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ampire went to Murim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모두 물러나라!”
언곽표는 야현을 포위하고 있는 진주언가 제자들을 좀 더 뒤로 물렸다.
단 한 수로 야현의 무위를 파악한 것이다.
수하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위였다. 거기에 잔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잔악한 놈이로구나!”
언곽표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잔악하다고요? 이전에 떼로 몰려다니며 애먼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그대들이야말로 비겁하고 잔악하다 생각지 않으십니까?”
야현은 고개를 돌려 언가휘를 잠시 쳐다본 후 다시 언곽표를 바라보았다.
“마두 놈이 말이 많다!”
“그래서 말입니다, 본인 역시 제 수하들을 좀 깨울까 합니다.”
야현은 뒤로 몸을 날려 지붕으로 올라갔다.
“깨어나라, 어둠 속에 잠든 나의 자랑스러운 병사들이여!”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야현의 손에 죽은 진주언가 제자의 시신 몇 구가 들썩거렸다.
“크르르르!”
“크그그그그!”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죽은 진주언가의 제자들이 기괴한 흉성을 흘렸다.
“크하아아아!”
“크하악!”
한 번 죽었다가 야현의 권능에 의해 다시 좀비로 깨어난 그들은, 일제히 놀란 얼굴로 당황하는 진주언가의 제자들을 향해 달려들어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 * *
언가휘의 침소와 그 앞마당은 생명의 흔적 하나 없이 혈향만이 가득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야현은 다시 언가휘의 침소로 들어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마시다 만 술잔을 들었다.
“데리고 왔습니다.”
독고결이 어깨에는 한 여인을 들쳐 메고, 한 손으론 문사 차림의 중년 사내의 뒷목을 잡고 끌고 와 야현 앞에 꿇어 앉혔다. 여인은 언일미였고, 문사 차림의 중년 사내는 진주언가 총관인 언도양이었다.
“꺄아아악!”
언일미는 잘린 언가휘의 수급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척!
독고결이 그런 언일미의 목으로 단도를 들이밀었다.
“조용.”
서늘한 단도의 칼날에 언일미는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공포를 이기지 못해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야현이 손을 흔들자 독고결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우리를 죽일 것이오?”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언도양은 떨리는 목소리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죽고 싶습니까?”
야현의 반문에 언도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언일미는 무릎을 꿇은 채 야현에게로 기어와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순간 살겠다는 눈빛이 강렬했다.
“제발…… 무슨 짓이든 다 하겠어요. 그러니 살려 주세요.”
“무슨 짓이든 다 한다?”
야현은 등받이로 몸을 젖히며 언일미를 내려다보았다.
무심한 듯 차가운 눈빛에 언일미는 흠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야현의 반문에 언일미는 더욱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로 뒤덮인 눈동자, 그 속에 드러난 독기.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상의를 벗고 하의를 벗었다.
드러난 새하얀 맨살.
봉긋 튀어나온 가슴, 잘록한 허리, 매끈한 다리.
“흠…….”
야현은 턱을 괸 채 감상하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언일미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젖가리개를 풀었다.
“흐윽!”
울음을 참으며 고쟁이마저 벗었다.
언일미는 수치스러운 마음에, 부끄러움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야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언일미에게로 바투 다가가 섰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야현의 손길에 언일미는 경련이 이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야현의 손은 그녀의 뺨에서 어깨로, 그리고 등을 타고 엉덩이로 내려왔다.
“다 드리겠어요. 그러니…… 살려 주세요.”
언일미는 눈물로 가득 찬 얼굴로 야현을 쳐다보며 양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먼저 입을 포갰다.
눈물범벅인 얼굴과 달리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듯 그녀의 입맞춤은 적극적이었다.
“아―!”
야현도 그 입맞춤에 반응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긴 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비음이 살짝 흘러나왔을 때였다.
콰득!
야현은 언일미의 목을 그대로 꺾어 버렸다.
철퍼덕.
단숨에 목이 부러져 절명한 언일미의 나신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야현은 무심한 눈으로 언일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청백지신 처녀의 몸으로, 원수 앞에서 옷을 벗는 여인의 원한은 지독하리만큼 무섭다. 암중에서 목숨을 노리는 어쌔신, 살수보다도 더.
더욱이 아무리 그 사정이 애달프다 한들 여인의 눈물이 주는 순간적인 감성 따위에 취해 후환을 남겨둘 위인도 아닐뿐더러, 적이 될 이는 그 누구라도 애초에 지워 버리는 야현이었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야현은 언일미의 나신을 지나쳐 언도양 앞으로 다가섰다.
“그대는?”
“살려달라고 해서 살려줄 위인이 아닌 듯싶소.”
“이 순간 그대의 눈빛이 흥미롭군요.”
이 자리에 들어서며 언가휘의 수급을 보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언일미가 나신이 되었고, 그리고 죽었다.
그 어떤 반응이라도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감정 자체가 목소리에 담기지 않았다.
그저 허무했다.
오래간 죽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야현은 오른손 검지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언도양의 뺨을 살짝 그었다.
미세한 고통에 언도양의 눈가가 찌푸려졌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야현은 손톱에 맺힌 핏방울을 입으로 가져갔다.
“흠…….”
야현은 핏방울을 입안에서 굴리며 언도양을 내려다보았다.
단편적이지만 언도양의 기억 파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도양은 진주언가의 방계 출신이었다.
무가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기혈이 막혀 있어 무예를 익히고 싶어도 익히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렇기에 언도양은 어릴 적 반병신이라는 놀림을 받아가며 이를 악물고 글을 배웠다.
문재(文才)가 있었던 언도양은 맨몸으로 가문을 나와 서원에 들어갔고, 돈이 없었기에 허드렛일을 하며 글을 배웠다. 못 먹고 못 자는 것쯤은 당연한, 피눈물 나는 수학(受學) 끝에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그때만 해도 삶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연줄 없고, 가난한 언도양은 공로를 빼앗기기 일쑤였고, 진급에서 순위 끝자락으로 밀려나기를 수차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문가의 잘난 놈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들 앞에서는 개처럼 굴어야 했다.
그래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괴감으로 얼룩진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을 때였다. 돌아와 본가에 힘을 보태달라는 진주언가 가주의 명이 내려왔다.
본가를 떠난 지 십수 년.
조정에 대한 회의감이 뼛속까지 파고든 지 오래였기에 진주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그리 결심하게 된 이유가 그 하나뿐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진주언가만 바라보고 사시는 부모님이 있었고 또 하나, 적어도 비참함만 가득한 그런 삶은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무재는 없었지만, 자신이 가진 문(文)의 힘으로 가문을 이끌고 싶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겼고.
하지만 돌아온 후에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처참했다.
누가 무가 아니라고 할까 봐, 진주언가는 철저하게 숭무멸문(崇武蔑文)의 기조가 팽배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총관이란 그저 귀찮은 일이나 대충 떠맡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그런 자리였다. 잘하면 본전이요, 못하면 질책을 받았다.
그것도 좋다.
빼앗기는 것에도, 숙이는 것에도 이골이 난 그였다. 그러나 정말 참기 힘들었던 건 같은 핏줄임에도 타인보다 더 못한 대접이었다.
특히 수창대(守槍隊) 대주 언충.
어릴 적 함께 자란 친우.
아니, 친우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자였다.
어릴 적 반병신이라며, 앞장서서 언도양을 놀리고 못살게 괴롭힌 그였다. 본가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가주의 호위대인 수창대 대주가 되어 있었다.
대인인 양, 다시 돌아온 언도양을 반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모습일 뿐,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조정에 있을 때 적어도 명문가의 자제들은 품위를 지킨답시고 대놓고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뼛속까지 한이 서릴 정도로 그는…….
야현은 언도양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용케 멸시를 참고 살아왔군요.”
야현의 말에 언도양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서움이나 공포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만 아는 속내가 야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까닭이었다.
“언 총관.”
야현은 탁자로 다가가 앉으며 언도양을 불러 맞은편에 앉혔다.
“어차피 진주언가가 사라지는 것은 자명한 일. 아, 언충이라는 자도 오늘 죽습니다.”
언도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야현은 그런 언도양에게 술잔을 내밀며 술을 따랐다. 언도양은 잠시 술잔을 내려다보다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무엇을 원하시오?”
그러고는 야현을 직시하며 물었다.
야현은 양팔로 주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무를 베었는데 열매를 거두지 않고 썩혀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
언도양은 무슨 뜻인지 언뜻 짐작이 갔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문제는 나무꾼은 농부가 아닌지라 열매를 말끔히 수확하질 못합니다. 그저 베어 넘길 줄만 아는 거지요.”
언도양은 야현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알아차렸다.
나무는 진주언가이고 열매는 재산이다.
총관이면 진주언가가 가진 재산이며 이권에 대해 밑바닥까지 모두 알 터, 그를 농부에 빗대며 그 모두를 가지겠다는 뜻이다.
“언 총관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입니다.”
야현은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가 하나를 접으며 말했다.
“첫째, 열매를 잘 따서 서로 나눠 가지는 것입니다. 일 할을 드리죠. 열매를 저 혼자 독식할 수만 있다면야 더 드릴 수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맛있게 먹으려면 이웃들에게도 나눠줘야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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