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소녀납치범 (3)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일레나가 카이루스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내가 다 처리할 수 있었잖아.”
“그럼 끝냈어야지.”
이 일대의 바람은 이미 일레나의 통제하에 있었다. 적들이 그 과정을 방해하기에 어려웠던 거다.
적들은 제풍의 영역 안에서 일레나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레나는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고, 오히려 스스로 이 공간의 통제를 놓으려 했다.
“재미있었냐?”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움찔했다.
“그냥 연습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한동안 잊고 있었던 걸 찾았거든. 그냥… 녹을 털어낼 시간이 필요했었다고.”
“염병하고 자빠졌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카이루스가 차갑게 대답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일단 포도주 저장고로 진입해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실수한 건 맞는 것 같다.”
먼저 사과를 받자, 일레나가 대답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방금 전 교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
카이루스도 실수했다. 실수한 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내가 누구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다 보니 가장 중요한 걸 놓쳐버렸어.”
그가 일레나에게 배틀기어 사용법과 제풍을 알려준 이유는 분명 방금 전 일레나가 보여준 재능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카이루스는 가르치는 과정에서 그 재능을 일깨워주는 데 실패했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몇 시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던데.”
“그렇지? 나 강해졌지?”
갑작스러운 막말을 듣고 침묵하고 있던 일레나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조된다.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단장님과 통화를 했거든. 근데….”
일레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이, 카이루스는 포도주 통을 뜯어내 안에 들어있는 배틀기어들을 체크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다나 왓슨. 이 망할.’
카이루스가 놓치고 있던 걸 제대로 짚은 건 사실이다. 잠깐의 통화만으로 다나 왓슨은 카이루스가 놓치고 있던 점을 지적하고, 그녀를 한 층 더 높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뜯어고칠 거면 다 뜯어고쳐야 할 거 아니야.”
“응? 뭐라고?”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말을 무시하고 얼굴을 구겼다.
실력만 놓고 보면, 일레나는 확실히 강해졌다. 3급 수훈기사 정도는 이제 너덧 명을 상대해도 가볍게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일레나가 강해지는 건 카이루스도 환영할 일이다. 일레나가 자동차라면, 다나 왓슨은 일레나의 엔진을 갈아준 셈이다.
“일레나, 너 그러다 뒈져.”
문제는 이 씨발놈… 아니, 씨발년의 엔지니어가 브레이크는 교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딴 녀석들한테?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레나는 지금 자신만만한 상태다. 아니, 자신만만 정도라면 그냥 귀여운 정도다.
자신만만이 아니라 오만방자의 영역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콧대를 꺾어 놓는 건데.’
카이루스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 일레나가 적엽기사단장의 조언을 받아 큰 성취를 얻었다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쉬운 방법은 보통 최고의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 한창 자신감이 차 있는 일레나의 기를 눌러버리면 그녀에게 덮쳐올 감정은 강렬한 허탈함과 무력감이다.
빚을 다 갚았는데 알고 보니 숨겨진 빚이 더 있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 신세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일단 물건 찾는 데 집중하자.”
여기에 온 이유는 섭운 해례본이다. 얻고 나면 바로 빠질 예정이고, 이 창고에 있는 배틀기어의 처분은 카이루스의 역할이 아니다.
“어떻게 생긴 건지 말이라도 좀 해주는 게 어때?”
카이루스는 숙성고의 문이 잠겨있는 것을 확인하고 문짝에 명멸을 박아넣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냐. 실물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카이루스는 섭운을 배울 예정이었지, 섭운을 배우기 시작했던 건 아니다. 섭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책의 실물을 접해 본 적은 없다.
‘가문의 문양 같은 걸 찾아봐야겠지.’
카이루스는 숙성고 안의 오크통을 하나하나 다 뜯어내서 내용물을 체크해나갔다. 거침없이 뚜껑을 뜯어내고 내용물을 살피는 카이루스의 움직임은 빨랐다.
“느껴지냐?”
“뭐가, 술 냄새? 포도주 숙성고니까 어쩔 수 없잖아.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대답을 듣고 작게 혀를 찼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냄새 말고, 흐름.”
공기가 흐르고 있다. 숙성고 정도 되는 사이즈의 공간이라면, 카이루스가 바람의 흐름을 잡아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잠깐만.”
눈을 감고 있던 일레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찾은 것 같아.”
땅 아래로 흐르는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카이루스는 곧바로 주변을 살핀 다음, 의심 가는 장소를 확인했다.
“여긴데.”
바닥재를 뜯어내자, 그 너머에 숨겨져 있던 육중한 철제 바닥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놓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문짝이다.
원래는 뭔가 열쇠 같은 걸 이용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잠금장치는 카이루스 앞에서는 열린 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멸을 이용해 문을 따고 들어간 카이루스는 내부를 보고 작게 감탄했다.
“욕심도 많지.”
챙겨놓은 물건의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어차피 카이루스의 관심사는 갈리아 주교가 여기에 모아놓은 골동품들이 아니다.
“넌 이거 살펴보고, 대충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좀 챙겨.”
“왜?”
“멜빈에게 좋은 가격을 받고 팔아넘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봄달래에게 주기로 한 돈을 시미드 캘로그가 만든 계좌에서 뽑아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물건을 챙긴다.
“찾았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작은 함 안에 들어있는 책을 찾아냈다. 섭운 해례본이다.
“….”
단단한 소가죽 표지에 금색으로 페더윙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열린 새장과 밖으로 날아가려 하는 새. 가만히 표지의 장식을 바라보던 카이루스는 엄지로 그 문양을 한 번 쓰다듬고는 책을 펼쳤다.
‘내용이 중요해.’
해례본은 원본의 내용 전체를 담아두지 않는다. 일부 부분을 발췌해 기록한 다음, 저자가 각주를 달아두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어떤 내용을 다루는 해례본인지는 보통 서장에 적어둔다.
[본 서책에서는 섭운을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분했을 때 중장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이를 통해 중장 전반에 걸친 큰 흐름에 대해 논한다.]카이루스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다행이다. 가장 좋은 건 섭운 해례본 초장에 대한 내용이겠지만….
중장 중에서도 전반부를 다루는 내용이라는 것도 다행이다.
만약 중장의 중후반부나, 종장의 내용에 대해 기술한 해례본이었으면?
그런 내용을 다루는 해례본은 ‘이거 다 알지?’라는 식으로 슥슥 넘어가버리는 내용이 너무 많아진다.
“최소한 허리니까.”
중반부라면 초장의 내용에 대해서도 몇 번 언급해 줄 것이고, 중장에서 이어지는 종장에 대한 힌트도 몇 개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확실한 건 초장이었겠지만, 일단 카이루스로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익혀보자고.’
단 한 권이고, 섭운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당장 카이루스가 가지고 있는 선택지는 이것 말고 없었다.
“일레나, 적당히 챙겨. 너무 많이 챙기면 추격당할지도 모른다.”
“덤비라고 해. 다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잖아.”
혼자의 감상에 빠져있던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듣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카이루스가 섭운을 익히는 건 그가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일레나의 자아도취 상태는 그가 고쳐주려 해도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죽겠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사람의 말로는 기차와도 같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비참한 결말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나가니까.
“나 하나도 상대하지 못하면서 큰소리는.”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아하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이 되면 달라지지 않겠어? 언제까지 아래에 있을 수는 없잖아. 단장님도 따라잡을 거야.”
우선적인 목표를 카이루스로 잡는 건 상관없다. 원래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법이니까. 다나 왓슨을 이겨먹겠다는 소리 또한 그런 점에서 나쁜 생각이 아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도시로 돌아가고 나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원래 목표로 했던 섭운 해례본과 멜빈에게 줄 물건까지 전부 챙겼다. 이제 카이루스와 일레나가 이 포도주 숙성고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다. 카이루스와 일레나는 그 길로 노라와 합류하기로 한 장소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나저나, 결국 그 갈리아 주교라는 사람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네.”
“주교의 목을 따라는 의뢰는 아니었으니까. 이게 좋은 거야.”
가지고 있는 물건을 훔치는 도둑 입장에서는, 집주인과 부딪칠 일이 없는 게 최고다. 즉, 갈리아 주교와 마주치지 않고 일을 끝낸 지금의 결과에 카이루스는 만족했다. 일을 잘 처리했다는 뜻이니까.
“합류하기로 한 곳은 교외 지역의 방치된 목장이었지?”
지금 상황에서 다시 골디바의 호텔로 돌아가는 건 미친짓이다. 그 도시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당연히 노라와 합류하기로 한 장소 또한 골디바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 목장이었다.
키우는 가축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서 전부 폐사하자, 목장 주인도 따라 죽은 이후 오랜 기간 방치되었던 곳이다.
“동물들이 전염병으로 뒈졌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말이야.”
어쨌든 전염병이 돌았던 장소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꺼려하는 장소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가면 뭐가 있는데?”
“자동차와 운전수.”
모두 봄달래가 안배해 둔 일이다. 운전수는 우리를 인근 도시로 옮겨줄 예정이다. 이후, 해당 도시에 있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베넷 시로 돌아가면 된다.
“배를 타고 이동하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래도 이 편이 제일 안전해.”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통해 이동하고, 어디에서 몇 시에 출발해 몇 시에 다른 곳에 도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배는 아니다. 비록 기차에 비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지만, 기차보다 훨씬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다. 괜히 밀입국이나 밀수에 배편을 활용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제법 걸리는 건 내 입장에서도 최고지.’
어차피 이번에 확보한 섭운 해례본을 찬찬히 살펴볼 시간이 필요했는데, 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그 틈이 되어 줄 수 있다.
“아 왔네! 뭐 좀 얻었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노라가 카이루스와 일레나를 확인하고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래, 만족스러운 결과였지.”
카이루스는 마주 인사한 다음, 봄달래가 준비해두었던 자동차를 타고 항구가 있는 도시로 향했다.
도착하면 배를 타고 안타리아 운하를 통해 베넷 시로 돌아갈 계획이다. 도합 2주 정도의 시간이 보장되어있다.
이 틈을 이용해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정신머리를 약간 뜯어고치고, 섭운을 익혀 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