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24
00105 위험한 초대 =========================================================================
환 역시 곧 가방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직원을 불러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뒤 세 사람은 방에 앉아 시계를 지켜보았다. 그 시간이 지난 며칠보다도 더 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환이 읽고 난 신문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해경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아까보다 날은 조금 더 흐려진 채였다.
“눈이 또 올까요?”
“눈이 내리기 전에 움직일 수 있어야겠지요.”
등 뒤에서 들린 소화의 물음에 해경이 막 대답했을 때였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화가 얼른 뛰어가 문을 열자 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곧 모임이 있을 예정이니 늦지 않고 참석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계는 열두 시 반을 막 지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경은 자기 가방을 들었다. 환이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벌써 가 있을 생각입니까?”
“미리 가서 들어오는 자들을 좀 지켜보려 합니다. 두 분은 정시에 오셔도 될 겁니다.”
“아, 소화 양과 단둘이 두어 주는 건 고맙지만…….”
“물론 함께 가셔도 상관은 없겠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느물거릴 수 있는 환의 강심장은 존경스러운 것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해경은 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 중간에 말을 끊으며 내뱉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화가 얼른 자기 가방을 들었다.
“저도 내려가겠어요.”
“그러면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더 불안하니 같이 가지요.”
환 역시 몸을 일으키며 말을 보탰다. 해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환을 마주보다 미간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방을 나섰다. 아래층의 대식당에는 이미 몇몇 사람이 내려와 앉아 있었다.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들을 달래며 미리 후식을 먹이는 가족들이라든지 벌써부터 술을 청해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자 서너 명이 눈에 띄었다. 해경은 문에서 가까우면서 다른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자리를 택해 문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았다.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관찰할 생각이었다. 종업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채를 먼저 내어 드릴까요?”
“네.”
종업원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짧게 대답한 해경은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곧 종업원이 부드러운 수프와 사라다(salad), 빵, 버터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해경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십여 분이 지나자 사람들이 점차 대식당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종업원들의 움직임도 따라서 분주해졌다. 중만이 나타난 것은 한 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해경은 중만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중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연스럽게 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찍 내려오셨나 보군요. 여기 앉아도 좋겠습니까?”
환이 대답하기 전 선수를 친 쪽은 해경이었다.
“죄송하지만 다른 쪽에 앉아 주십시오. 오계영이 권 사장님을 노린다면 지난번처럼 이환 형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아,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군요. 제가 자리를 옮기지요.”
중만은 선뜻 대답했다. 그때 관수가 식당 앞으로 나가더니 직원이 건넨 마이크를 받았다. 자리를 옮기려던 중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경실업친목회 총무 우관수입니다.”
관수의 인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해경은 재빨리 날카로운 눈으로 식당 안을 훑었다. 아직까지는 낯선 얼굴이나 수상쩍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관수가 헛기침을 하고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큰 심려를 끼쳐 드려 몹시 죄송한 마음입니다. 뜻밖의 일로 준비한 행사는 치르지 못했지만 대신하여 식사를 대접하기로 하였으니 모두 즐겁게 드시고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경성에서 마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여 부족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직원에게 말씀을…….”
그때였다. 해경은 중만이 재킷 안쪽의 포켓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해경은 거의 본능적으로 중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 그 자리에는 한 호텔 직원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식당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굳어 있던 해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바닥을 요란하게 울렸으나 누구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얼어붙은 것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해경은 크게 뜨인 눈으로 천천히 중만을 보았다. 중만의 손에는 아직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권총이 들린 채였다. 그의 총구가 향한 곳에 호텔 제복을 입은 한 남자 직원이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고 있었다. 바로 곁에 서 있던 여직원이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해경은 자리에서 튀어나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갔다. 천장을 보고 누운 남자의 고개를 돌리게 하자 피가 역류해 벌려진 입에서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왼쪽 가슴을 완전히 관통당해 바닥은 이미 피로 흥건했다. 그의 곁에는 권총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해경은 그 권총을 집어 들었다. 일본군 육군이 사용하는 십사년식 권총이었다.
“그 자가 오계영이오!”
중만이 총을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외쳤다. 해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가 쓰고 있던 제복 모자를 서둘러 벗겼다. 모자의 챙이 만드는 그늘 아래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해경은 사진 속의 남자를 떠올렸다. 짧은 머리에 강한 인상의 얼굴이 피를 토하는 남자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이쪽으로 온 환이 서둘러 남자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상흔을 살폈다. 남자의 경련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해경이 어떠냐는 눈빛으로 환을 마주보자 환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관통했군. 즉사요.”
환이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해경은 숨이 멎은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중만이 가까이 다가와 품에서 사진을 내밀었다. 해경은 그 사진을 받아들고 남자의 얼굴과 번갈아 보았다. 사진 속의 얼굴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이 남자와 동일했다. 호텔 종업원으로 변장하고 잠입했단 말인가. 분명 자신이 종업원들까지는 미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사진 속의 얼굴과 비슷한 자가 있었다면 분명히 눈에 들어왔을 텐데, 어째서 발견하지 못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경은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에 입술을 물었다.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기에 저도 모르게 느슨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해경은 바짝 마르는 입 안을 축이며 중만을 마주보았다.
“이 자를 왜 죽인 겁니까?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았습니까?”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이 곳곳에 남아 있었는데, 범인이 죽어 버렸으니 진실을 밝힐 길은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해경은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줄기를 짚어 보았다. 맥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중만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 선생, 이 자가 날 쏘려고 했습니다. 이 자가 총을 꺼내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중만이 단호하게 해경의 말을 끊었다.
“이 자는 정치범이자 살인범입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단 말입니다. 내가 이 자를 쏜 것은 이 자가 권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발만 늦었어도 이 자는 나를 쏘았을 겁니다. 그런데 나더러 왜 오계영을 죽였느냐고 묻는 겁니까?”
해경은 다시 눈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보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십사년식 권총이었다. 곧 식당 안으로 여러 명의 남자들이 뛰어 들어왔다. 균철이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평양서의 형사들인 모양이었다. 형사들은 남자의 시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들것을 가져와 시체를 서둘러 치웠다. 균철이 중만과 귓속말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더니 후다닥 식당을 나갔다. 중만은 새파랗게 질린 채 서 있는 종업원들에게 말했다.
“어서 바닥을 치워요.”
해경은 그의 태도에서 엿보이는 여유가 거슬렸다. 방금 사람을 죽인 이가 저토록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처음이 아니라는 사람처럼. 권총을 다시 품에 집어넣은 중만은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분, 아무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활개를 치던 흉악범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물론 식사를 계속하셔도 괜찮고요.”
그러나 누구도 방금 사람이 총에 맞아 죽은 식당에서 식사를 계속하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 앞다투어 식당 안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해경과 소화, 환, 그리고 중만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쏟아진 핏자국을 치우던 직원들이 식당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경은 말없이 중만을 마주보았다. 중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험한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만, 사람을 죽인 일로 처벌을 하겠다면 물론 달게 받을 것입니다.”
“정당방위로 인정이 되겠지요.”
해경은 냉소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어떤 속임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중만의 반응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닌 이상, 오계영이 총을 뽑는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쏠 수 있었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어야만 가능할 일이었다. 오계영이 호텔 직원으로 변장한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중 첩자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경은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방금 전까지 남자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이제 한숨 돌리시겠군요.”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중만이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해경은 순간 그 말에 심장이 선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이정석임을 알아본 것은 아닐까. 머릿속이 새하얘져 잠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중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해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 선생 덕분에 위험한 일이었지만 잘 해결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해경은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고는 소화에게 걸어갔다. 소화는 하얗게 질린 채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표정으로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시체를 보는 것은 무섭지 않다고 했어도,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일은 경우가 달랐다. 해경은 새삼 다시 한 번 후회하는 마음으로 소화의 어깨를 감싸 안아 일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지 못한 것을 보게 했군요. 미안합니다. 어서 돌아가지요.”
손에 잡힌 작은 어깨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해경은 환에게 눈짓을 하고는 서둘러 소화를 데리고 식당을 나섰다. 등 뒤에서 중만의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에 환을 먼저 태운 해경은 뒤따라 소화를 태우고는 조수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양 옆으로 눈을 치워 놓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환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오계영이 죽었으니 무사히 끝난 겁니까?”
“여기서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일단 목적은 달성한 겁니다.”
해경은 짧게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어깨가 욱신거렸다. 마치 그곳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맥박 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긴 숨을 들이쉰 해경은 등받이에 뒷머리를 두어 번 쿵쿵 박았다. 해경의 머릿속으로 식당에서의 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중만은 일부러 해경의 곁에 앉으려 했고, 다른 자리를 권하자 자리를 옮길 것처럼 일어났다가 관수의 말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결국 환과 조금도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죽은 자가 진짜 오계영이라면 중만이 굳이 그렇게 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러나 만약 그가 오계영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목표가 환이었다면 중만은 왜 그를 죽였던 것일까. 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사냥꾼이 사냥개를 죽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함정에 빠져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함정에서 살아서 돌아가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뒷덜미를 당기는 불안감은 몹시 불쾌한 것이었다. 평양역에 도착해 경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기차의 특실을 탄 세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해경이 나직이 묻자 소화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숙인 소화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았다. 해경은 소화의 치맛자락 위로 무언가 떨어져 얼룩이 지는 것을 보았다. 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해경은 아무 말도 없이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소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소화가 죄송해요, 하고 조그맣게 말하며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울음을 그쳤는지 소화가 손수건을 쥔 손을 내리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밖을 보고 있던 소화는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문득 아, 하며 해경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다시 눈이 내려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해경은 고개를 돌렸다. 회색으로 물든 기차의 창 너머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풍경을 보던 해경은 눈을 감았다. 소화의 작은 손이 해경의 손등 위에 잠시 겹쳐졌다가 떨어졌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그 손의 감촉에 해경은 다시금 가슴 어딘가가 선뜩해졌다.
“열이 좀 있으신 것 같아요.”
소화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해경은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네,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기차가 움직이는 규칙적인 소음에 머릿속에서 자꾸만 생각이 끊겼다. 해경은 가라앉는 의식 사이로 이마에 얹히는 서늘한 감각을 잠시 느꼈다. 저도 모르게 누나, 하고 중얼거린 해경은 몸을 조금 웅크렸다. 머릿속에 눈이 쌓이듯 서서히 모든 생각들이 지워져 갔다. 꿈이 없는 잠이 찾아들었다. 무저갱(無底坑)의 함정 속으로 누군가 등을 떠밀어 끝없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고 들어왔다. 창 밖으로는 물기 없는 눈송이가 흐드러져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