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After the Withdrawal of the Warrior Party RAW novel - Chapter 17
EP.17 백악의 야수 – 2
내가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건가?
만약 탱커가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기사들은 꽤 있고, 여차하면 내가 해도 된다.
거기에 지금 마왕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레벤티아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물론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그냥 내가 얘랑 엮이기 싫다.
“지금까지 너와 같이 다니면서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여기서 뺨이라도 한대 치고 싶다만…”
눈을 반짝였다. 레벤티아는 내가 자신에게 화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럼으로서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길 원하고 있었다.
“내 손만 아플 것 같아서 그건 좀 별로다.”
쟤 방어력이 방어력인지라 때리면 진짜 내가 아프다.
“아…으으… 아으…”
“너도 할 일 많을텐데 가서 쉬렴.”
난 레벤티아에게 대충 말해 준 후 부관에게 눈을 돌렸다. 떨떠름함이 가득 담긴 회색 눈을 응시하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갑시다.”
전장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침묵 밖에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다들 꽤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거 사기가 엉망이군.
난 바로 류트를 잡았다.
“뭐 하시려는 겁니까?”
“다들 분위기가 처져 있어서요. 좀 띄우는게 좋겠죠.”
– 띠리링~
류트의 현이 튕겨지며 만들어지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졌다. 원래라면 전장에서는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가장 옳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쪽에서 나올 마물 정도는 지금 있는 부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테고.
-띠리링~ 띡!
이런 삑사리.
잡생각을 하며 해서 그런지 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이 또한 나쁠 건 없었다. 내가 류트의 현을 뜯으며 약간씩 스트레스가 감소하던 이들의 얼굴에 여유가 생겼으니까.
“하하. 현자님 같은 분들도 실수를 하시나요?”
“저도 사람인데요.”
“그거 참… 방금 부르신 곡은 전선의 아침이었죠?”
“예. 아니면 다같이 불러볼까요?”
난 다시 한번 현을 튕겼고, 꽤나 경쾌한 음율과 가사를 기반으로 한 노래들이 부대에게서 퍼져나갔다.
그리고.
“…흠.”
난 한쪽을 보았다. 웃고 떠들며 노래부르면서 걷는 부대의 끝 쪽에서.
익숙한 인영 셋이 보였다. 궁수 스킬인 매의 눈으로 살펴보니 클레어와 레벤티아, 그리고…
뭐야 쟤?
귀는 왜 저래?
양쪽의 귀가 반쯤 잘린 에반젤린이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아니, 그 표정을 한번에 설명할 수 있는 커진 눈.
떨리는 입술을 본 순간 깨달았다.
역시 쟤도 정상은 아니군.
“현자님?”
“아. 다음이 뭐였죠?”
“하하하. 가사 까먹으셨습니까? 오렌지의 밭을 거니는~”
“오렌지의 밭을 거니는~ 백마를 탄 초인과 함께~”
노랫소리가 커질수록 에반젤린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반젤린은 이 노래를 가장 좋아했으니까.
***
“오렌지의 밭을 거니는~ 백마를 탄 초인과 함께~”
“아… 아아… 으아…”
에반젤린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과거가 떠오른다.
행복했고, 기뻤고, 즐거웠던 과거가 그녀의 병든 몸과 마음을 가열차게 두들기고 있었다.
그는 이 노래를 자주 불러주었다. 경쾌하고, 신나는.
그리고 무척이나 마음이 편해지는.
가끔씩 목소리가 어긋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함께 불러주어 화음을 맞췄었고, 노래가 끝나고 나면 서로 손을 맞부딪히곤 했었다.
“아아… 아아아아아….!”
그때의 즐거웠던 감정이 떠오르자 그만큼의 죄책감이 몰려들어왔다.
아아.
그 모든 것을 망친 것이 나다.
그 모든 것을 뭉갠 것이 나다.
“아흐… 으윽…으…”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약을 먹지도 않았는데 환각이 보였다. 눈 앞에 서 있는 현우는 웃고 있었다.
떠날 때처럼.
꽤나 홀가분한 얼굴로.
“아으… 아… 아아…”
뚝뚝, 한두방울 씩 떨어진 눈물이 진흙으로 뒤덮인 전장에 퍼져나간다. 그녀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클레어가 부축해주려는 순간.
레벤티아는 검을 꽉 쥐었다.
“저길 봐.”
멀리 보이던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붉은 달에 대항하듯 하얀색 창백의 빛을 내뿜는 거대한 마물.
두개의 용의 머리를 지닌 끔직한 괴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괴물이 있는 곳으로 그가 있는 부대가 향하고 있었다.
“막아야 해.”
레벤티아는 굳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현자는 강하다. 하지만 저 괴물은 창칼에 맞아도 재생하고, 어중간한 마법공격 따위는 이도 박히지 않을 정도다.
저 강력한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 정도 뿐.
일개 기사나 병사, 사제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다.
“…가자.”
그를 상처입힌 것도 자신들이고, 그를 망가트린 것도 자신들이다.
그렇다면, 그가 최소한 다치지 않게라도 해야한다.
레벤티아는 온 몸이 치미는 소름에 몸서리를 쳤다. 만약 저 괴물에게 현자가 당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현우가 많은 것을 안다고 하지만 저것까지 상대할 수 있을까?
저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용사의 공격도 버텨낼 정도로 강력한 놈인데?
그러니 도와야 한다.
그가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사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리 생각한 클레어가 움직이려는 찰나 먼저 움직인 것은 에반젤린, 그리고 레벤티아였다.
예전, 자신이 왕궁에 간 사이 현우와 단 둘이 던전에 들어가서 얻었다던 그 활을 손에 든 에반젤린.
현우가 오늘 수리해줬다던 검을 들고 달려가던 레벤티아.
그들이 어떻게든 그 마물을 막으려는 순간.
“…어?”
괴물의 공격을 부대는 너무나도 손쉽게 막아내고 있었다.
부대를 감싸는 백색의 빛무리는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힘을 주었고.
궁병들이 쏘아 맞춘 작은 돌무더기가 파괴될 때마다 창백의 마물은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공략되고 있다.
자신들 외에는 잡을 수 없었던 마물이 현자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잡혀지고 있다.
그걸 보던 에반젤린은 자리에 선 채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함께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홀로 충분하다.
그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을 눈 앞에 본 용사파티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단 하나.
절망이었다.
***
“이렇게 쉽게 잡다니!!”
“방법만 알면 쉽습니다.”
용머리의 괴물이 부관의 주술에 의해 머리가 잘려 쓰러져벼렸다. 그걸 보던 나는 궁병들에게 말했다.
“근데 주의해야돼. 저기 그 제단 있잖냐.”
“예!”
“저거 막 부수다보면 작은 괴물 나오거든?”
“저런 거요?”
“어.”
마침 부서진 제단에서 창백한 형태의 뿔 달린 토끼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붉은 눈에 송곳니까지 가진 창백한 토끼를 본 궁병들은 긴장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거 나오면 잡도록 해. 아. 지금은 잡지 말고.”
“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합니까?”
궁병 하나가 의아해하며 물었고, 난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게 백악의 야수라는 건데. 다른 괴물들 안으로 들어가서 더욱 강화시켜주거든.”
즉, 2페이즈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야 숙련된 고인물이니 2페이즈를 건너뛰는 법을 알지만 그걸 모르는 이들은 꽤나 고생해가며 백악의 야수를 잡곤 했었다.
“어? 어어어?! 그럼 저것도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난 쓰러진 용머리 괴물로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토끼를 보다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저었다.
“근데 싸우다보면 놓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백악의 야수가 나타날 수도 있고.”
“어… 예.”
“그 상대법도 가르쳐주지.”
-크오오오오오오!!!
내가 설명하는 사이 토끼는 용머리 마물의 몸에 자신의 날카로운 뿔을 쿡 박았다. 그 순간 용머리 마물의 창백한 가죽이 터져나가며 토끼를 감쌌고, 잠시 후 머리가 잘렸던 용머리 마물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
달빛을 머금은 괴수다.
자신의 머리를 한쪽 팔에 끼워 둔 머리 잘린 용머리 괴물이 포효한 순간.
“현자!!”
“내, 내가 도울게! 내가 도와줄게!”
“현우야!!”
멀리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아까 용머리 마물 잡을 때 덤비길래 좀 빨리 잡았더니.
백악의 야수가 나타나도 덤벼들고 있네.
“어… 용사파티가 참가하려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부대원들은 그들의 참여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싸우자고.”
난 디바인마크를 들어올리며 사제들에게 말했다.
“회복 준비. 머리가 잘린 괴물이 그것을 팔로 가져가면 저 팔로 브레스를 씁니다.”
-쿠오오오오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백한 빛의 브레스가 터져나왔다.
그것을 사제들이 보호막으로 막는 사이 용사가 먼저 도착했고.
“건드리면 용서 못해!”
“히끅?!”
내 외침에 셋은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효과 좋네.
예전에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려나.
“창병!! 투창 준비! 목표는 저 가운데 있는 상처!!”
아까 만들어낸 상처들은 아직 백악의 야수에게 남아 있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공격을 해야 한다.
-우오오오오오!!
포효하던 괴물이 용머리의 팔을 들어올린 순간, 그곳에서 빛이 뿜어졌다.
달빛.
하드코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순백의 불길한 달빛이 검이 되어 우리를 내려치려고 한다.
“그림자 방호.”
“아. 예!”
내리쳐지는 빛을 부관이 만든 검은 그림자가 흡수했다. 그저 상쇄되어버린 불길한 달빛의 검은 그저 땅을 가를 뿐 이었고, 그 깊이에 부대원들의 안색이 저 검의 빛처럼 창백하게 물들었다.
“쫄지말고. 공격해.”
저거 잡는 건 일도 아니니까.
[백악의 야수 처치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야~ 업적 하나 더 깼다~
난 새롭게 떠오른 창을 보며 웃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악의 야수가 보인 힘이나 공포에 비해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거대한 휘두르기를 피하다가 바닥을 구른 기사 하나만이 접지른 다리를 만지작거릴 뿐 이었다.
“힐.”
물론 그것도 치료해줬고.
“일단은 이게 기본이고. 다음에 다른 마물들을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허… 정말. 정말 굉장하십니다!”
부관의 눈은 반짝였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 때문일까?
용사파티원들은 잔뜩 풀 죽어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난 한차례 웃어 준 후 몸을 돌렸다.
막사로 돌아온 나는 앞으로 할 일들과 남은 업적들의 포인트를 조사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막사 앞에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우야… 현우야… 저기… 자?”
“안잔다.”
“들어가도… 될까?”
“되겠냐?”
막사의 천 너머로 시무룩해지는게 보일 정도다.
“농담이야. 들어와.”
“…고마워…”
막사의 천이 열렸다. 사뿐한 걸음으로 들어 온 클레어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중얼거렸다.
“고마워… 정말로.”
“뭐. 너랑은 얘기라도 해준다는게?”
끄덕.
클레어가 작은 머리를 까딱거리자 난 웃었다.
“난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라서.”
“그럼 합리적으로… 저기… 우, 우리 힘이 필요하지는… 않아? 네, 네가 원한다면 나 진짜 뭐든 할 수 있는데…”
난 팔짱을 끼고 생각해봤다.
용사파티를 써먹을 곳이 어디 있을까.
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군.
있었으면 벌써 써먹었겠지.
얘들이랑 같이 해야 하는 업적도 없을테고.
“아, 아니면 여기 추울텐데. 우리 막사가 좀 더 따뜻하니까 거기서…”
확실히 춥긴하네.
그래서 난 지팡이를 들었다.
“웜.”
막사 안이 금새 훈훈해졌고 클레어는 울상을 지었다.
아니 내가 여정 내내 이런 거 해왔던 거 알면서 그걸로 꼬시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말물말물입니다 ㅎ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