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37
00034 특별한 의뢰인 =========================================================================
해경이 타고 있는 택시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해경은 시계를 보았다. 미타니의 방에서 교문까지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을 터였다. 어느 쪽으로 갔든지 겨우 한 발짝 앞서 있거나, 혹은 오히려 자신보다 더 느릴 가능성도 있었다. 해경은 배화여고보 앞에 택시가 도착하기 무섭게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손에 집히는 대로 지전을 꺼내 기사에게 쥐여 주고는 학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금남(禁男)의 구역인 여학교에 장신의 청년이 난입하자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여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해경을 쳐다보았다. 해경은 가장 가까이 있던 여학생 무리 중 하나를 붙들었다.
“마츠우라 하루미라는 여학생이 있습니까?”
숨을 몰아쉬며 묻는 해경의 얼굴에 여학생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해경은 다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마츠우라 하루미를 찾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 계십니까!”
운동장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해경은 자신의 주변에 서 있는 여학생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여학생들 중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통통한 뺨에 단발이 생기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해경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가슴에 달린 명찰의 이름을 확인했다. 마츠우라 하루미였다. 마츠우라가 조금 겁을 먹은 얼굴로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해경은 마츠우라에게 물었다.
“가와타 유사쿠와 미타니 하지메를 알지요?”
“네? 네…….”
“미타니 하지메가 여기 왔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마츠우라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건가. 해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경성제대에서 배화여고보까지는 십오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만약 자신보다 택시를 늦게 탔다면 미타니도 곧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해경은 마츠우라의 양 어깨를 붙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미타니가 곧 여기 당신을 찾으러 올 수도 있습니다. 미타니가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놀란 마츠우라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뇨, 아뇨, 전혀 그런 적은 없어요.”
“만약 미타니가 함께 가자고 하면 그럴 의향은 있었습니까?”
마츠우라는 해경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미타니와 저는 그냥 같은 서클에 있는 멤버일 뿐이에요. 미타니가 저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저는 가와타와 교제하고 있고, 또 고보를 졸업하면 곧 결혼하자고도 이야기해서……게다가 저는 가족이 모두 경성에 있어서 일본으로 갈 이유도 없어요.”
마츠우라의 단호한 태도에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미타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그제야 그 생각이 난 듯 마츠우라가 묻는 말에 해경은 교문 쪽을 가리켰다.
“제 생각이 맞다면 미타니는 곧 마츠우라 양에게 찾아올 겁니다. 제가 여기서 마츠우라 양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만약 미타니가 나타난다면 조금만 시간을 끌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지요?”
마츠우라가 경계하는 낯으로 해경에게 되물었다. 해경은 마츠우라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미타니가 가와타 유사쿠를 살해하고 도주한 용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네?”
마츠우라가 귀를 의심하며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으나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해경은 마츠우라를 교문 쪽으로 돌려세우며 몸을 숙여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타니를 잡으면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해경은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간이 창고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마츠우라가 황망한 표정으로 서서 해경이 있는 쪽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운동장의 소녀들이 갑자기 벌어진 일에 술렁대고 있을 즈음, 교문 바로 앞에 선 택시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깡마른 남자는 택시를 세워 놓은 채 교문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는 닥치는 대로 여학생들을 붙들고 물었다.
“하루미, 하루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미타니였다. 누군가가 마츠우라가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츠우라 쪽을 쳐다본 미타니가 정신없이 휘청대며 마츠우라에게 달려왔다. 아직도 해경의 말에 충격이 가시지 않아 멍하니 서 있는 마츠우라의 손목을 붙든 미타니가 횡설수설하며 마츠우라를 끌었다.
“하루미, 하루미, 지금 가야 해. 어서. 지금 빨리 나와 부산항으로 가자.”
“무, 무슨 일이야? 싫어, 난 안 갈 거야.”
마츠우라가 떨면서 미타니를 밀쳐냈다. 그러나 미타니는 저항하는 마츠우라를 포기하지 않고 팔을 더 단단히 잡아 교문 쪽으로 끌었다. 미타니가 아무리 말랐다 해도 젊은 남자다 보니 마츠우라는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소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츠우라의 뒤를 따라갔으나 누구 하나 섣불리 미타니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미타니는 교문 앞에 세워 둔 택시에 비명을 지르는 마츠우라를 밀어 넣고 자신도 그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창고 뒤쪽에서 튀어나와 전력으로 미타니가 탄 택시로 질주한 해경은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택시의 문을 붙들었다. 창을 세게 두드리자 해경의 얼굴을 보고 놀란 미타니가 새하얗게 질린 채 기절할 듯 손을 떨며 기사를 재촉했다. 해경은 바로 뒤에 다른 택시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문을 놓고 뒤에서 오는 택시를 잡아 조수석에 올라탔다.
“무조건 앞차를 따라갑니다.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기사에게 외친 해경은 미타니가 탄 택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차피 미타니가 갈 곳이라고 해 봐야 경성역이었다. 경성역에도 지금쯤 경찰들이 대기중일 것이었다. 해경의 생각대로 미타니가 탄 택시는 경성역을 향해 질주했다. 해경은 집요하게 미타니의 뒤를 쫓다 미타니가 경성역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 마츠우라를 끌어내는 것을 보자마자 차가 멈추기도 전 문을 열고 뛰어내려 미타니에게 달려들었다. 해경이 육탄전으로 부딪쳐 오자 미타니가 억,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경성역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들 이쪽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미타니는 체급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바닥에서 잠시 엎치락뒤치락하던 해경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뒤에서 미타니의 목을 조르듯 팔로 감쌌다. 미타니가 숨을 들이키며 해경의 팔을 떼어내려 기를 썼으나 어림도 없었다. 해경은 호흡을 고르며 미타니에게 내뱉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목이 부러질 거야.”
미타니가 그 말에 버둥거리던 것을 멈췄다.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렸다. 경찰들인 모양이었다. 해경은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 자는 살인 용의자입니다!”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경찰들이 달려왔다. 해경은 축 늘어진 미타니를 경찰들에게 떠넘겼다. 경찰들이 미타니의 양 팔을 잡자 미타니가 잡힌 팔을 뿌리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더러워진 옷을 털어낸 해경은 길가로 걸어가 아직 택시 안에 있는 마츠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벌벌 떨던 마츠우라가 해경의 손을 잡고 택시에서 간신히 내렸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비틀대던 마츠우라는 경찰에게 붙들린 미타니를 보더니 멈칫멈칫 미타니에게 다가갔다. 해경은 마츠우라에게 경고했다.
“마츠우라 양, 너무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마츠우라가 미타니와 서너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마츠우라는 납처럼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경찰에게 붙들려 숨을 헐떡이는 미타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츠우라가 떨리는 시선으로 해경을 보며 물었다.
“……미타니가, 미타니가 누구를 죽였다고요?”
“거짓말이야! 하루미, 설마 조선놈 따위의 말을 믿는 거냐!”
미타니가 발악하듯 외쳤다. 해경은 팔짱을 낀 채 내뱉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넌 가와타 유사쿠를 살해했고, 이환 공에게 살인 혐의를 덮어씌우려 했으며, 백주대낮에 여학교에 침입해 무단으로 여학생을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더 할 말이 있나?”
해경의 입에서 똑똑히 나온 가와타의 이름에 마츠우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가 미타니에게 달려들어 뺨을 후려쳤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해경조차 마츠우라를 말리지 못했다. 마츠우라는 미타니를 붙들며 비명처럼 외쳤다.
“유사쿠를 죽였다고? 유사쿠를? 네가?”
“죽인 게 아니야! 실수였어! 실수였다고!”
미타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마츠우라가 미타니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미타니는 방금 본인이 실언을 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멀어지는 마츠우라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야, 아니야, 하루미, 제발 날 그렇게 보지 마……일부러 죽이려던 게 아니야. 가와타가 못된 놈인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가와타를 위해서 여기저기 돈까지 빌리고 다녔으니까, 나는 그게 싫어서……그냥 얘기를 좀 하려던 것뿐이야, 가와타가 멋대로 미끄러져서 머리를 부딪쳐 죽은 거라고. 하루미,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정말이야.”
“드, 듣기 싫어, 듣기 싫어!”
마츠우라가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경은 뒤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마츠우라를 부축했다. 미타니가 그런 마츠우라를 보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가와타만 없으면 나와 사귈 수도 있다고……이제 가와타가 없으니까, 나와 같이 있어도 돼. 그래도 돼, 하루미. 그래도 된다고. 같이 일본으로 가자. 너를 위해 표를 두 장 사 두었어. 너도 우리 집을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동경의 집은 아주 근사하거든. 하루미, 제발 내 말 들어 줘…….”
귀를 막으며 고개를 흔들고 있는 마츠우라를 본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던 차에 미타니를 처넣고는 문을 닫았다. 마츠우라는 미타니를 싣고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해경은 허공을 향해 긴 숨을 내뱉고는 마츠우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때 해경의 앞에 검은 자동차가 섰다. 조수석 문을 열고 누군가가 급하게 내렸다. 천욱이었다. 천욱은 마츠우라를 부축하고 있는 해경을 보고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해경 씨, 어떻게 된 겁니까?”
해경은 대답 대신 울고 있는 마츠우라를 가리켰다.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 이 아가씨를 먼저 댁에 데려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며칠 만에 돌아오는 사가였다. 잠자리가 바뀌었던 탓에 몸이 찌뿌둥해 기지개를 한 번 길게 켠 환은 소파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며칠 사이의 일이 마치 긴 소설을 한 편 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얌전하고 조용하던 미타니가 여자와 돈에 얽힌 일로 가와타를 죽였다는 건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타니는 처음에는 가와타의 죽음이 사고라고 부정했지만, 미타니의 방 시계만 일부러 조작해 나카마루에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도록 유도했다는 해경의 말에 결국 모든 것을 시인했다고 했다. 가와타와 교제 중이던 마츠우라가 미타니의 고백에 ‘가와타가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받아줄 수 없다’고 한 말을 망상으로 해석해, 가와타만 없다면 마츠우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때문에 마츠우라가 가와타의 빚을 갚아 주기 위해 자신에게 돈을 빌린 일을 따지러 가며 가와타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해 방의 시계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간단한 속임수였지만 만약 밝혀내지 못했다면 자신이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렸을 판이었다.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환에게 집사가 다가왔다.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요.”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해경과 소화였다. 소화는 서양식 집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다 해경의 등에 부딪쳐 아야, 하며 이마를 감쌌다. 환은 그런 소화의 모습을 보고는 푹 웃었다. 얼굴이 빨개진 소화가 부딪친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르고는 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환이 앉으라는 손짓을 하자 소화가 머뭇거리다 해경이 가리킨 쪽에 앉았다. 하녀들이 곧 차와 다식을 내어 왔다. 환은 맞은편에 앉은 해경을 보았다.
“일주일 안에 해결해 주겠다 몹시 자신만만했다고 하던데, 그럴 만도 하군요.”
환의 말에 해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화 양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해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선생님께서 하신 일인걸요.”
자기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란 소화가 손을 내저었다. 환은 품 안에서 두 개의 봉투를 꺼내 하나는 해경의 앞에, 다른 하나는 소화의 앞에 놓아 주었다. 소화가 얼떨떨한 얼굴로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저어, 이건 무엇인가요?”
“그건 박소화 양의 몫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께 받는 걸로 충분합니다. 이건 다시…….”
소화가 봉투를 도로 환에게 돌려주려 하자, 해경이 손을 들어 막으며 소화에게 말했다.
“넣어 두십시오. 일부러 주시는 것인데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이 웃으며 해경의 말에 덧붙였다.
“물론 정 선생이 돈을 부족하게 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팔청춘이면 한창 멋을 부릴 나이인데, 아가씨가 너무 수수하게 다니는 것도 내 눈에는 좋아 보이지 않아 드리는 겁니다. 나름대로 생각해 드리는 것이니, 넣어 두고 옷이든 화장품이든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사도록 해요.”
소화가 눈치를 보았다. 환은 소파에 등을 묻은 채 그런 소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화가 요즘 아가씨답지 않게 구식으로 댕기를 늘어뜨리고 치마저고리 차림을 한 채 화장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좀 안쓰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다소 신선한 경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의 여인들은 모두 황실 사람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가문의 딸들이라, 어릴 적부터 여자들은 모두 곱게 치장을 하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줄 알고 살았던 환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도 주변에는 그런 여인들이 없었기에 자신과는 먼 이야기 같았는데, 가까이서 소화가 하는 것을 보니 놀랍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소화는 한참을 망설이다 해경이 어서 넣어 두라고 재촉하자 그 봉투를 소중하게 챙겨 넣고는 몇 번이고 환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환은 해경의 앞에 놓인 봉투를 눈으로 가리켰다.
“금액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혹 서운하시다면 말씀하시지요.”
해경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 보고는 잠시 멈칫하다 환을 마주보았다.
“지나치게 많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황실이지만, 그래도 명예를 지켜 준 값으로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정도는 넣어 두셔도 좋습니다.”
환의 대답에 해경이 잠시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봉투에 든 돈을 절반 빼어 환의 앞에 다시 밀어 놓았다. 환이 눈썹을 약간 좁히자, 해경이 환의 시선을 맞받으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금액을 쉽게 운용하시는 것은 역시 마음에 걸립니다. 제가 사사로운 곳에 쓰기 쉬운 돈은 아닌 듯합니다. 이 돈은 공께서 가장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 병원에 예치금으로 넣어 주시고, 돈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써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공께도 그 편이 훨씬 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더할 나위 없이 예의바르고 심지어 선의가 넘쳐나는 말이었으나, 그 안에는 미묘하게 뼈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이 정도 돈을 쉽게 운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 뒤에는 조선 황실이 어떤 방식으로 이런 부를 쌓아 왔는지에 대한 비난이 숨어 있었다. 지나칠 만큼 잘 드는 칼 같은 남자다. 환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 해경과 소화를 번갈아 보았다.
“두 분 다 무척 내 흥미를 끄는 유형의 사람이오.”
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궁 안에는 대나무도 들꽃도 심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요.”
소화는 환의 말에 담긴 뜻을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해경은 명백히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미묘하게 단정한 입매를 비틀어 웃는 듯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해경이 입을 열었다.
“대나무는 뜻밖에 어디에 심어도 뿌리를 잘 내리고 매우 빨리 번지는 나무입니다.”
“그거 좋군요.”
“그러나 운현궁 안에는 진기한 꽃이 많지 않습니까?”
얼굴은 분명 미소 짓고 있었으나 말은 단호했다. 환은 그런 해경을 마주보다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해경이 마음만 먹는다면 소화처럼 어린 소녀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도리어 그 때문인지 해경이 소화에게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해경은 동시에 자신 역시 소화에게 선을 긋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환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소화를 누이처럼 여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환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났다. 해경이 환을 빤히 마주보았다.
“그러니 굳이 들꽃을 꺾어 궁의 담장 안에 심으려 하지 마십시오.”
환은 그 말에 대답 대신 웃었다. 역시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꽃을 꺾어 궁의 담장 안에 심으려 하지 말라니, 그보다 더 직접적인 경고는 아마 없을 터였다. 해경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너무 오래 비워둘 수는 없어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기꺼이 달려오겠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깍듯한 말투로 거리를 두는 어법은 매우 깔끔한 것이었다. 환은 해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경이 그 손을 한 번 맞잡았다 놓았다. 서늘한 손이었다. 환은 해경을 따라 일어난 소화에게 웃으며 말했다.
“신식 양장도 잘 어울릴 듯한데, 그 돈으로 꼭 한 벌 맞춰 입도록 해요.”
소화가 놀란 표정을 하다 곧 네, 하며 얼결에 대답했다. 해경이 소화를 먼저 앞세우고는 환에게 인사를 건네며 현관 밖으로 나갔다. 환은 거실에 선 채 창으로 두 사람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서 있다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는 통에 탁자를 치우러 온 하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의아한 표정을 했으나 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을 웃던 환이 돌아서자 탁자 위에 해경이 놓고 간 돈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환은 언젠가 좀 놀려 주고 싶은 사람이야,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거실의 커튼을 잡아당겨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