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의뢰인 변경 (2)
카이루스는 봄달래에게 전화를 걸고 상황을 설명했다. 봄달래가 자세한 내용을 알 필요는 없다. 장미정원에서 요청한 의뢰는 끝냈고, 캘로그 저택에서 추가 의뢰를 받게 되었다는 것 정도만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봄달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아니, 집 털다가 뭔 일이 났기에 피해자가 의뢰인이 된 거냐?
카이루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는 봄달래로서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상황이다. 집 털러간 새끼가 집주인한테 도리어 의뢰를 받는다고? 도대체 무슨 기이한 일이 일어나야 이딴 사태에 개연성이 생길 수 있을까.
― 그리고, 레잔틴 황립박물관을 터는 게 좆으로 보이냐?
“좆으로 보였다면 내가 전화를 해서 의견을 물어봤을까.”
아이란 공화국 기사단이 공유하는 초대형 치장창고에 들어가서 물건을 털어먹어야 하는 계획이다.
이걸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은 장수할 자격이 없다.
카이루스도 어디까지나 가능성 여부를 확인해보고 싶은 것뿐이다.
― 당연히 불가능이지. 레잔틴 국립박물관의 소재지인 레잔틴 시는 항상 제국 기사단장 중 한 명이 교대로 주둔하고 있어.
무지막지한 초인들이 일정 주기를 기준으로 교대해가며 항상 레잔틴 시를 지킨다는 뜻이다.
― 걸리는 순간, 넌 죽는다.
실패하면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실패가 아니라, 들키는 즉시 카이루스는 살아서 레잔틴 시를 나가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아니, 도시 탈출도 망상이다. 박물관도 벗어나지 못한다.
제국과 공화국.
양국의 기사단장은 노력과 준비 같은 걸로 감당할 수 있는 위협이 아니다.
― 기사단장은 인격이 있는 자연재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봄달래의 말에 카이루스도 공감한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이 아니게 된 존재들이다.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으면 자리를 비워두고 단장 대리가 업무를 대행한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물론 제아무리 페더윙이라고 해도 기사단장을 매번 몇 명이고 배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카이루스는 페더윙 내에서도 모두가 인정할 정도의 재능을 보였다.
별다른 일 없이 충실히 가문의 검술을 익혔으면 언젠가는 기사단장과 정면에서 붙어볼 만한 실력의 소유자가 되었을 거다.
“기사단장 한 명이라. 그것 이외에 또 주의해야 할 점은 뭐가 있는지 궁금한데.”
― 뭐야, 레잔틴 시에서 자살할 생각이라면 기사단장에게 죽는 편이 가장 확실한데.
봄달래는 그렇게 대꾸한 다음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 레잔틴 박물관 수장고의 자세한 보안시설은 극비라서 접근할 수 없어. 알려진 거라고는 지하 350m 정도 아래에 위치해 있다는 것 정도지.
그 정도면 정말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국경지대에서 발생하는 애매모호한 국지전 따위로는 레잔틴 박물과의 수장품이 동원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 두 국가의 전력을 생각해보면 전면전이 발생하는 순간 양국 모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즉.
― 수장품이 박물관 밖으로 나올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야.
“꺼내지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 들어가야 하는군.”
물건이 꺼내질 일이 없다면 들어가서 꺼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수장품들이 보관되고 있는 장소는 기사단장 중 하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키는 곳이다.
“빡세네. 아무리 이득이 있어도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봄달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카이루스는 결국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레잔틴 시를 지키고 있는 기사단장이 문제다.
* * *
봄달래와 카이루스가 대화를 나눈 다음 며칠이 지났다. 캘로그 저택에서 열린 겨우나기 파티는 갑작스러운 가주 암습 사건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세실리아는 카이루스로부터 전달받은 서류를 훑고 있었다.
“이게 확실해?”
“그렇습니다. 그 녀석이 보낸 것이 맞다는 건 이미 확인이 끝났습니다.”
부하의 대답을 들은 세실리아가 서류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항상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걸까.”
타오르는 촛불 위에, 세실리아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가 올려졌다. 촛불의 화염이 서류에 옮겨붙었다.
손에 쥔 서류가 타오르는 걸 보던 세실리아가 부하를 향해 밝게 웃었다.
“이 친구가 나를 만만하게 봤나봐. 이걸 어쩌면 좋지?”
부하는 세실리아의 말에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누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남자, 나를 속이려 들었어. 안 들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타오르는 종이를 휙 하고 바닥에 던진 세실리아는, 화염에 휩싸여 재로 변해가는 서류를 탁한 붉은 눈으로 바라본다.
“대표님, 지시를 내리면 행동하겠습니다.”
부하의 말을 들은 세실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나 일을 잘 해줬으니, 나도 상응하는 보수를 줘야겠네.”
세실리아의 말에 순간 부하가 움찔했다. 가짜 서류를 보냈는데 보수를 준다니.
장미정원의 대표는 장미정원 소속이 아닌 자들의 실패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여태 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섭운 해례본은 레잔틴 국립박물관에 있다고 전해둬.”
거짓말이다. 해당 박물관에는 섭운 해례본이 없다.
카이루스가 세실리아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했으니,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보수로 약속한 정보를 거짓으로 알려준다.
“시미드 캘로그의 의뢰에 더해, 찾고 있는 책까지 그 박물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움직이겠지.”
세실리아는 이미 카이루스가 시미드 캘로그로부터 의뢰를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카이루스가 들키고 싶지 않았다면, 베넷 시로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 세실리아는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녀석이 레잔틴에 도착하면, 레잔틴 시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장에게 정보를 흘려.”
굳이 장미정원에서 사람을 보내 수를 쓸 이유가 없다. 카이루스는 레잔틴 시에서 죽을 테니까.
“지금 주둔 중인 기사단장이 누구야?”
“현재는 터커슨 메일로드입니다. 하지만 며칠 뒤 다나 왓슨과 교대할 예정입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던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 그 여자가죽 뒤집어쓴 짐승이 이번 순번이구나.”
“그 미친 여자가 날뛰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다 돋습니다.”
장미정원은 다나 왓슨이 분노해서 날뛰는 걸 봤다. 그녀가 날뛰는 걸 본 사람들 중에 생존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분노가 향한 대상들이 살아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표님 덕분에 살았지요.”
장미정원이 그 거의 없는 사례 중 하나다.
“맞아. 그랬었지.”
세실리아가 아니었으면 다나 왓슨이 장미정원의 조직원들은 전부 밟힌 토마토 꼴로 죽어나갔을 거다.
그녀는 다나 왓슨과 격돌해봐서 안다. 카이루스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다. 장미정원에서도 바로 간부로 채용하고 싶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는 다나 왓슨을 상대로 절대 생존하지 못한다. 일 합에 끝난다.
“그러고 보니 캘로그 가문의 외동딸이 적엽기사단 견습이라고 했나?”
세실리아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부하에게 질문했다.
“그렇습니다. 일레나 캘로그입니다. 적엽기사단 견습기사이고, 이번에 귀향하는 길에 카이루스가 먼저 접촉해서 친해졌습니다.”
“기구한 집안이네. 후계자는 발로른 보안국 요원에게 반하고, 외동딸은 베넷 시의 범죄자와 친해지다니.”
그런 것도 핏줄 내력이 있는 걸까. 세실리아는 잠깐 빙글거리며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금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다나 왓슨은 제정신이 아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원칙은 있어.”
전우를 아끼고 부하를 보살핀다. 기사단장이라는 자리에 있기 위한 최소한의 개념까지 포기한 사람은 아니다.
“혹시라도 일레나 캘로그가 카이루스와 함께 레잔틴으로 향하면 곤란해지니. 일레나 캘로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할 준비를 해.”
“그럴 일은 없습니다. 지금 저택 정원에 가설한 건축물에서 수련에 들어갔는데, 확인된 바로는 한 달 정도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실리아가 그래? 라고 말한 다음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상황을 저울질한다.
위기관리라는 건 발생 가능한 모든 위협을 원천봉쇄 하는 게 아니다.
“보고서 가져와 줄래?
“네, 여기 있습니다.”
보고서를 읽으며 일레나 캘로그가 카이루스와 동행하는 일을 막는 데 필요한 비용을 산출한다. 그리고, 일레나가 수련을 중단하고 카이루스와 동행 할 확률을 계산해본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련을 하는 건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무리 장미정원의 정보력이 뛰어나다 해도 베넷 시 내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건 다르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발생 가능성이 너무 낮아.’
일레나 캘로그가 수련을 중단하고 카이루스와 동행해 레잔틴으로 향할 확률은, 세실리아의 판단으로는 너무 낮다.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재량하며 쌓여있는 서류를 확인하던 세실리아가 결론을 내렸다.
“그 가능성은 배제하자.”
대비하는 게 오히려 적자가 된다. 만약 일이 세실리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 일레나 캘로그가 카이루스와 동행하게 된다면?
아무런 상관없다.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카이루스는 다시 베넷 시로 돌아오게 된다.
카이루스가 살아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장미정원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한 대가는 베넷 시에 돌아왔을 때 치르게 하면 된다.
변하는 건 딱 하나다. 처벌의 순간이 약간 늦어지게 된다.
“그 새끼는 장미정원의 지원을 받고도 일을 그르쳤어.”
장미정원에 소속되지도 않은 외부인이, 장미정원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자료를 장미정원으로 보냈다.
“그게 고의건, 고의가 아니건.”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식중독 환자 한 명이 유명한 식당을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별거 아닌 사건이 원인이 되어 거대한 조직이 박살 날 수도 있다.
“나는 외부인을 용서하지 않아. 합의라면 모를까.”
용서는 잘못을 넘어가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합의는 대가를 요구한다.
“…녀석이 합의금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부하의 질문에 세실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세? 말은 합의금이지만, 나는 돈으로 합의할 생각이 없는데.”
돈은 필요 없다. 카이루스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비해봤자 세실리아는 합의해 줄 생각이 없다.
카이루스가 살고 싶다면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뭔가를 합의금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이런 것들은 다 의미 없는 생각이긴 하다.
“전제가 다나 왓슨에게서 살아 도망치는 거잖아.”
세실리아의 말에 부하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네요. 그게 가능할 리가 없긴 합니다.”
다나 왓슨이 추격을 시작한다면, 저승사자는 휴가를 낼 거다.
자기가 따라다니지 않아도 어차피 뒈져서 지옥으로 올 테니까.
그리고….
“여기, 한 잔 더!”
적엽기사단장 다나 왓슨.
저 멀리 베넷 시에서 대화의 주제가 되고 있는 그녀는 레잔틴 시의 호프집에서 1.5L 들이의 맥주잔에 양주를 가득 채우는 중이었다.
일단 그녀를 마주한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것 같은 적발에 가장 먼저 눈이 사로잡힌다.
곧이어, 그녀가 입은 옷의 표면적이 너무 작아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게 된다.
사실상 속옷만 입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없을 정도로 노출이 심하다.
심지어 그 속옷을 닮은 옷조차도 입은 사람을 위한 배려보다는 구경꾼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데 목적이 있어 보인다.
“저기… 단장님. 하다못해 다리라도 좀 모으시는 게….”
“목소리 하고는, 거세당했냐? 크게 크게 말해.”
퍽, 하고 옆에서 충언을 한 기사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난 다음, 다나 왓슨은 커다란 맥주잔에 가득한 양주를 단번에 비우고 입가를 훔친다.
“그리고, 이건 봐달라고 이렇게 입는 거야.”
치장하지 않아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넋이 나갈 정도로 매력적인 동시에, 생명력과 활기가 온몸을 타고 약동하는 것 같다.
기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없는 매끄러운 몸이, 오히려 그녀의 강함을 증명한다.
무수한 전장을 해쳐나갔지만, 그 누구도 상처 입히지 못했다.
여자로서의 매력과 전사로서의 긍지가 이 한 몸에 모두 담겨있다.
그러니.
이토록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몸을 남들 앞에서 뽐내지 않으면 병신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시선이 뭐. 좋잖아?”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남자들. 가지지 못해 질투하는 여자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술안주 삼아 다나 왓슨은 다시 한 잔을 비웠다.
“아, 그리고. 일레나 캘로그가 장기재직휴가를 냈습니다.”
함께 자리한 기사의 말에 다나 왓슨이 대답했다.
“넌 꼭 사람이 술 먹는데 일 이야기를 하더라.”
“단장님은 전장이 아니면 항상 술을 드시고 계십니다.”
다나 왓슨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테라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거야.”
“…네?”
부하 기사는 갑자기 이 알콜중독 노출 기사단장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테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술과 음욕은 사람의 마음을 흐리는 큰 적이잖아.”
“그렇지요.”
“그리고 또한, 이테라는 너의 적을 사랑하라고 말했지.”
“….”
“내가 그래서… 술과 남자를 사랑하는 거지.”
자기가 한 말이 썩 마음에 드는 건지, 다나 왓슨이 웃음을 터뜨린 다음 육포를 한 조각 입에 던져넣으며 말했다.
“캬, 씨발거. 기사단이 아니라 수도원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분명 한 달 안에 파문당하셨을 겁니다.”
“새끼가. 단장한테 아주 못 하는 말이 없지? 응?”
입에 넣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다나 왓슨이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테이블 위의 서류를 훑는다.
일레나 캘로그는 캘로그 가문에서 주최하는 겨우나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2주의 휴가를 낸 상태였다. 그 와중에 다시금 장기재직휴가를 신청한 거다.
“배틀기어 사용법 개선 및 실력 향상을 위한 장기재직휴가라.”
일레나 캘로그의 휴가계획서를 보며 육포를 우물거리던 다나 왓슨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서류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