 비상하는 새를 정확히 관통했다.
시위에 다음 화살이 걸리고.
동시에 민가의 담장 너머로 회색 복면이 떠오른다.
상대의 당황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진무립의 손가락이 시위를 튕겼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날아간 화살이 담장을 종잇장처럼 꿰뚫어버렸다.
“윽!”
진무립의 귀는 상대의 억눌린 신음을 놓치지 않았다.
지체 없이 몸을 날린 진무립은 담장을 밟고 도약했다.
안가의 전경과 함께 팔에서 피를 떨구며 기둥 뒤로 숨는 놈이 보인다.
‘이놈이 끝인가?’
다른 기척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진무립은 경쾌한 손놀림으로 두 대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팅!
시위를 떠난 두 화살이 마치 초승달 같은 궤적으로 휘어지며 기둥을 지나쳤다.
“크으.”
이윽고 들려온 미세한 신음에 진무립의 귀가 쫑긋거린다.
착지하던 진무립의 발이 지붕에 닿기 직전, 빛살처럼 뽑혀 나온 은광검이 지붕을 뚫고 쏘아졌다.
콰직!
은광검이 통과한 자리에 한 뼘 남짓한 구멍이 뚫렸고 그 너머로 당혹감에 물든 회의인의 눈동자가 보인다.
복면에 가려진 진무립의 미소가 짙어졌다.
“죽지 마라.”
푹!
은광검이 그의 허벅지에 틀어박힌 순간, 진무립의 활에서 마지막 화살이 쏘아졌다.
쌔애액!
짓쳐 드는 화살과 함께 절망이 엄습한다.
‘제기랄!’
상대는 자신보다 월등한 고수.
벗어나긴 틀렸다.
장청은 앞선 동료를 따르고자 어금니의 독단을 더듬었다.
그 순간 화살이 어깨를 관통하며 몸이 휘청거렸고.
퍽!
이를 악물기 직전 뭔가가 머리를 강하게 때리며 장청의 세상이 캄캄해졌다.
상대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진무립은 추락한 전서를 회수하고 돌아왔다.
쓰러진 상대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은 암기 대용으로 던진 묵직한 전낭이었다.
복면을 벗은 진무립은 씩 웃으며 전낭과 은광검을 챙겼다.
“돈에 맞아 기절했다는 걸 알면 억울하겠어.”
쭈그려 앉은 진무립은 그의 복면을 벗기고 입안의 독단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어서 상대의 혈도를 점한 진무립은 놈이 쓴 전서를 펼쳤다.
「사천맹 천무대 설곡 진입. 회혈대 둘 사망.」
‘회혈대인가?’
이들의 실력은 최소한 금호대 이상이었다.
운이 따라 쉽게 생포했으나 도주하지 않고 처음부터 맞섰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자는 아니었다.
진무립은 천잠사로 놈의 몸을 단단히 묶고 집 안을 살폈다.
내부 집기는 수십 명이 머물러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충분했으나 최근 사용한 집기의 흔적은 고작 세 명분에 불과했다.
‘이놈과 숲에서 죽은 두 놈이 전부였던 모양이군.’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진무립은 작은 방의 침상 밑에서 석 자 남짓한 너비의 궤짝을 발견했다.
자물쇠를 부수고 뚜껑을 열어보니 차곡차곡 쌓인 몇 장의 문서가 보인다.
혈교의 총단도 아니고 일개 안가인 만큼 중요한 정보는 없었으나 위에서 내려온 지시와 아주 간략한 전황이 쓰여 있었다.
운신의 폭을 넓히고자 근방에 무인들이 있는지 확인하려 한 것인데 뜻밖의 소득까지 얻었다.
‘나쁘지 않군.’
그것들을 품에 챙긴 진무립은 집 안에서 커다란 자루를 찾아 회의인을 담았다.
* * *
사천맹 무인들은 진무립이 남겨둔 흔적을 쫓아 창도 인근의 숲속에 도착했다.
애당초 목적지로 삼았던 곳인 만큼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진 것은 운이 좋았다.
구양무는 즉시 수뇌를 소집했다.
“진대주는 창도에 들어간 게 분명하다. 나와 몇 명만 창도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은신처로 이동해 대기한다.”
창도는 서장에서 외부로 통하는 통로.
포달랍궁과 혈교가 서로 견제하는 탓에 지금까지 지부가 세워진 적은 없으나 지금은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때 숲의 외곽에서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진무립이 나타났다.
이들이 자신의 뒤를 쫓아올 것을 알고 지나온 곳을 거슬러 온 것이다.
운룡각 무인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가운데 한달음에 달려간 구양무가 물었다.
“어떻게 됐는가?”
진무립은 챙겨온 자루를 내려두었다.
“생포했습니다.”
“오오!”
예상치 못한 결과에 곳곳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여럿이 달라붙고도 해내지 못한 일을 진무립이 해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의 안가까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창도에 대규모 병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구양무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네가 큰 공을 세웠군. 수고했네.”
싱긋 웃은 진무립은 품에서 가져온 문서를 꺼냈다.
“놈들의 안가에서 확보한 문서입니다.”
문서를 받아든 구양무가 내용을 확인했다.
“음.”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에 패이자 부대주 성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내용인가요?”
“두 달 안에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쓰여있군. 사천에서 무인들이 넘어올지 모르니 철저히 대비하라고도 말이야.”
두 내용이 같은 문서에 쓰여있는 것을 보면 최근에 작성한 것이 분명했다.
“혈야광인이 노출됐으니 우리가 올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군요.”
구양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대비한다면 실험장소를 찾는 게 쉽지는 않겠어.”
그는 문서를 품에 넣고 말했다.
“창도에는 비각의 안가가 있다. 운룡각에서도 그 위치를 알아야 하니 부대주는 운룡각 무인 둘을 데려가 안가에서 정보를 얻어오게. 우린 은신처로 이동해 대기하지.”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때 적모개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나도 창도로 가야하오.”
분타원들의 안위를 파악하고자 따라온 적모개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안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구양무가 말했다.
“진대주가 확인했으니 큰 위험은 없겠지만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알겠소.”
진무립은 당소소와 이환을 성연과 함께 보냈다.
그들이 떠나자 구양무는 진무립이 가져온 자루를 열었다.
안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은 장청이 있었다.
“확실히 그곳에서 죽은 자들과 같은 복식이로군.”
“회혈대라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구양무가 안면에 세 개의 검상이 새겨진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를 쳐다봤다.
“손당. 이자는 네게 맡기겠다. 빼낼 수 있는 정보는 전부 빼내라.”
십조장 손당은 천무대에서 가장 고문에 능한 인물이었다.
묵묵히 끄덕인 그는 자루를 들었다.
회의가 일단락되자 구양무는 이들을 데리고 숲길을 따라 이동했다.
서장에 넘어와 처음 머물렀던 숲보다 규모가 큰 이곳엔 비각에서 파악해둔 동굴이 있었다.
나무에 가려진 입구는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으나 조금 나아가니 제법 큰 공동이 나왔다.
사방으로 십 장 너비의 공동에는 네 개의 통로가 더 이어져 있었다.
“쓸만하군.”
주변을 돌아본 구양무가 말했다.
“성연이 비각의 정보를 가져올 때까지 이곳에서 쉰다. 천무대에겐 마지막 휴식이 될 것이니 푹 쉬어둬라.”
“예.”
벽에 걸린 작은 횃불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가운데 무인들은 공동의 곳곳에 자리 잡고 휴식을 취했다.
운룡각 무인들을 두루 살핀 진무립이 한쪽 벽에 기대앉자 진설란이 다가왔다.
“총대주.”
고원에 접어들 때만 해도 창백했던 그녀는 완전히 회복해 본래의 신색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래.”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인사가 너무 늦었군요.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구양무의 시험이 있던 날, 진무립이 도와준 것을 말한 것이다.
진무립은 멀리 당천을 힐끔 쳐다보고 웃었다.
“힘들겠군.”
“지금은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달렸던 그날 이후로 조장들이 그녀의 말을 거스르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것은 이곳의 책임자인 진무립이 자신들의 항명을 용납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진설란이 당천에게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돌아가 볼게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
진무립이 짓궂게 웃었다.
“언제 한번 날 잡고 흠씬 두들겨 패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진무립이 제법 강하다 할지라도 당천은 후기지수의 수준을 넘어 사천의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고수.
그녀의 기준에서 진무립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진설란이 돌아가자 잠시 후 단려화가 다가왔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요.”
“주변에 뭔가 있단 말이야?”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단려화의 직감은 믿을 만하다.
미간을 좁힌 진무립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 * *
마을에 도착한 성연과 적모개는 잠시 후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친 적모개는 즉시 안가가 있을 돌다리를 찾았다.
‘이곳 어디쯤이었는데.’
묵은 기억을 더듬던 적모개는 한참이나 헤맨 끝에 돌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자 촘촘하게 돌이 쌓인 벽이 나왔다.
눈으로 보니 지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기다.’
주변을 살핀 적모개는 그중 손바닥만 한 돌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이윽고 돌 너머로 숨겨진 작은 목함이 드러난다.
‘먼지가 많이 쌓이지는 않았어. 최근에 뚜껑을 닫은 게 분명해.’
적모개는 서둘러 뚜껑을 열고 안에 담긴 종이를 펼쳤다.
검붉은 피로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휘갈긴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적사곡(積沙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