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73
============================ 작품 후기 ============================
* 경성재판소는 현재의 서울지방법원으로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이 바로 경성재판소 건물이며, 이 건물은 해방 이후부터 1989년 서초동 신청사 이전 전까지 대법원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 당시 남산 경성신사가 설치된 조선신궁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현재의 남산 백범 광장을 통하는 중앙 길은 표참도(表參道), 남산도서관 방향의 서쪽 길은 서참도(西參道), 숭의여대 방향의 동쪽 길은 동참도(東參道)로 불렸습니다. 표참도를 통해 올라가면 신사 입구의 도리이가 있었고, 이 앞에는 하광장(下廣場)이 조성되었습니다. 도리이를 지나 384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경내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 KYC 도성길라잡이 이종현 선생님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조선신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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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망회회(天網恢恢)
소화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때까지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해경이 소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소화는 해경과 눈을 마주치고는 증인석에 앉았다. 긴장 탓인지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으나 소화는 숨을 고르며 침착하려 노력했다. 소화가 조금 진정된 것을 알았는지, 잠시 사이를 둔 나카모리가 소화를 보며 물었다.
“박소화 양은 피고의 탐정사무소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평소 무슨 일을 하고 있지요?”
“간행물과 우편물을 정리하고 손님을 접대하거나 현장 일을 돕기도 합니다.”
소화는 대답하며 해경 쪽을 보았다. 해경은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법정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본 부드러운 표정에 약간 안심이 된 소화는 떨리는 손을 꼭 맞잡았다. 나카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의 필적에 대해서 잘 압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 피고가 직접 쓴 것을 알아보겠습니까?”
나카모리는 소화 앞에 같은 문장이 쓰인 세 장의 종이를 놓았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필적이었으나 소화는 어렵지 않게 가운데 놓인 것을 가리켰다. 나카모리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해경의 이름이 쓰인 것을 방청석에 확인시켜 주었다.
“증인은 피고의 필적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증인은 이영신 양이 받았다는 협박 편지가 절대 피고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맞습니까?”
“네.”
“재판장님, 검사 측이 제출한 필적 자료를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카모리의 말에 오른쪽의 배석 판사가 제출된 편지를 내밀었다. 나카모리는 그것을 소화에게 보여 주었다. 소화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필적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흉내 내어 적은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협박 편지에 쓰인 한자는 모두 약자인데, 선생님은 평소 한자는 반드시 정자로 적는 습관이 있고 반드시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왜식 한자도 일절 쓰지 않으세요.”
“여기 증인의 말을 증명할 자료가 있습니다.”
나카모리는 들고 있던 편지와 함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문서를 다시 제출했다. 사무실에서 해경이 그간 직접 작성해 왔던 문서들이었다. 검사가 입술을 잘근거리다 질문이 없다는 표시를 했다. 나카모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보고는 소화에게 들어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증인석에서 일어난 소화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자리로 돌아왔다. 인혜가 차가워진 소화의 손을 꼭 잡으며 수고했어요, 하고 속삭였다. 나카모리가 말을 이었다.
“피고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피해자의 상태가 어땠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영신 양은 신사 입구 인근에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죽은 것을 몰랐습니다. 편지를 건넨 사람으로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영신 양이 쓰러졌습니다. 그때 이영신 양이 매우 큰 상처를 입었고 이미 위독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습니까?”
“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잠시 후 경찰들이 왔고 저를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해경의 증언을 들은 나카모리가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가 앉은 둘복을 보았다. 둘복은 몹시 초조한 듯 눈알을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증인 김둘복 씨의 말에 따르면 경내에서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만일 그랬다면 피고에게도 증인이 보였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신사 인근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확실합니까?”
“네.”
해경은 둘복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둘복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아예 고개를 돌렸다. 소화는 둘복의 낯빛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곁에 앉은 옥숙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일 해경이 승소한다면 저들에게 위증의 죄가 돌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피고가 범인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경성제대 의학대학 법의학교실 구니히사 야스히데[國久 康英] 교수를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나카모리의 말에 구니히사가 증인석으로 나섰다. 검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구니히사를 노려보았으나 구니히사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카모리가 구니히사에게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이영신 양의 부검을 집도하셨지요. 법의학자로서의 소견을 들려주십시오.”
“피해자의 사인은 과다출혈입니다. 등 뒤에서 아주 강한 힘으로 낸 세 개의 자상이 결정적이었지요. 상처의 깊이나 각도로 보아 범인이 장신이며 힘이 좋은 자일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검사가 눈을 빛냈다. 소화는 땀이 배어나는 손바닥을 꼭 쥐었다. 구니히사는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몸에는 방어흔을 비롯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몸싸움을 하다 흉기로 상대를 찌르는 경우, 찔리는 쪽은 본능적으로 방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칼로 찌르라고 얌전히 있을 사람은 없지요. 방어흔이 없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했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피고는 상당한 장신의 청년인데, 신장 백오십 센티미터의 여자가 이런 청년과 몸싸움을 벌이며 상처 하나 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마주보고 싸우는 상태에서 굳이 팔을 뒤로 돌려 등을 찌른다는 것도 이상하지요.”
“목격자의 증언이 위증일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검시 결과 위뿐 아니라 입 안에도 음식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까지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는 겁니다. 크게 다투면서 음식물을 계속해서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광경이기는 하군요. 그리고 목의 상처는 혈류가 멈춘 뒤에 난 것인데, 칼을 가져간 자가 칼로 찌른 뒤 그 칼을 버리고 만년필로 다시 목을 찌른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름이 쓰인 만년필로 그랬다는 건 자신을 살인범으로 알아주기를 바랐다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상황을 부러 가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엽기적인 발상이고,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이런 생각을 쉽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말은 다소 조롱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 미묘한 말투를 눈치 챈 것인지 순간적으로 검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구니히사는 증언을 계속했다.
“수거한 피고의 피복(被服)에서 나온 혈흔은 대부분 피해자에게서 옮겨 묻은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힘으로 사람을 찌른다면 순간적인 압력 때문에 피가 아주 빠른 속도로 분사되지요. 이 때 남는 혈흔을 비산혈흔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고의 피복에서는 비산혈흔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설령 손을 뒤로 돌려 찔렀다 해도 소매에는 비산혈흔이 묻기 마련입니다.”
“옷은 빨아 버리거나 핏자국을 문질러 버리면 그만인 것 아닙니까?”
참지 못하고 끼어드는 검사를 보며 구니히사가 처음으로 입매를 약간 비틀어 웃는 표정을 했다.
“현행범이 신사 앞에서 옷을 빨 곳이 있습니까? 그리고 비산혈흔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생성되는 순간 섬유의 조직 안으로 파고듭니다. 또한 입자가 작기 때문에 그것을 일일이 문질러 없애기는 어렵지요.”
“그런 것을 대체 어떻게 분석한다는…….”
“검사께서는 우리 대일본제국의 수준을 매우 폄하하고 계시는군요. 대일본제국의 과학 기술은 구주(歐洲)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구니히사는 검사의 말허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말문이 막힌 검사가 이를 물었다. 계속해서 구니히사를 추궁했다가는 구니히사의 말마따나 제국이 자랑하는 과학 기술을 부정하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구니히사의 말을 인정한다면 꼼짝없이 패소할 판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공판 시작 직전 나갔던 나카모리의 비서가 들어와 나카모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카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의 침묵이 이어지자 재판장이 물었다.
“검사 측, 증인 신문을 계속하겠소?”
“아닙니다.”
구니히사에게 더 물어 봐야 그쪽이 불리하다는 것이 명백해진 탓인지 검사는 즉각 재판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니히사가 자리로 돌아가 앉자 나카모리가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증인을 신청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서류를 넘겨보더니 안경을 고쳐 썼다.
“증인이 법정에 도착했소?”
“네.”
재판장이 허가한다는 손짓을 했다. 곧 문가에 서 있던 나카모리의 비서가 문을 열었다. 무심코 문가를 돌아본 소화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몸을 구부정하게 숙인 채 천천히 법정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해경 역시 멈칫하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금석이었다.
금석은 큰 체구를 끌고 증인석으로 와서 앉았다. 법정 안이 숨소리 하나도 나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소화가 입을 막은 채 인혜를 쳐다보자 인혜가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살짝 대었다. 금석의 뒤를 따라 들어온 환이 소화의 곁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 어찌 된 거예요?”
소화가 더듬거리며 환에게 묻자 환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걱정 말아요.”
나카모리가 연신 시계를 보며 기다리던 사람이 금석이었던 것일까. 소화의 머릿속에 퍼뜩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카모리는 조금 더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증인 이금석 씨는 현재 이 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증언해 주십시오.”
금석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이 그의 인상을 더 거칠어 보이게 했으나, 소화는 그의 뒷모습이 가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려워하는 것일까. 소화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금석의 말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금석은 나카모리가 이금석 씨, 하고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 마침내 얼굴을 들었다.
“이 사건의 진범은,”
간신히 꺼내 놓은 목소리의 끝이 가닥가닥 갈라졌다. 금석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벌벌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쥔 금석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다음 말을 뱉었다.
“저입니다.”
뜻밖의 말에 법정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판사들도 당황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카모리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하게 하자 금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영신 양을 죽였습니다…… 정해경 씨에게 원한이 있던 이영신 양을 이용해 편지를 전달하도록 하고,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정해경 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이영신 양을 살해했습니다.”
“증인!”
재판장이 봉을 두드렸다. 금석은 눈을 들어 재판장을 보았다. 재판장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금석에게 물었다.
“증인은 지금 과실치사 및 살인교사 등의 혐의로 수감되어 있소. 위증의 죄가 추가되면 어찌 될지 알고 있소?”
“네.”
“증언하도록 협박을 받았거나 대가를 받은 것이 있다면 지금 이야기하시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제가 진범입니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검사가 금석에게 달려들었다. 직원들이 튀어나와 검사를 말렸다. 검사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금석을 다그쳤다.
“헛소리하지 마! 동기는! 동기가 무어야!”
“인천항만주식회사 권중만 사장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일입니다.”
금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으나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이 명확했다. 금석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삽시간에 법정 안이 고요해졌다. 검사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금석을 마주보았다. 금석은 마치 빗장이 풀려 버린 것처럼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말을 이었다.
“권중만 사장이 부친을 살해하고 이 사건을 조사하던 조선일보 장순현 기자의 살해를 사주했습니다. 이 때문에 정해경 씨가 진실을 밝히려 하자 정해경 씨를 제거하기 위해 누명을 씌우기로 한 것입니다. 권중만 사장과 제가 모든 일을 계획했습니다. 경성신사 앞을 택한 것도 정해경 씨를 불령선인으로 조작하기 위한 수였습니다. 제가 이 사건의 진범입니다, 재판장님.”
그때 비서가 나카모리에게 큰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를 열어 본 나카모리가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면장갑을 끼고 봉투 안에서 만년필과 낡은 신발 한 켤레, 더러워진 칼 한 자루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서류 두 장을 꺼냈다.
“방금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와 경성제대 법의학교실에서 전해 온 증거입니다. 현장에서 발견되었고 피해자의 목을 찌른 것으로 추정되는 정해경 씨의 만년필에서 증인의 지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당시 신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금석 씨의 이 신발에서는 이영신 양의 입 안과 위, 그리고 현장에 남아 있었던 것과 같은 성분의 과자 부스러기가 나왔습니다. 또한 이음새에서는 이영신 양과 같은 혈액형 오 형의 혈흔 소량이 검출되었습니다. 인근에서 이러한 과자를 파는 곳은 명치정의 마담 에미리(Emily)가 운영하는 양과자점 한 곳이며, 이영신 양이 평소 이곳의 단골이었다는 증언을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이금석 씨가 지목한 남산공원 인근에서 범행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를 찾아내었습니다.”
나카모리가 서류를 재판장에게 제출하자 판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오랫동안 논의를 나누던 재판장이 자세를 바로 해서 앉으며 금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증인은 이 사건의 범인이 증인임을 확실히 자백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만일 증언 내용을 전부 사실로 인정한다면 살인죄와 무고죄가 추가될 거요. 이후에는 번복하려 해도 절대 할 수 없소.”
“알고 있습니다.”
금석의 대답은 작지만 단호했다. 재판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출된 증거와 증인 신문을 통해 현재 피고 측의 주장에 정당성이 있다고 보이며, 동시에 증인 이금석이 진범임을 자백한 이상 이 사건의 기소는 성립될 수 없소. 이상이오.”
의사봉을 쳐 판결을 확정한 재판장이 자리를 떴다. 배석 판사들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웅성거리는 법정 안에서 소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사가 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무어라고 혼잣말을 내뱉더니 나카모리의 인사도 받지 않고 법정을 빠져나갔다.
나카모리가 멍하니 앉아 있던 해경의 어깨를 짚으며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해경은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잠시 앞을 보고 있다가 소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던 소화는 커다랗게 뜨인 눈을 깜빡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해경을 마주보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하나 둘 빠져나갈 때마다 조금씩 현실감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건 어쩌면 아주 행복한 꿈일까. 소화는 공중에 뜬 듯한 기분으로 해경의 눈동자를 한없이 응시했다. 해경은 아무 말도 없이 소화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팔을 벌려 소화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긴 소화는 멍하니 뜨고 있던 눈을 내리감았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시에 지워졌다. 해경의 손이 소화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감각하고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기 무섭게 마치 누군가 쌓아 올린 둑이 무너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화는 해경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서럽게 울었다. 그 사이 한 번도 이렇게 소리를 내어 울어 본 일이 없었던 것은 만약 그랬다가 자신보다 먼저 해경이 무너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소화는 떨리는 손으로 해경의 등을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듯이, 두 번 다시는 해경이 없는 미래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처럼. 해경은 아주 오랫동안 소화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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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망회회(天網恢恢)
향운정 별채의 거실에는 인혜와 해경, 환이 모여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다기를 가지고 나온 미랑이 찻잔을 놓고 차를 따르자 거실 안에 순식간에 부드러운 차 향이 번져나갔다. 해경은 미랑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이제 한낮에는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 터였지만 아직 따뜻한 차가 불쾌하지는 않은 날씨였다. 인혜가 열린 창 밖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경성이 온통 이 이야기뿐이에요. 사무실은 언제부터 다시 열 건가요?”
“여는 것이야 무어 어렵겠습니까. 당장 내일부터라도 할 수 있지요.”
인혜의 물음에 해경이 반쯤 농담처럼 대답하자 인혜가 눈을 흘겼다.
“며칠 더 쉬어야 한다니까 그러는군요. 미스터 정도 미스터 정이지만 소화 양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해경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소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환이 차를 마시며 찻잔 너머로 웃는 눈을 했다. 공연히 민망해진 해경은 흠, 하고 가벼운 헛기침을 뱉었다. 소화는 공판이 끝난 뒤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열이 많이 나고 몹시 앓아 방에 누워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그나마 죽이라도 좀 먹었다고는 했으나, 어지간하면 지금쯤은 나와서 차라도 한 잔 할 터인데 미랑의 말로는 방에서 깊이 잠들어 깨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해경은 그것이 모두 자기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쓰였으나, 무슨 말을 꺼내는 대신 다시 차를 마시며 마르는 입을 축였다.
“그나저나 이제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해경이 은근슬쩍 말을 돌리자 환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나씩 해결 중입니다. 일단 이덕완이 나를 살해하라고 사주했던 최백길은 절도죄로 체포하도록 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다른 살인 정황이 드러나 곧 공판에 세워질 거요. 그리고 내가 이덕완에게 받은 자백서가 집안에서 큰 문제가 되었소. 어쨌든 권 사장과 공모하여 나를 죽이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을 했으니까요. 어른들은 보석으로 석방하고 여죄를 묻지 않는 대신 집안과 절연시키는 것을 고민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잘 되었군요.”
“이금석의 경우에도 벌을 받아야겠지만 노모가 일절 거동을 할 수 없고, 이금석이 부양하지 않으면 돌아가시는 수밖에 없으니 변호사를 붙여 자수한 부분을 참작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예 무죄로 풀려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공판 과정과 수감 동안 들어가는 부양비는 백명숙 씨 측에서 부담하겠다 합니다.”
“백명숙 씨가 말입니까?”
해경은 놀란 표정을 했다. 인혜가 환 대신 곁에서 말을 거들었다.
“권중만 사장이 아들 몫의 유산을 강탈한 것에 대해 재판을 걸 모양이에요. 권 사장이 도망을 치는 바람에 회사 경영이 공석이라 백명숙 씨가 당분간 대신 관리할 것이고, 권 사장이 본가에 감시역으로 심어 놓았던 자들도 모두 해고했대요. 권 사장이 만일 아무 일도 없이 복귀한다면 소송을 진행할 거라더군요.”
“물론 체포되어 교도소행이라면, 회사의 전권을 권 사장이 가지고 있었고 주식 지분도 상당수 보유했는데 그게 그대로 백명숙 씨에게 넘어갈 가능성도 있소.”
환이 덧붙이고는 팔짱을 끼며 웃었다.
“애초에 소화 양이 백명숙 씨를 데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정 선생은 아직도 독방 신세였을 겁니다. 만일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한들 절대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을 거요. 백명숙 씨가 권 사장과 한패일 수도 있는 것이고, 제 나름의 속셈이 있어 도리어 자기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는데 소화 양이 물불 아니 가리고 간 덕에 정 선생이 여기 있는 것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는 무얼, 정 선생은 그 정성 백분의 일도 몰라요.”
환이 반쯤 농담처럼, 그러나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해경은 그 말에 고개를 약간 숙이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답지 않게 부끄러운 기분이 된 것을 눈치 챘는지 인혜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거렸다. 해경은 공연히 뜰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
“더 놀렸다가는 도망이라도 가겠군요. 아무튼 이환 공도 고생 많으셨어요.”
인혜의 말에 간신히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된 해경이었다. 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고생이랄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일본인 변호사와 일본인 교수가 아니었으면 그 치들이 듣는 척도 하지 않았겠지요. 나카모리 변호사와 구니히사 교수님이 여러모로 힘써 주신 것이지 제 공은 없습니다.”
“그분들도 이환 공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에 나서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환이 씁쓸하게 웃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환의 부탁이니 조선인의 재판에 나서 준 것이지, 나카모리든 구니히사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조선인의 일이었다면 그렇게 발 벗고 나섰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던 환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혹여 이 일로 무슨 피해라도 가지 않을지 걱정이라, 고마운 마음도 온전치 못해 아쉽습니다.”
“별 일은 없으시겠지요?”
걱정스러운 인혜의 얼굴에 환이 대답했다.
“본인들 말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하기는 하시더군요. 게다가 총독부에서도 이 일로 몹시 골치 아파 하는 이들이 많답니다. 당일 갑작스럽게 재판부가 변경된 것도 그렇고, 인천항만주식회사도 어차피 조선인의 회사니 이 참에 권중만을 제거하고 일본인이나 총독부 소유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하고요.”
“그 자들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떡 먹는 격이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아예 목표를 권중만 사장으로 바꿀 모양입니다. 회사의 선박들은 이미 출항이 모두 묶였고, 권중만 사장에게도 수배령을 내렸다더군요. 운신이 쉽지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경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권중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장순명을 이용해 부산으로 유인하기로 계획을 짰는데…….”
환이 말끝을 흐리더니 해경의 눈치를 보았다. 까닭을 알 리 없는 해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환을 마주보았다. 잠깐 인혜와 시선을 주고받던 환이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장준학 씨는 인천항만주식회사 인근에서 잠복하고, 정아경 씨는 부산으로 내려가 직접 권중만을 잡겠다고 했소.”
“……뭐라고요?”
해경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준학과 아경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던 탓이었다. 삽시간에 굳은 얼굴을 하는 해경을 본 환이 달래듯 입을 열었다.
“정아경 씨가 알리기를 원치 않아 이야기하지 않았소. 알리면 정 선생이 걱정할 거라 생각하더군요.”
“누나가 대체 무슨 수로 권중만을 잡겠다는 겁니까? 만에 하나라도…….”
“장준학 씨가 동의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소?”
환이 되물었다. 해경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준학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아경을 보호해 왔고, 그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아경이 위험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굳이 따로 떨어져 아경만 부산으로 내려 보냈을 리는 없었다. 환이 다시 한 번 해경을 진정시키려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혼자 간 것은 아니고, 평소 도움을 받던 조공 당원들 몇몇이 함께 간 거요. 피는 못 속인다고, 정아경 씨도 보통 위인은 아닌 듯싶던데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소.”
권중만의 집에서 도망쳐 나오던 한겨울 밤, 자신을 먼저 보내고 뒤에 남겨졌던 누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아경이 그 밤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해경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남의 집 종살이를 하던 어린 소녀가 그 먼 용정까지 가서 여학교 재단을 설립한 의문의 여류 독지가로, 그리고 의사로 변모하기까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을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해경은 입술 끝을 물었다. 면회실에서 아경을 다시 만났을 때, 아경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널 구할 거야. 해경은 문득 생각했다. 이 기나긴 악몽의 끝은 어디일까. 자신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시달렸던 악몽의 시원(始原)은 중만이었다. 아경에게도 그것이 별다르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 모든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결국 단 하나뿐이었다. 권중만이 사라지는 것.
“……혹시 자세한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환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하다 대답했다.
“장순명을 이용해 부산에 배편을 구해 두었다고 알려 주었소. 권 사장이 그 즉시 달아난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부산으로 갈 생각일 거요. 만일 그 배편을 타지 못한다 해도 일본과는 가까우니, 아무 배라도 타고 도망치면 그만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테니까.”
“그 배편은 미리 준비된 것이고요?”
“아마 그렇지 않겠소? 일단 배에 탄다면 돌아갈 곳은 없으니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것이고, 경성이 이리 발칵 뒤집어진 마당에 총독부에서도 수배령이 떨어졌으니 달아난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해요.”
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해경으로서는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해경은 면회실에서 만났던 아경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아경은 자신에게 살아 있었냐고 물었었다. 마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되돌아온 것을 본 듯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죽었다고 믿었던 거라면 아경의 마음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권중만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이라고 했습니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어요. 정아경 씨에게 맡길 뿐입니다.”
해경의 물음에 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장을 하고 자기 정체를 감추며 위태로운 외줄을 타고 있던 아경이었다. 해경은 그런 아경이 약한 사람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경은 아경이 그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권중만에게 그랬듯이, 죄책감으로 오랜 시간을 덧없이 보내 버릴까 염려되는 탓이었다. 말이 없어진 해경의 안색을 살핀 인혜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생각났다는 듯 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정원에 관심이 있다 하셨지요? 모처럼 느긋할 때고, 이왕 오신 김에 구경을 시켜 드리지요.”
“네?”
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인혜를 마주보다가 아아, 하며 손뼉을 쳤다.
“그렇군요, 제가 일전에 그랬던 적이 있지요. 맞습니다. 요즘 정원 꾸미는 것에 좀 관심이 생겨서요. 안내를 해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미스터 정은 소화 양에게 잠시 가 보면 어때요? 혹여 깨어났으면 식사라도 좀 권해 보아요. 아침나절에 죽 한 그릇 먹은 것 빼고는 일절 아무 것도 아니 먹었으니까요. 이환 공, 이리 따라오시지요.”
해경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인혜가 자리를 떴다. 환 역시 해경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그럼, 하더니 인혜의 뒤를 따랐다. 해경이 이마를 짚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현관을 나선 뒤였다. 열린 창으로 정원 한복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인혜와 환을 지켜보고 있던 해경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탁자 위의 잔을 치우러 온 미랑이 쟁반에 잔을 올리며 말했다.
“어서 아가씨 방에 가 보셔요. 저 안쪽 방이에요.”
미랑까지 합세해 등을 떠미는 통에 해경은 기가 차 웃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기 전 소화를 보고 갈 생각이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해경은 소화의 방으로 향했다. 닫힌 문을 두 번 두드렸으나 안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이 든 건가 생각하며 해경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려 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불을 끄고 커튼을 친 방 한가운데 소화가 누워 있었다.
잠깐 마른기침을 뱉은 소화가 몸을 뒤척이더니 색색거렸다. 멈칫한 해경은 가만히 그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소화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거리며 맺힌 채였다.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낸 해경은 소화가 깨지 않도록 가만히 이마에 어린 땀을 닦아 주었다. 언젠가부터 처음 만났을 때의 앳된 느낌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고 느꼈으나, 잠든 얼굴은 아직 천상 어린 소녀여서 해경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리 되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해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권중만의 계략에 걸려든 이후 소화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면회를 올 때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얼굴로 도리어 해경의 얼굴이 상했다며 걱정하는 것을 보면 해경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곤 했다. 자신이 저지른 한순간의 경솔함이 소화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화에게 그런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소화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무슨 꿈을 꾸는지 팔을 휘적였다. 그 통에 쳐낸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준 해경은 손을 뻗어 소화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해경은 단 한 번도 타인들처럼 평범한 삶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남은 생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해경은 언제나 그런 삶은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해경은 소화가 없는 풍경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워진 자신을 깨닫곤 했다. 수감되어 있던 동안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경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것은 해경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소화에 대한 것이었다. 소화가 자신처럼 권중만의 위협 속에서 살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신 때문에 빼앗겨 버리는 것이라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경은 자신이 소화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음은 언제나 이렇게 생각을 앞질러 나가는 것인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 앞에서 해경은 자신의 그 서투름을 때때로 낯설게 여기곤 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해경은 어린 소년처럼 무릎을 끌어당겨 안고는, 커튼 사이로 걸러져 들어오는 오후의 빛 속에서 잠든 소화를 지켜보다 눈을 감아 보았다. 마치 다른 세상인 양 고요한 방 안에서는 햇살이 움직이는 소리까지도 들릴 것만 같았다. 해경은 그 정적에 몸을 맡기며 숨을 죽였다. 희미하게 스치다 곧 사라지는 작은 숨소리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선생님.”
얼마나 오랫동안 그 침묵 속에 잠겨 있었는지 해경은 깨닫지 못했다. 숨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소화의 목소리에도 해경은 마치 반쯤 잠든 사람처럼 미처 눈을 뜨지 못했다. 바닥에 늘어뜨려진 손가락 끝을 잡아 오는 작고 따뜻한 온기에 해경은 눈을 뜨는 대신 그 온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법한 것을 다루듯이.
“언제 오셨어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 잠긴 목소리로 소화가 물었다. 해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전에요.”
“깨우지 그러셨어요.”
“잠이 깊이 든 것 같아 그러지 않았습니다.”
해경의 대답에 소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정적에 해경은 눈을 떴다. 동그란 눈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소화는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꼼지락거려 해경의 손가락을 더 꼭 쥐며 물었다.
“선생님, 아무 데도 가지 않으실 거지요?”
“왜 그런 것을 묻습니까?”
해경이 되묻자 소화가 대답 대신 머뭇거렸다. 해경은 소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손을 뻗어 소화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여기 있을 겁니다.”
소화가 눈을 들어 해경을 쳐다보았다. 해경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해경은 문득 일전에 조선극장 사건을 조사하던 때 소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선생님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하더라도 나중에 마음이 변해 저를 귀찮게 여기지는 말아 주셔요. 해경은 그 말을 하던 소화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소화가 의아한 표정을 하는 것을 본 해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깜빡이던 소화는 해경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제가 선생님 곁에 있어도 되는 거지요?”
해경은 물끄러미 소화를 응시했다. 대답 없는 해경을 올려다보던 소화는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재차 물었다.
“제가 계속 곁에 있어도 싫어하지 않으실 거지요?”
해경은 그 말에 다시 눈을 감고는 다른 손으로 소화의 작은 손을 마주 감싸며,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화 양이 나중에 마음이 변해 나를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면, 부디 그렇게 해 주십시오.”
소화가 잠시 멈칫하더니 웃는 소리를 내었다. 끝이 짧은 웃음은 곧 사그라져 오후의 햇살 안으로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해경은 눈을 감은 채 손 안의 온기를 놓치지 않을 것처럼 꼭 감싸며 생각했다. 만일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나날들이 찾아온다면, 더 이상의 악몽이 없는 그런 날들이 자신에게 허락된다면 언젠가는 바로 지금 같은 시간들이 일상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해경은 자신의 바람이 너무 큰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두 손으로 감싸 쥔 소화의 손을 끌어당겨 거기에 이마를 대었다. 시간조차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해경은 문득 이대로 사라져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잊어버린 오래 전의 행복한 꿈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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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망회회(天網恢恢)
아경은 불을 붙이지 않은 궐련을 입에 문 채 중절모의 챙 아래로 다방 창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흘끗 눈을 주었다. 항구 근처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가다 보니 누구도 아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다 식어 버린 커피를 앞에 놓고 앉아 있던 아경은 누군가 맞은편에 와서 앉는 것을 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공 당원 중 하나인 황일욱이었다. 신문을 손에 들고 있던 일욱은 가까이 온 웨이트레스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 선생, 신문은 보셨습니까?”
아경이 대답 대신 눈을 들어 그를 마주보자 일욱이 가지고 있던 신문을 아경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아경은 말없이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틀 전의 신문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이었다. ‘悖倫 殺人魔 逃走, 警務局 手配令(패륜 살인마 도주, 경무국 수배령)’.
여학생 이영신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정해경의 공판에서, 권중만의 부친 권경천과 조선일보 기자 장순현을 죽인 진범이라고 자수한 이금석이 실은 모든 것이 권중만의 사주였다고 털어놓았고 이 때문에 경무국이 권중만에게 수배령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재판장이 이금석의 자백을 듣고 검사의 고발은 무효이고, 더 이상 공판을 진행할 수 없다고 그 자리에서 석방하도록 했답니다.”
일욱이 덧붙인 말에 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정해경 씨 쪽은 해결이 된 것이군요.”
담담한 말투였으나 만일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면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올렸을지 몰랐다. 얼마나 오랜 시간들을 죄책감과 악몽 속에서 살아 왔던가. 아경은 잠이 들 때마다 온 몸이 피투성이로 물든 어린 해경이 자신을 부르는 꿈을 꾸곤 했다. 해경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해경을 함정으로 몰아넣은 덫이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아경이었다. 권중만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마치 그림자처럼 등 뒤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악몽은 자신과 해경을 놓아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면회실에서 처음 해경과 재회한 순간 아경은 속으로 이를 갈며 다짐했다. 이 기나긴 악몽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 버리겠다고, 반드시 받은 만큼 돌려주고 말겠다고.
“인천 쪽은 어찌 된 겁니까?”
“장 선생이 지금 이리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쪽은 이미 수배령이 떨어져 회사 소속의 모든 선박이 묶였고 일본 경찰이 감시중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권중만이 부산에 있는 이상 인천에 있을 이유가 없지요.”
“장순명은?”
“잘 감시하고 있습니다. 자정 전에 권중만과 접선할 예정인데, 놈이 지금 부산항 인근 여인숙에 묵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상해 쪽에서 은밀히 보낸 자들이 도착했는데 일이 끝나는 즉시 장순명을 넘겨 달라더군요.”
아경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궐련 끝을 이로 잘근거렸다. 그렇다면 장순명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조국의 독립을 걸고 투쟁하는 자들 중 변절자가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배반의 대가 역시 결코 작지 않았다. 하기야 고작 돈 몇 푼에 제 핏줄까지 팔아먹는 자가 여생을 무탈히 보내게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뻔뻔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그쪽의 규칙에 따르는 편이 좋겠지요. 배는 준비되었습니까?”
“선장이 이 근처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장 선생도 그리 오기로 했습니다.”
“자리를 옮겨야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경은 때마침 일욱이 주문한 커피를 가져오는 웨이트레스에게 두 사람 분의 커피 값을 계산하고는 다방을 나섰다. 땟국이 흐르는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한 까까머리 아이들이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와사등 불빛 아래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게다짝을 딱딱거리며 종종걸음을 걷는 일본 여자들이나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중국인들이 곁을 지나쳤다.
아경은 그 거리의 풍경 속 여상한 사물처럼 대화 없이 일욱의 뒤를 따랐다. 일욱이 안내한 곳은 항구 뒤편의 인적 드문 선술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리 와서 앉아 있던 오계영이 인기척을 듣고 돌아보더니 손을 들어 보였다.
“이쪽이오.”
계영의 곁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작은 체구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였다. 초여름 날씨인데도 숄을 머리부터 둘러 얼굴을 가린 여자의 모습에, 아경은 계영에게 누구냐는 눈짓을 보냈다. 계영이 대답 대신 자리를 권했다. 아경과 일욱이 자리에 앉자 선술집 안쪽에서 한 중년 남자가 나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대남입니다. 제가 배를 몰 선장입니다.”
“어릴 적 일본에서 뱃일을 배워 일본어도 능숙해요. 내지인들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요.”
계영이 말을 보탰다. 아경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아경의 주의는 곁에 앉은 여인에게 쏠려 있었다. 기모노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손가락은 앙상해, 젊은 여인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낡았지만 깨끗하게 손질한 티가 나는 기모노며 꼿꼿하게 등을 펴고 앉은 자세가 예사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경이 묻자 여인보다 계영이 먼저 대답했다.
“내 손님이오. 이 배에 꼭 함께 태워 달라 간청하기에 그러기로 했소.”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배에 선뜻 함께 태운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계영이 직접 자기 손님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면 까닭이 있을 터였다. 권중만이 그간 저질러 온 악행을 생각한다면 이 여인 역시 중만에게 갚을 빚이 있는 사람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으나 계영이 그렇게 확고하게 말하는 이상 아경은 굳이 그에게 반대하려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권중만을 잡아 나락으로 처넣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그 어떤 것도 아경에게 중요하지 않은 탓이었다. 선술집의 여주인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들어왔으나 누구도 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일욱이 입을 열었다.
“오늘 자정입니다. 항구 가장 끝 쪽이라 알려 두었고 근처의 다른 배들은 일제히 쉬기로 했으니 일부러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눈에 띌 일은 없을 겁니다. 나머지 동지들은 다른 배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장순명이 놈을 유인할 테고요.”
“한두 군데 상하게 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가급적이면 죽이는 일은 피해 주십시오.”
아경의 말에 계영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껄껄대며 웃었다.
“물론이오. 신신당부를 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요. 개인적으로는 몹시 아쉽기는 하군. 기회만 준다면 놈을 아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오.”
“그런 기회가 또 아니 오겠습니까?”
아경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뱉자 계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혹여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바뀐다면 그럴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요.”
아경은 계영의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이 바뀐다면, 아경은 입 안으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뇌어 보았다. 세상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가 그랬듯이. 만일 그때 죽을 각오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지금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경은 맨몸에 피가 나도록 옻나무를 문지르던 어린 자신을 떠올렸다. 온 몸에 옻이 오른 것을 역병 환자로 속이고, 진물이 줄줄 흐르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한밤중 산길을 죽도록 달려 도망치던 그 밤의 일을 아경은 결코 잊지 않았다.
남의 집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금점판에 새참을 나르며 악착같이 이를 악물던 시절, 아경은 죽어도 다시 권중만의 집에서 살았던 삶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만일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준학을 만나지 못하고 의사가 되지 못했더라도 지금의 자신은 절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날은 올 겁니다.”
아경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계영은 미소를 지었다.
“김 선생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달리 별 수 없겠군.”
그때 두 남자가 선술집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모자를 눌러 쓰고는 있었으나 아경은 먼저 들어온 남자가 준학임을 곧 알아보았다. 준학의 뒤로는 수척해진 얼굴의 순명이 서 있었다. 준학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목례를 건네며 아경의 곁에 앉았다. 순명 역시 주저하며 비어 있던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본 아경은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좀 펴야 할 것 같군.”
아경이 던진 말에 순명이 아경의 눈치를 보았다. 아경은 팔짱을 끼며 그를 마주보았다.
“권중만은 눈치가 빠르지. 당신이 조금만 이상한 기색을 보여도 대번에 도주할 거요. 만일 놈을 놓치면 어찌 될지는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텐데.”
“……아,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순명이 잔뜩 주눅이 든 투로 대답했다.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마주보던 아경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라 순명 앞으로 밀어 놓았다. 아경을 흘끔거리던 순명이 단숨에 잔에 담긴 술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병으로 손을 가져갔으나, 아경은 바로 그 손을 제지했다.
“취하면 판단력이 흐려지지. 취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긴장을 풀라고 한 잔 준 거요.”
“알, 알겠습니다.”
“사촌동생도 속인 자가 생판 남을 속이지 못할 까닭도 없을 텐데, 아니 그렇소?”
내뱉은 말에 순명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경은 냉소하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미끼라 한들 비열한 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자청하는 취미는 없었다. 준학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모두 마쳤으니 이제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만 기다리면 될 것 같군요. 김 선생은 나와 잠시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지 않겠습니까?”
아경은 잠시 멈칫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선술집 밖으로 나간 준학이 이미 어두워진 항구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경은 걸음을 빨리 해서 준학과 나란히 걸었다. 소금기 가득한 습한 바람이 맞은편에서부터 불어들었다.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준학이 문득 발을 멈췄다.
“……일이 끝나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아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준학은 앞을 보고 선 채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렸다. 아경은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 일이 끝나면 어찌할지 알고 싶은 겁니다.”
권중만에 대한 자신의 복수심을 아는 것은 준학뿐이었다. 이 복수의 종착점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경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물음을 문득 떠올렸다. 오로지 언젠가는 권중만에게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는데,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 뒤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일지 아경은 때때로 궁금해지곤 했다. 모든 것이 허무해져 버릴까, 혹은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게 될까. 겪어 보지 않은 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아경 역시 자신이 어느 쪽일지 장담하지 못했다. 대답 없는 아경을 내려다보던 준학이 짧게 웃었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아경은 그에게 물었다. 언젠가 준학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모두 그만두고 평범한 삶을 살아 줄 수는 없겠느냐고. 그러나 준학은 그 말에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요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경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준학은 이미 몇 년이나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던 터였다. 만일 자신이 그렇게 해 달라고만 말한다면 준학은 십 년도, 이십 년도 계속해서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아경은 준학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이 복수가 끝나기 전에는, 아경은 어떤 다른 삶도 생각할 수 없었다.
“좋아요. 지금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권중만을 나락으로 처박기 직전의 이 순간이야말로 그런 생각을 하기에 좋은 때일지도 몰랐다. 아경의 대답에 준학이 잠깐 놀란 듯한 얼굴을 하더니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아니 된다 할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경이 즉각 되묻자 준학이 모자 아래로 드러난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경은 그의 귓바퀴 끝이 빨갛게 달아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드물게도 소년 같은 태도여서 아경은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준학이 시선을 내렸다.
“정 선생의 삶에는 더 중요한 일이 많으니까요.”
“장준학 씨보다 말입니까?”
“아마도…….”
준학이 말끝을 흐렸다. 아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 일입니다.”
아경의 말에 준학은 알고 있었다는 듯 손짓으로 아경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아경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끝난다면 다른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정 선생.”
“당신과 나의 관계 같은 것 말입니다.”
대답한 아경은 등을 돌렸다. 준학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자인 삶이 때로 버겁다고 생각하면서도, 준학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짐을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때는 다를지도 몰랐다. 그때 선술집 밖으로 나온 일욱이 시계를 보더니 멀찍이 떨어진 두 사람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슬슬 이동해야겠습니다!”
아경은 먼저 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돌려 슬쩍 준학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던 준학이 눈을 들었다가 아경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멋쩍게 웃는 표정을 했다. 이 남자는 왜 하필 자신의 곁에 있기를 택했던 것일까. 아경은 가끔 그런 것이 궁금해지곤 했다.
처음 아경이 준학에게 과거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은 것은 그가 자신의 삶에 더 이상 끼어들지를 원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준학은 기꺼이 아경의 삶을 지지하기를 원했다. 아경은 한 번도 그에게 그 까닭을 물은 적 없었으나, 그것은 준학이 자신의 안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아경은 모자를 조금 더 눌러 쓰며 챙이 드리우는 그늘 아래서 보이지 않게 웃고는 곧 그 표정을 지워 버렸다. 선술집 앞에 모인 이들 사이에 합류하자, 계영이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장 선생과 장순명은 함께 이동하도록 하시오. 우리는 이대남 선장과 함께 항구에서 기다리지요. 무엇보다 몸조심이 먼저요. 권중만은 교활한 자니 긴장을 늦추지 마시오.”
“오 선생님도 조심하십시오.”
준학의 말에 계영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찬 권총을 보여 주었다. 한겨울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권총 한 자루로 일본군을 사살하고 다녔다는 백발백중의 명사수에게는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했다. 준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명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떴다.
“아무 일 없을 거요.”
준학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경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계영이 말했다. 아경은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공연히 머쓱해져 가벼운 헛기침을 뱉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대남이 이쪽입니다, 하고 골목 사이로 걷기 시작했다. 계영과 일욱이 그 뒤를 따랐고, 아경은 여인과 함께 몇 발자국 떨어져 천천히 걸었다.
아경은 그녀의 얼굴을 가린 숄이 약간 흘러내려 옆얼굴이 언뜻 비치는 것을 보았다. 사오십 정도 되었을까, 세월의 풍파가 남긴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젊었을 적에는 한 인물 했을 법한 여인이었다.
“김석란이라 합니다.”
아경은 그녀에게 일본어로 먼저 말을 걸었다. 여인이 잠시 멈칫하더니 조선말로 대답했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작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짧은 말이었으나 확실히 조선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에 끼워 달라 할 만한 여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통성명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하기야 자신도 권중만과 자신 사이의 과거를 준학 외의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었으니, 이 여인도 그런 것이리라 하는 짐작은 되었다.
십여 분을 걸어 항구에 도착한 아경은 대남이 안내하는 대로 대남의 배에 탔다. 작은 고기배 정도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세 개의 선실을 갖춘 그럴듯한 배였다. 미리 타고 있던 조공 당원 중 한 사람이 갑판으로 올라선 아경을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와서는 의사들이 쓰는 왕진 가방을 내밀었다.
“김 선생, 물건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경은 그가 내미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열어 본 아경은 자신이 부탁한 물품들이 모두 갖춰진 것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다시 닫았다. 아경은 고개를 돌려 바다로 시선을 주었다. 뭍과 바다의 경계가 거의 사라진 어둠은 고요했다. 간간히 들리는 파도 소리만이 거기가 바다임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대남이 곁에서 말했다.
“날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군요. 대마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도 문제는 없겠지요?”
“이만하면 헤엄을 쳐서라도 갔다 올 수 있지요.”
웃으며 대답하는 대남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까딱한 아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은 어느 새 소리 없이 뱃머리 근처에 서서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은 뒷모습은 어쩐지 아무런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미간을 좁힌 아경은 곁에 서 있던 일욱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여 저 분이 어찌 되지 않는지 잘 지켜보아 주십시오.”
일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곧이다. 그 오랜 악몽의 끝을, 이제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아경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손을 말아 쥐었다. 눈을 감자 의식의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소녀가 고개를 들어 아경을 마주보았다. 아경은 과거의 자신에게 단호하게 뇌었다.
나는 단 한 조각의 자비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놈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