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85)
◈ 85화. 저는 못 가겠습니다
혈교의 교주, 혈마(血魔) 무천극.
포달랍궁의 수장, 천수경장(千手勁掌) 판천라마.
서장 무림 최강을 다투던 두 사람의 경천동지할 대결은 오백 초식 만에 무천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혈교의 수라대는 그 틈에 포달랍궁의 본궁에 침투했고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철옹성을 함락시켰다.
본궁을 잃은 포달랍궁의 라마승들은 중상을 입은 판천라마를 구해 자취를 감췄다.
족히 수백 명이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대전.
중앙을 관통하는 검붉은 융단의 좌우로 범상치 않은 기도를 가진 고수들이 늘어섰다.
일 장 높이로 치솟은 태사의에는 베일 듯 날카로운 눈빛의 중년인이 앉아 있다.
절대자의 기도를 자연스럽게 풍기는 사내는 자타공인 서장 최고수에 등극한 혈마 무천극이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리며 쇠를 긁는 것처럼 오싹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천수경장의 행방은 아직도 찾지 못했느냐?”
날렵한 턱선에 족제비 같은 눈매의 청년, 서천지봉(西天智鳳) 자인경이 앞으로 나섰다.
“백사대(白蛇隊)가 추격 중이니 곧 소식을 보내올 것입니다. 그보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적사곡의 실험장이 습격당했습니다. 그곳을 지키던 환염대가 전멸, 광사패도 천태무가 죽었고 이곽과 조위성이 패했습니다.”
순간 무천극의 전신에서 지독한 살기가 솟구쳤다.
사천맹 무인들이 서장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지금의 보고는 처음 듣는 것이다.
“그걸 어째서 지금 말하는 것이냐?”
적사곡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혈야광인의 실험장.
만일 보고한 이가 심복 자인경이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인경은 위축되지 않고 말했다.
“지존께서 회복하시는 동안 들어온 보고라 차마 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판천라마에게 승리한 무천극은 전투에서 입은 내상을 오늘에서야 회복한 참이었다.
“천태무를 죽인 자는 누구냐?”
“독왕의 아들 당천입니다.”
강유월도, 하종보도 아닌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무천극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심하다 독이라도 먹은 것이냐?”
“전투를 목격한 인물이 없어 자세한 정황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천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작전을 이끈 것은 진무립이라는 자입니다.”
자인경은 그간의 일을 차례로 설명했다.
적의 은신처를 습격하러 갔다가 실종된 회혈대와 지림에서 매복하다 전멸한 혈살추혼대까지.
경청하던 고수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종국엔 잔뜩 일그러졌다.
천무대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것은 좋으나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혈살추혼대가 전멸을 당했다고?”
“지봉. 그게 정말이오?”
“모두 사실입니다. 이 모든 일에는 진무립이라는 자가 관계돼 있습니다.”
“진무립이라니…….”
“대체 정체가 뭐요? 정무원에서 숨겨둔 은거고수라도 된단 말인가?”
자인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소교주와 비슷한 연배입니다. 중경 마도림의 소공자라고 하더군요.”
수뇌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마도림이라고?”
“천하대전이 끝나고 내리막길을 탔다더니 아직 망하지 않았단 말인가?”
술렁거리는 수뇌들과 달리 무천극은 한동안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무혼광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곤 하나 포달랍궁과의 전쟁에서 죽은 숫자가 일천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사천맹의 후기지수에게 당한 부하가 사백을 넘으니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큭큭.”
비틀린 입술 사이로 살기 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놈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창도를 떠난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호공과 혈무검귀 현유립이 사사대와 함께 추격 중이며 겁화천살대가 그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소유붕이 그곳에 있다?”
“예. 혈위사신이 흘린 정보를 토대로 천무대를 함정에 빠뜨린 것은 호공의 계책이었습니다. 서두른다면 대설산맥을 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전에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늙은 여우라면 맡겨도 되겠지.’
전대 교주 때부터 활약한 소유붕이라면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다음을 준비할 때다.
무천극의 두 눈에 짙은 혈광이 번뜩였다.
“석 달 안에 포달랍궁의 잔당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라. 서장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사천을 피로 적실 것이다.”
수뇌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 * *
좌우가 설산으로 가로막힌 고원.
모처럼 화창한 날씨 속 흰 눈에 내려앉는 햇살이 눈 부시다.
사천맹 무인들은 새하얀 백지 위에 선명한 족적을 새기며 나아갔다.
하루 전, 발이 빠지는 눈밭에 접어들며 말을 모두 버린 상태.
선두와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자 후미를 따르던 하종보는 지친 무인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이곳을 지나면 대설산맥일세. 조금만 더 기운 내시게나.”
은신처에서 수련과 휴식을 병행한 무인들은 상태가 나았으나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천무대원들은 좀처럼 속도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종보와 함께 달리던 진설란은 서장행의 모든 과정을 차분히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야.’
당초 사천을 떠난 목적은 혈야광인의 실험을 막는 것.
적사곡의 실험장을 초토화하고 수백이 넘는 무인까지 패퇴시킨 공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어두운 것은 그 모든 것을 주도했어야 할 천무대가 함정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맹에선 과연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대거파의 최정예로 구성된 천무대가 패하고 모든 공은 마도림의 진무립이 세웠다.
사천 무림이 뒤집힐 일이다.
사천맹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진설란은 벌써부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포달랍궁이 무너진 이상 혈교의 사천 침공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야. 부디 수뇌들이 바른 선택을 내려야 할 텐데.’
진무립의 성격상 불합리한 것을 꾹 참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괜한 분란이 생기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을 때, 문득 곁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걱정 마시게. 잘 될 것이네.”
곁을 달리던 강유월은 마치 그녀의 속내를 눈치챈 사람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그렇겠지요.”
진설란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선두에서 달리던 진무립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처지는군.’
임무를 마친 은무대는 이미 다른 길로 돌아간 상태.
이대로 적에게 따라잡힌다면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다.
진무립은 즉시 조영성을 불렀다.
“왔던 길만 따라가면 된다. 선두에 서라.”
“예.”
진무립은 이어서 단려화와 용추를 불렀다.
“용추는 뒤처지는 자를 등에 업고 달린다. 당신은 나와 함께 뒤에 남을 거야.”
감이 좋은 단려화라면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것까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알겠어요.”
두 사람이 대답하는 찰나, 곁으로 구양무가 다가왔다.
“뒤에 남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
“생각보다 속도가 느립니다. 지림의 추격자들을 뿌리친 시점부터 계산해봤을 때, 랍살에서 신법이 뛰어난 고수들을 보냈다면 지금쯤 하루 안쪽 거리까지 접근했을 겁니다.”
진무립은 달리는 내내 머릿속으로 적의 추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구양무가 말했다.
“일전에 말했었지. 더 이상 자네에게만 위험을 전가할 수는 없네. 나도 함께 남지.”
진무립의 눈동자가 냉정하게 구양무를 훑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이곳에 뼈를 묻을 생각일세.”
결연한 눈빛을 보아하니 결코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셋은 이들과 백 장의 간격을 두고 후미를 따를 겁니다.”
“알겠네.”
세 사람이 천천히 후방으로 물러나는 사이, 혈교의 추격대 오백 명은 어느새 십 리 밖까지 쫓아온 상태였다.
선두에서 달리던 소유붕이 앞선 발자국을 확인했다.
“흘흘흘. 발자국이 점점 선명해지는 걸 보니 오늘 안에 잡겠구먼.”
“절대 방심해선 안 될 자입니다.”
차갑게 눈을 빛내는 사내는 바로 혈위사신의 수장 현유립이었다.
“알지. 나 역시 자네 못지않게 제대로 당해 보질 않았는가?”
그때 등 뒤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공도 늙은 모양이야. 그만 은퇴하지 그러나?”
두 사람이 고개 돌린 곳에는 불길한 적발에 사나운 인상의 장한이 따르고 있었다.
현유립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호공께 무례를 범하지 마시오.”
“큭큭큭. 처참하게 당하고 온 주제에 주둥이는 잘도 놀리는군.”
비릿한 미소를 짓는 삼십 대 장한은 겁화천살대의 수장, 잔살도(殘殺刀) 염화교였다.
불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그는 혈위사신보다 윗 서열의 고수.
하지만 현유립은 자신이 그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찰나, 소유붕의 전신에서 불같은 사기가 피어오르며 둘을 떼어놓았다.
“한판 붙으려거든 임무가 끝난 뒤에 하게.”
염화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호공은 저놈이 내 상대가 된다고 보는 건가?”
현유립은 지지 않고 말했다.
“그건 붙어봐야 알겠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아가지곤. 막내 사제가 왜 그렇게 네놈을 싫어했는지 알겠어.”
염화교가 지칭한 막내 사제는 죽은 천태무를 말함이었다.
“두 사람 다 그만하라고 했네.”
소유붕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두 사내는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뒀다.
뒤따르던 사사대주 장백관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상극도 이런 상극이 없군.’
그로부터 두 시진.
밝게 내리쬐던 태양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곁에는 진무립과 구양무를, 전방으로 동료들을 시야에 두고 달리던 단려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왔어요.”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의 입이 다시 한번 다급하게 열렸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잡히면 막아내기 어려울 거 같아요.”
두 번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평선 너머로 적이 새까맣게 모습을 드러낸다.
구양무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어림잡아 오백은 족히 되겠군.”
진무립은 전방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직인가?’
랍살에서 보낸 적이 이곳까지 올 정도다.
비록 성도가 훨씬 멀다지만 적모개는 진무립이 지림으로 가기 전에 떠났다.
‘설마 적에게 잡힌 것은 아니겠지.’
만일 적모개가 중간에 잡힌 것이라면 사천맹의 지원은 없다.
오로지 사천맹의 지원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패는 아껴두고 싶었다.
적과의 간격이 빠르게 좁혀진다.
앞에서 저도 모르게 뒤를 힐끔 쳐다본 동초개는 뜨악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적이다!’
두 손을 경건하게 모은 동초개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빨리 와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앞으로 더욱 알차게 구걸하며 살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치는구나!”
이제야 적을 감지한 사천맹 무인들이 뒤를 돌아봤다.
“적이…….”
진설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당천은 품에 손을 넣어 암기를 확인했다.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하는 검집을 움켜잡았으며 당소소의 손이 독낭에 올려진다.
“으하하하!”
대소를 터트린 염화교의 장포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먼저 가지.”
“잠깐…….”
소유붕이 말리려 했으나 염화교는 이미 십 장이나 멀어진 상태였다.
“누가 진무립이냐!”
진무립은 즉시 전방을 향해 외쳤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쩌렁쩌렁한 외침이 설산에 메아리친다.
그 목소리를 들은 강유월은 하종보에게 말했다.
“먼저 가시구려.”
“진인.”
두 사람은 이미 진무립으로부터 절대 멈추지 말라는 언질을 들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유월은 진무립을 저대로 놓아둘 수 없었다.
“나야 살 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미련은 없다오. 하지만 저 아이는 여기서 쓰러지기엔 너무도 아까운 인재요. 아이들을 부탁하외다.”
하종보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번졌다.
“이미 틀린 것 같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유월은 그 의미를 파악했다.
일행의 속도가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느려진 것이다.
강유월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무슨 짓인가! 어서 달리게!”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조영성은 이내 발을 멈췄다.
“사천을 떠나 서장으로 올 때, 대주가 했던 말을 잊었습니까?”
적의 살기가 점점 짙어진다.
뒤를 쳐다본 강유월의 얼굴에 다급함이 번졌다.
“어서, 어서 달리래두!”
“저는 못 가겠습니다.”
천천히 돌아선 조영성이 빙그레 웃었다.
“동료라는 건 이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