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08
00095 위험한 초대 =========================================================================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자리를 파하고 방으로 돌아온 해경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환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골칫덩이인 동시에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폭탄처럼 느껴질 터였다. 그 주변에서 환의 성향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이런 자리에 불러내 무언의 압박을 주려 한 것일 테지만, 굳이 평양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더구나 덕완을 만난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해경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을 문득 떠올렸다. 웃는 낯으로 뱃속에 칼을 숨기는 자. 그 말보다 그 자를 더욱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까닭 없는 불안감에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방 안을 서성이던 해경은 속이 답답해져 모자를 쓰고는 겉옷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찬바람이라도 조금 쐬면 복잡한 머리가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코트를 걸친 채 호텔 밖으로 나선 해경은 행인인 양 호텔 주변을 서성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늦은 오후 시간이 되어서인지 신년회에 초대받은 이들인 듯 고급 자동차를 끌고 나타나는 손님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해경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모자를 살짝 더 눌러 쓰며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척 시계를 들여다보며 그들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눈에 제법 익은 사람들도 여럿이었고 낯선 얼굴이라 하더라도 이름을 들으면 대체로 알 법한 느낌이었다. 경성에서 평양까지 기꺼이 온 손님도 여럿이라 이 모임이 그리 중요한 것인지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참 드나드는 사람을 관찰하던 해경은 슬슬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들어가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해경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 자리에 굳었다. 젊은 하인의 도움을 받아 차에서 내리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탓이었다. 권중만. 해경은 저도 모르게 입 속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모자의 챙을 깊숙이 누르며 빠른 걸음으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급히 방으로 돌아온 해경은 쓰고 있던 모자를 내팽개치며 문에 기대섰다. 숨이 답답해져 매고 있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 해경은 미간을 좁힌 채 잠시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노력했으나 만일 쌍둥이가 아니라면 그렇게 닮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었다.
해경은 최대한 침착해지려 애를 썼다. 혹여 중만이 자신을 알아본다 하더라도 그건 경성탐정사무소의 사설탐정 정해경이지 십수 년 전 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어린 사내아이 이정석일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를 위해 최대한 연회장에서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환을 따라온 것을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해경은 침대에 앉아 몸을 숙이며 입가에 손을 댄 채 중만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권중만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누이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던 해경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문가를 돌아보았다.
“누구십니까?”
“저예요, 선생님.”
바깥에서 소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경은 문을 열었다. 원피스에 작은 손가방을 든 소화가 문 앞에 서 있다가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연회 시작 시간인데 오시지 않아서요.”
“아, 네.”
대답한 해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신년회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벌써 네 시 오십 분이었다. 아까 십오 분 전이 되면 자신이 소화를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어 자기가 직접 온 모양이었다. 해경은 서둘러 탁자 위에 놓아 둔 안경을 찾아 끼고는 밖으로 나와 방 문을 잠갔다. 해경이 무언가 평소 같지 않은 것을 눈치 챘는지 소화가 곁에서 해경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몸이 안 좋으세요? 얼굴이 좀 창백하신 것 같아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해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해경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호텔의 홀에 이미 사람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해경은 자기를 따라 멈춘 소화에게 팔을 살짝 가리켜 보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던 소화가 곧 팔짱을 끼라는 말인 것을 깨닫고는 머뭇거리다 해경의 팔을 잡았다. 연회가 벌어질 곳은 음악회장이었다. 제복을 입은 호텔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큰 접시에 음식을 담아 음악회장으로 나르고 있었다. 해경은 그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음악회장으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서 안을 훑어보자 오른쪽 뒤편에 미리 와 앉아 있던 환이 손을 들어 보였다. 해경은 소화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환의 맞은편에 소화가 앉을 의자를 빼 준 해경은 그 옆자리에서 일부러 다른 사람들로부터 등을 약간 돌리도록 앉았다. 환이 웃는 얼굴로 농담을 섞어 물었다.
“정 선생, 경호원이 이리 늦어도 되는 거요?”
“죄송합니다.”
해경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하자 환이 잠깐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해경을 유심히 보았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습니까? 아까보다 얼굴이 나쁜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아까 잠시 찬바람을 쐬었더니 그런 모양이군요.”
“감기에 걸리신 것 아닐까요?”
소화가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해경은 웃어 보이며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탁자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신 해경은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진 것을 느꼈다. 비록 등을 돌리고 있는 위치이긴 했어도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흘끔 보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닌 탓이었다. 많은 사람이 환을 주목하고 있었다. 당사자가 아닌 자신조차 바늘방석 위에 앉은 기분인데 본인은 어떨지야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인 것을 보며 해경은 내심 감탄했다.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에는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환이 상당히 강심장인 것은 사실이었다. 해경은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정각이었다. 양장을 차려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 강단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남자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마이크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에, 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경실업친목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우관수입니다. 곧 신년회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착석을 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잠시 조용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해경은 잔을 들어 물을 마시다 말고 환의 곁에 누군가 와서 앉는 것을 보았다. 그가 환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환 공 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잔을 내려놓은 순간 해경은 그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중만이었다. 그가 왜 여기에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환이 중만의 손을 잡았다 놓고는 물었다.
“제가 이환입니다만, 우리가 구면입니까?”
환의 물음에 중만이 아, 하고 웃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인천항만주식회사 권중만입니다.”
중만의 이름을 들은 환이 놀란 표정을 했다. 환이 해경과 소화에게 중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하지. 인천항만주식회사를 경영하고 계시는 권중만 사장님이야. 이쪽은 제 친우인 정해경과 그 약혼녀 박소화 양입니다.”
중만이 환의 말을 듣고는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해경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고개를 갸웃했다.
“경성탐정사무소의 정해경 씨 아니십니까?”
“아는 사이십니까?”
해경이 대답하기도 전 환이 당황한 투로 물었다. 해경은 그의 손을 잡았다가 서둘러 놓고는 환에게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형, 나와 권 사장님은 이미 구면입니다. 지난번 라 세느 일로 뵌 적이 있지요.”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려 나왔다. 다행히 누구도 눈치 채지는 못한 듯했다. 중만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런 미남은 쉽게 잊기 어렵지요. 정해경 씨를 한 번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라 세느에 투자 자금을 대었기 때문에…….”
말끝을 슬쩍 흐리는 중만의 말에 환이 아아, 하며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영업에 지장이 생길까 싶으셨던 거군요.”
“네. 제가 그때 좀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정해경 씨가 이환 공과 친우라는 건 매우 뜻밖이군요. 여기 함께 오실 정도면 상당히 돈독하신 것 같은데요.”
중만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해경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입 안이 말랐다. 환이 그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알 수 없었으나 중만과 함께 앉아 있다는 건 해경의 위험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나는 일이었다. 중만이 자신의 과거를 알아서도 안 됐고 환의 친우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주위로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중만에게 말했다.
“정 군과 저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사이입니다. 제게는 몹시 소중한 벗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만 알려 두었으니, 정 군이 탐정사무소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 그럼요. 공연한 오해를 사실까 그러신 게지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만이 웃는 낯으로 시원스레 대꾸했다. 해경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감각했다. 그가 환에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이며, 환이 왜 그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날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왔던 중만과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중만은 같은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을 만큼 다른 태도였다. 그때 중만에게서 느꼈던 다소 기분 나쁜 불편함이 착각이었던가 생각될 정도로 유한 그의 태도에 해경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해경의 표정이 굳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환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최근 원조를 넣고 있는 단체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했지. 그 일을 하는 데 권 사장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네. 인천항만주식회사에서 자금 세탁을 원조하고 있어.”
순간 해경은 미간을 좁혔다. 환이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분명 최근 상해의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데 중만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해경은 중만이 라 세느 건으로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의 기억을 되짚었다. 라 세느 호텔 정도의 대공사에 자금을 대는 업체가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원조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했다. 총독부에 발각되는 즉시 반동분자로 몰려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상당한 규모의 업체를 운영하는 자가 그런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애초에 그런 성향이 바깥으로 드러났다면 회사를 키울 수도 없었을 테니 그가 자신의 성향을 감추고 이중생활을 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자신이 투자한 건물의 지하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 실험이 벌어진 것을 알고 가장 먼저 해경의 입을 막으려 돈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것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해경이 아무 말도 않은 채 중만을 응시하자 중만이 의아한 표정으로 해경을 마주보더니 소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약혼녀시라고요. 평양까지 데려오신 것을 보니 곧 결혼하실 사이인지요? 그날 사무실에서 뵈었을 때는 영 속세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았는데요. 하기야 이렇게 아리따운 약혼녀가 있으셨다면 세상에 무어 부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소화의 귀가 빨개졌다. 해경은 소화가 대답하기 전 선수를 쳤다.
“네, 그렇지요. 말씀하신 대로 아름다운 약혼녀도 있고 사업도 잘 되어 가니 세상에 딱히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해경은 탁자 밑으로 소화의 작은 손을 살짝 쥐었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해경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소화가 중만에게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중만이 소화를 마주보다 해경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이 참으로 불공평하지요. 이런 미남에게 무엇하러 능력도 주고 미인도 주고 한단 말입니까?”
중만이 농담을 던졌다. 해경은 그 말에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그 때 장내가 어두워지며 강단 쪽에 조명이 들어왔다. 앞에 서 있던 관수가 음악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대강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마이크에 헛기침을 두어 번 더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 아. 올해도 서경실업친목회 신년회에 참석해 주신 많은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모임도 점점 번창하고 있어 그 기쁨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쉬이 모시기 어려운 분들까지 참석해 주셔서…….”
관수가 마지막 말을 하며 환 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환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마주보자 관수는 얼른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더욱 특별한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인기 가수의 공연 및 만찬을 준비하였으니 아무쪼록 즐겨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 우관수를 찾아 주십시오. 그러면 첫 순서로 평양 최고의 인기 가수 김화선의 노래 공연이 있겠습니다. 크나큰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관수가 강단에서 내려가자 호텔 종업원들이 서둘러 단상을 치웠다. 뒤편의 커튼이 걷히며 안에서 준비하고 있던 악단이 나타났다. 단장은 머리가 희게 센 초로의 남자로, 그가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해경은 건성으로 박수를 치며 무대를 보았다. 왼쪽에서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풍만한 몸매에 흰 피부가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몸에 꼭 맞는 빨간 드레스와 새빨갛게 칠한 입술연지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토록 귀하신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화선이라고 합니다.”
옥쟁반에 은구슬을 굴리는 듯 청아한 목소리였다. 소화가 두 손을 맞잡은 채 아예 몸을 돌려 화선 쪽을 보다가 해경에게 소곤거렸다.
“향운정에서 미인들을 몹시 많이 보았는데 이 분도 무척 예쁘시네요.”
해경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김화선이라면 기생 조합인 평양권번(平壤券番) 소속으로 경성에서도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였다. 흔히 연예계에 좀 밝다는 자들이 미모와 실력을 갖춘 명창 쌍두(雙頭)로 경성 명창 최자련에 평양 명창 김화선이라 할 정도였다. 그녀는 열일곱에 데뷰(debut)한 이후 지금까지 레코드만도 십여 장이 넘게 취입한 바 있었다. 총독부의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한 적이 있어, 김화선을 친목 모임의 신년회에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이 친목 모임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모임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여러분들께서 많이들 좋아하시는 이정숙의 로 시작하겠습니다.”
화선이 단장에게 손짓을 하자 단원들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화선이 마이크를 양손으로 잡고 서서 목을 가다듬다 반주에 맞추어 입을 열었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간드러지는 듯 하면서도 애절한 목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해경은 소화 쪽으로 슬쩍 눈길을 주었다. 화선의 노래에 푹 빠졌는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얼굴에 흠, 하고 짧게 웃는 소리를 낸 해경은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노래의 첫 번째 절이 끝나고 화선이 두 번째 절을 시작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장내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악단 단원들이 당황했는지 반주 소리도 멈췄다. 화선이 마이크에 대고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이라 관수가 단상을 찾지 못했는지 잠시 후 마이크도 없이 큰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여러분,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모두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금방 해결하겠습니다!”
관수의 말에도 장내의 웅성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소화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해경을 찾아 소매를 살짝 당기며 소곤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글쎄요. 전기가 잠시 나간 모양입니다. 곧…….”
소화를 안심시키기 위해 차분하게 말하던 해경은 말을 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다음 순간 장내에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려 퍼진 탓이었다. 탕, 하며 공기를 뒤흔드는 그 소리에 찰나의 정적이 지나자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음악회장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자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며 서로 입구로 나가기 위해 상대를 밀치고 그 와중에 누군가 넘어지며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 등이 한데 뒤엉켰다. 해경은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소화를 끌어당겨 뒤에서 바짝 안고는 몸을 낮췄다. 해경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침착해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소화가 자신을 안은 해경의 팔을 꽉 잡았다. 품 안에서 소화가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해경은 숨을 죽였다. 처음부터 자신의 뒷덜미를 당기던 불길한 예감이 그 차가운 손으로 스물스물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경은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으로 환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환은 자리에서 몸을 숙인 채였다. 중만 역시 아예 의자 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있었다.
“이 형.”
해경이 나직이 환을 부르는 소리에 환이 응, 하고 대답했다. 해경은 환에게 말했다.
“움직이면 위험하니 자리를 지키도록 해요.”
그때 문 쪽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날아들었다.
“문이 잠겼어! 문이 잠겼다고! 이 문 열어!”
그 말에 장내는 더욱 소란해졌다.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며 바깥에서 문을 열려는 건지 무언가로 문을 부수는 듯 요란한 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때 갑자기 일시에 다시 불이 켜졌다. 어둠에 간신히 익숙해진 눈에 갑자기 빛이 쏟아져 들어와 해경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빛을 가리며 눈을 찡그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해경은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이 엉망으로 널브러진 탁자며 의자가 나뒹구는 사이로 강단 근처의 창이 양쪽으로 열린 것을 보았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붉은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분명 아까는 닫혀 있던 창이었다. 해경은 그 창 너머를 응시하다 검은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자신의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해경은 품에 안고 있던 소화를 바로 탁자 밑으로 밀어 넣으며 환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해경이 막 환의 앞을 막아서자 다시 한 번 귀가 찢어질 듯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미처 사그라지기도 전 해경은 왼쪽 어깨로 누군가가 몹시 차가운 얼음 조각을 깊숙하게 쑤셔 박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작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그 냉기는 곧 불타는 듯한 고통으로 전신에 번졌다. 마치 어깨에 구멍을 내고 불이 붙은 숯을 밀어 넣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해경은 이를 악물며 떨리는 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쌌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환이 크게 뜨인 눈으로 자신을 마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해경은 숨을 몰아쉬며 돌아서서 창 쪽을 보았다. 열린 창 밖에는 어둠뿐이었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서서 그곳을 보던 해경의 한쪽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멍하니 앉아 있던 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해경!”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창백하게 질린 소화가 해경을 받아 안았다. 해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순간이 마치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저격입니다.”
고통을 참는 탓에 갈려 나오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술을 달싹인 해경은 짧은 숨을 토했다. 고개가 소화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소화의 비명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도 멀게 들렸다. 해경은 애써 눈꺼풀을 들어 열린 창 너머의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