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After the Withdrawal of the Warrior Party RAW novel - Chapter 109
EP.109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 2
“자. 그럼 해보자.”
난 루실에게 손을 내밀었다. 힐끔, 레이시를 본 루실이 내손을 잡고 움직이려고 할 때.
“아.”
레이시가 뭔가 말할 듯 말듯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몇차례 스텝을 밟고 턴을 하고, 그 이후에도 연신 탄성을 터트리자 루실은 결국 말하고 말았다.
“왜요?!”
“보폭을 좀 더 넓히십시오.”
“이, 이렇게요?”
“그리고 너무 현자에게 붙으셨습니다.”
“….아니.”
“그리고 스텝을 밟을 때 왼발이 우선으로 나가고 그 반동을 이용해야 합니다. 힘을 줄 필요 없이 상대에게 맞춰서…”
“…네.”
그렇게 레이시의 지적을 몇번이나 받으며 춤을 추자 레이시는 곡이 끝날 때 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면 나쁘지 않습니다. 공주님. 잘 기억해주세요. 춤이라는 것은 얼마나 완벽한 자세로 이상적인 형태를 구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모든 것을 하나의 동작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검술과도 같지요.”
레이시는 힐끔 날 보았고 난 월광을 세검으로 바꿔 던져주었다.
가볍게 허공에서 월광을 잡아 챈 레이시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원입니다. 하나의 완전한 원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검희라는 별명에 걸맞게 레이시의 검무는 아름다웠다. 그 검무가 그리는 것은 우리가 아까까지 추던 왈츠의 댄스.
홀로 검무를 춘 레이시는 다시 나에게 월광을 던져주었다.
“자. 다시 해보십시오.”
“어… 그런데 레이시 후작님. 방금 검무는 왜 추신거죠?”
레이시는 휙 고개를 돌렸다.
왜 췄냐고?
원래 고인물들이 다 저렇다.
쟤도 은근히 아닌 척 하면서 자기 좋아하는 분야 나오면 자랑하려고 한다니까.
“그나저나 왜 후작님께서 제 스승님이 된 것 같죠?”
“이런. 실례했군요. 그저 안타까워서 몇마디 조언을 드린 겁니다.”
고인물 특.
뉴비보면 안달복달 못함.
세실이 비키니 갑옷에 진심인 것처럼 레이시는 춤에 진심인 여자다.
그런만큼 춤을 잘 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한마디 훈수를 두고 싶었던 것일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을거다.
“아, 아니 딱히 나무라는 것은 아닌데.”
“그럼 제가 더 봐드려도 됩니까?”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눈만큼은 반짝거린다.
아. 저 마음 알지.
뉴비를 밀어주고 당겨주는 것 만큼 재밌는게 어디 있을까?
어쨌든 나도 배워야 할 정도로 쟤가 춤은 잘춘다.
그러니 저 훈수는 받아들이는게 낫겠지.
아침 식사시간이 될 때까지 강습은 계속되었다. 루실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라크는 절망했다.
“내가 이딴 연주를 하다니!!”
“왜. 잘하드만.”
“이런 건 음악이 아니야!!”
울먹거리며 라크가 도망치듯 들어갔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난 지친 루실에게 힐을 써준 후 레이시에게도 말했다.
“너 이따가 저녁에 와서 좀 도와줘.”
“그러지. 그런데 너. 전야제 파티에 참석 안하나?”
“얼굴만 비출거야. 공주님은 참가 안할거고.”
전야제 파티때는 여왕만 참가해도 되니 괜찮겠지.
“그런가. 그럼 남은 시간이 많군. 후후. 철저하게 가르칠 수 있겠어.”
신났네.
사람만 없었으면 혼자 춤까지 췄겠다.
“공주님도 가서 쉬십시오. 루켈에게는 제가 말해둘테니 파티때까진 마법 훈련도 쉬도록 합시다.”
“네에…”
나와 레이시에게 시달려 녹초가 된 루실이 비틀거리며 정원을 빠져나간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백합기사단원과 함께 그녀가 멀어지자 레이시는 별관 쪽을 보았다.
“으하아암~ 잘 잤다~”
“현자아~ 오늘 아침은 뭐야아?”
늘어지게 하품하며 나온 사자 수인 부부를 향해 내가 인상을 팍 쓰자 레이시는 피식 웃었다.
“발틴 공. 오래간만이군.”
“어. 오래간… 엥? 레이시 후작님?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왕국의 귀족으로서 이런 중요한 파티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지. 내 입장에서는 당신들이 여기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인데.”
“하하하… 그게요. 공주님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가… 그럼 내 초대도 받아 줄텐가?”
“후작님의 초대요? 가신으로 들어오라는 것만 아니라면 받아들이죠.”
“가신이 싫다면 장기간 후작령에서 머물러줬으면 하는데.”
“보수만 좋다면 아내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침식사를 들고 시녀들이 찾아온다.
레이시를 보고 흠칫 놀란 시녀들이 어쩔 줄 몰라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에서 식사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말도록. 그럼 다음에들 보지.”
올때와 마찬가지로 갈때도 바람처럼 가버린다. 그녀가 멀어지자 발틴과 루켄디는 자리를 깔고 앉았다.
“밥줘!!”
오늘 하루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된다.
***
현자와 함께 공주에게 춤을 가르친지 며칠이 지나 루실의 생일파티 날이 가까워졌다.
오늘도 루실을 가르치는데 힘을 보태고 왕궁의 귀빈실로 돌아 온 레이시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서류를 살폈다.
공주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지만 업무를 쉴 수는 없었다.
후작령은 넓은 만큼 신경써야 할 곳이 상당히 많다.
그만큼 외부에서 해야 할 일도 산적해 있으니 다른 귀족들처럼 수도 관광이나 하며 놀 여유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나마 새벽과 밤에 잠깐 루실의 춤을 봐주는 것이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여유라고 할 수 있었다.
“흐음…”
레이시는 신음하며 보고서를 읽었다.
가주가 된지 나름대로 오래 지났다 생각했는데 저항하는 이들은 왜 이리 많은지.
물론 그들도 차츰차츰 흡수되고는 있었지만 속도가 늦다.
이래서야 외부에서 후작령을 노리려는 놈들이 언제 그들과 협력해 덤벼들지 모른다.
물론 싸우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쓸데없는 싸움으로서 후작가의 힘이 약해지는 것 뿐.
“차라리 죽일 것을 그랬나.”
정말 현자의 말대로 얻는 것이 적다 하더라도 안정을 꾀할 것을 그랬나?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
이미 자신은 선택을 했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역시 아쉬움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이 필요하다.
여전히 뻗대고 있는 자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게 할 만한 확실한 것이.
그렇기에 레이시는 보고서를 읽으며 생각했다.
확실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여줘야 한다.
자신의 업무 수행능력을.
자신이 충분히 후작이라는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보자면 대륙에서 인지도가 높은 현자와의 연계는 분명 큰 도움이 될거다.
영지의 큰 수입원 중 하나인 초콜릿 공장을 보유하고, 초콜릿 제조 노하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윌리 자작이 현자에게 크게 빚진 적이 있는데다가 다른 이들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그 외에도 많지만…”
모든 것을 현자에게만 기대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번 약혼은 그저 형식적인 것.
약혼식을 치룬다 하더라도 현자는 자기 일 보러 돌아다닐 것이 분명하다.
그런만큼 자신 역시 현자 외에 추가적인 힘을 얻어야 했다.
내부에서 자신을 도울 세력은 이제 없으니, 외부에 자신을 도와 줄 세력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영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세력이.
하지만 그런 입맛에 맞는 세력이 어디 있을까?
고민, 그리고 또 고민.
무표정한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후작님. 후작님을 뵙고 싶다는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
레이시는 보고서에 집중하느라 따끔해진 눈가를 꾹꾹 눌렀다.
“누구지?”
누구라도 상관없다.
자신의 앞에서 연기를 한다면, 그것조차 이용해주면 그만이니까.
어쩌면 이번 손님이 자신의 고민을 타개할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자. 집중하자.
냉정한 어조로 말한 그녀는 자신을 찾을 손님을 예상해보았다.
얼마 전 트랄만 영지 인근에 도적 토벌이라는 빌미로 사병을 보냈던 오스완 백작?
트랄만 영지의 장구류 사업에 몰래 관심을 보이며 내부의 인원과 연계해 그것을 빼앗아가려던 갈리덴 백작?
초콜릿 판매 쪽에 손을 대려고 하는 오발라스 상단의 상단주?
누구일까?
누구일까?
그녀의 궁금증이 높아지기 시작했을 때 시녀가 입을 열었다.
“교회의 이단심문관 하인스 사제님께서 베로니카 추기경님의 편지를 전달하러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레이시도 예상 못한 것이었다.
하인스 사제가 보낸 편지에는 단 한줄이 적혀 있었다.
괜찮으면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
레이시에게 있어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교회는 대륙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또 트랄만 영지에서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신자다.
비록 레이시 그녀는 교회의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는 강력한 세력의 최고위층인 추기경.
심지어 교황의 몰락 후 차기, 혹은 차차기 교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인물이었다.
아니, 그 뿐인가?
얼마 전에 악마를 처치했고 사제로서 한단계 더 높아져 어쩌면 몇년 안에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사람이다.
영지 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가신 중에 독실한 신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만큼 그녀와 만나 친분을 얻고, 베로니카의 축복이 담긴 성물을 준다면 그들을 자신의 세력 내로 흡수하는 일이 조금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레이시는 고급스러운 식당의 안쪽, 귀빈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은발의 수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베로니카 추기경님. 레이시 트랄만 후작입니다.”
“반가워요. 교회의 베로니카입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인데 들어줘서 고맙네요. 자. 앉으시겠어요?”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은 레이시는 천천히 베로니카를 흝어보았다. 은색의 풍성한 머리칼, 약간 날카로워보이는 눈동자.
복숭아빛의 피부와 풍만한 몸매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하지만 사교도나 악마숭배자를 보면 머리를 깨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이단심문관.
죄가 없다 하더라도 앞에 선다면 그 위압감과 존재감에 두려워 할 만한 사람이었지만 레이시는 이상하게 그녀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자에게 추기경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끔씩 현자와 잡담을 나눌 때 그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사람이 바로 베로니카였기 때문이었다.
베로니카에 대한 그의 평가는 모두 좋은 이야기 뿐이었으니 저런 태도에도 두렵다기보다는, 그저 친밀감만 느껴질 뿐이다.
“현우가…? 크흠.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 친구 중에 가장 친하고.”
“어머.”
“착하고.”
“어머나.”
“아름답고.”
“어머머~!”
“현명하며.”
“아이 참~ 그정도는 아닌데…”
“베로니카 추기경님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남자는 참 복받은 남자일거다… 라고 하더군요.”
“정말요?!”
처음에 보이던 싸늘한 태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드러난 것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
그것을 보자마자 레이시는 깨달았다.
아.
이 사람.
현자를 좋아하는구나.
그렇기에 레이시는 왜 베로니카가 자신을 만나자고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크흠. 뭐 드실래요? 여기가 요리를 아주 잘합니다.”
“그럼 생선요리를…”
“부탁드릴게요.”
주문을 하고 잠시 후 요리들이 나온다.
수도에서도 고급스럽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모두 후작령에서 먹던 것과 비교해 전혀 밀리지 않았다.
“드시면서 들어주시겠어요? 레이시 후작님. 현자와 약혼을 계획하고 계시다면서요?”
“예.”
“왜죠?”
“가문의 안정과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비밀이라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현자가 말하더군요. 베로니카 추기경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그런 분이라면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현우가 그랬어요?! 정~마알~ 걔는 참 별 소리를 다해! 그렇죠?!”
처음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채 베로니카는 아예 몸을 베베 꼬았다.
진실의 눈이 아니더라도 알겠다.
베로니카 추기경이 진짜로 기뻐한다는 것을.
어쩔 줄 몰라하던 베로니카는 레이시의 시선에 낮게 헛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요리를 권했다.
“드실까요? 제가 살테니 모자라시면 더 드세요.”
그녀의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레이시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예.”
식사를 하며 레이시는 사정을 설명했다.
설명을 전부 들은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시는 샐러드를 씹어 삼킨 후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러므로 베로니카 추기경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보다 의외군요. 전 추기경님께서 화를 내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요? 왜요? 그 표면적이고 지극히 정치적인 약혼 때문에?”
“예. 베로니카 추기경님. 현자를 좋아하시잖습니까. 분명 오해를 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누, 누가…!! 누굴 좋아하…”
“…..”
“…긴 한데요.”
우물쭈물.
레이시의 시선에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그녀가 사실을 고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다 나온건지 모를 돌이 현자를 채가려고 하는거니. 꽤나 기분이 상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크, 크흠…!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군요.”
“사실 저는 이걸 빌미로 저희 가문이 사교라거나, 악마와 결탁했다는 협박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아니, 적어도 이 자리에서 물이라도 맞을 줄 알았죠.”
“그럴리가요.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악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아요. 그리고 정확한 사정도 알지 못하고 다짜고짜 화를 내고 상대를 핍박할 정도로 저는 멍청하지도 무도하지도 않고.”
그 대답에 쓰게 웃은 레이시는 싱글거리는 베로니카를 위해 한마디를 더 추가했다.
“다행입니다. 저는 그저 현자와 친우일 뿐. 그에게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뭐라고?! 현우의 어디가 어때서!!”
“…”
“아. 아뇨. 죄, 죄송. 아무튼. 현우와 약혼하려는 이유가… 단순히 영지의 안정 때문인가요?”
“예.”
“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확실히 현우와 약혼한다면 레이시 후작님께 큰 도움이 될테니까.”
살짝 눈을 감고 생각하는 베로니카.
그리고 결심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렇다면…”
베로니카는 처음에 가졌던 경계심을 해제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레이시가 보기에 가히 성인에 등극하기 충분할 정도로 성스러워보였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ORIPARK님 후원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내일 두시에 뵙겠습니다! 안녕~! 내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