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95
95
한기의 겹이 층층이 쌓인다. 얼음덩어리가 수십 겹, 수백 겹 차곡차곡 쌓인다. 커다란 빙벽(氷壁)이 눈앞에 불쑥 솟구친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후훗!”
탁좌량은 실소를 흘렸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인식되었지만, 지금에 와서 검을 물릴 수는 없다. 거침없이, 일말의 사정도 두지 않고 사정없이 몰아쳐 들어가야 한다.
쒜엑! 쒜에엑! 쒜에에엑!
혈우마폭검이 그야말로 굶주린 늑대처럼 날뛰었다.
한상검공을 사납게 짓뭉개며 지쳐 들어간다. 날카로운 톱니로 얼음덩어리를 썰어버리면서 들어간다.
그의 검에는 강력한 파괴력이 실려 있다.
전신의 진기가 한 점으로 집약되었다가 일시 터진다. 그런 폭발력이 고스란히 쏘아진다.
한상검공도 최선의 힘으로 부딪쳐왔다.
텅!
드디어 두 검이 부딪쳤다.
두 검은 마치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밀어치는 힘과 부딪쳐오는 힘이 두 검 사이에 흐른다. 어느 한쪽의 힘이 약간만 부족해도 균형이 무너진다. 그리고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거친 힘이 그대로 들이닥친다.
가각! 가각! 가가각!
두 사람은 검을 맞댄 채 사력을 다해서 상대를 밀어붙였다.
헌데 의외로 한상검공이 단단하다. 검에서 밀려나오는 한기가 그의 진기에 못지않다.
지직! 주르륵!
비성검문 검사의 두 발이 뒤로 밀린다.
그야말로 티끌만한 차이로 승리가 보인다.
한상검공은 반격할 생각을 못하고 현상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끊임없이 진기를 쏟아내어 단단한 빙벽을 쌓는데…… 차츰차츰 뒤로 밀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이익!”
검사가 이를 악물었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마에 핏줄이 곤두선다.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된다.
그는 확실히 내공에서 검군 군장보다 한 수 아래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잊었는가! 검군 군장을 상대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파아앗!
제일검의 공격이 터졌다.
그의 검법이 변화했다. 빠르기만 하던 검법이었는데, 이제는 강력한 진기가 담긴 중검(重劍)을 구사한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 튄다.
‘실수!’
그렇다. 실수다. 그가 한상검공에 전력을 쏟는 사이에 견제 역할로 그칠 줄 알았던 제일검의 검이 불을 뿜었다.
일검난변(一劍亂變) 사자실소(死者失笑.)!
검초가 변화무쌍하여 죽은 사람조차도 실소만 흘린다는 비성검문 초극강 절초가 펼쳐졌다.
제일검이 펼친 검법은 너무 중후해서 변화가 전혀 없어 보인다. 검에 실린 진기가 묵직하기 이를 데 없어서 변화를 일으킨다고 해도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모르는 소리다.
이 검법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천지에 꽃가루가 흩날리는 것 같으리라.
‘이 자식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순간, 머릿속에 퍼뜩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은 대라쌍검문의 절초를 알고 있다!
대라쌍검문에서 만든 검초가 어떤 종류인지,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끼친다.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놈들이다.
이놈들은 대라쌍검문을 지켜봤다.
대라쌍검문이 살인자들을 지켜볼 때, 이들은 대라쌍검문의 등을 지켜봤다. 혹시…… 대라쌍검문의 만행이 그리 빨리 퍼진 것도 이들이 부린 수작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간 판단이라고 해도 이들이 대라쌍검문의 절초를 알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대 일의 싸움에서는 으레 공격과 수비를 맡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한 사람이 공격을 하면, 다른 사람이 수비를 맡는다. 또는 효율적인 공격을 위해서 두 사람의 공격 방식이 다르게 설정된다.
이들은 공수(攻守)를 분담하는 쪽이다.
공격을 하는 자와 자신의 검을 붙들어 놓는 자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잘못 판단했다. 제일검이 검을 붙들어 놓는 줄 알았다. 그리고 한상검공이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헌데 막상 부딪쳐 보니 정 반대다. 한상검공이 검을 붙들어 놓고, 제일검이 결정적인 일격을 가해 온다.
자신이 판단착오를 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자신을 함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퍽! 퍼억!
순간을 열로 쪼갠 것 같은 짧은 순간에 제일검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가르며 지나갔다.
“제길!”
그는 툴툴 웃으면서 물러섰다.
배가 쭉 갈라지면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오장육부가 금방이라도 주르륵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창자가 삐져나오면서 몸의 중심마저 무너지는 느낌이다.
그는 급히 혈을 찍어서 지혈시켰다. 그리고 옷자락을 부욱 찢어서 상처를 감싸 맸다.
검에 맞고 뒤로 물러서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취한 응급조치다.
쒜에엑!
제일검의 검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을 죽일 절호의 기회임을 파악하고 있다. 그만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다. 혈우마폭검이 풀리자 한상검공도 즉각 공세로 전환되었다.
쏴아아악!
북풍한설이 휘몰아친다.
검이 다가오기도 전에 차가운 한풍이 휘몰아친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나간다. 한상검공이 일으킨 한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마저 작은 얼음덩어리로 굳혀 버린다.
그는 즉시 파공사일보를 펼쳤다.
파앗!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증발했다.
음문의 무공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은신술이다. 그것을 취했다. 싸움 중에서 일으킬 수 있는 변화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녹여서 검법 속에 쏟아 부었다.
쒜엑! 쒜엑!
방금 전, 그가 서있던 자리에 검 두 자루가 들이쳤다.
“후후후! 후후후후!”
탁좌량은 가늘게 웃었다.
비로소 한숨 돌렸다.
비성검문 수호자들의 합격을 막아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걸려들었던 함정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비록 옆구리에 일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죽을 목숨에서 벗어났으니 천만다행이다.
일격이 무위로 끝나고 큰 숨을 들이쉰 지금, 서로가 비등한 처지다.
‘내 실수는 끝났어.’
놈들은 그 실수를 최대한 이용해서 숨을 끊었어야 한다. 한데 겨우 옆구리밖에 가르지 못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런 생각이 너희의 목숨을 앗아갈 게다.
“후후후후후!”
웃음 속에 잔인한 살소를 담겨 나왔다.
그러자 제일검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 피하는군. 역시 검군 군장…… 아! 깜빡 잊어먹은 말이 있는데, 대라쌍검문의 검학을 너무 믿지 마. 그 정도로는…… 이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성급하게 달려드는 통에 말이야. 말해줄 기회를 놓쳤지 뭔가. 하하하!”
“그런가?”
탁좌량은 쌍검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앞서서 시전했던 대붕전시의 모습이다. 그리고 달려 나간다. 이제 허공으로 도약하기만 하면 영락없이 대붕전시다.
대붕전시는 분명히 아니다. 같은 수를 두 번 쓰는 미친놈은 없다.
그 수를 써서 효과를 거뒀다면 몰라도,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한 수인데 연거푸 쓴다는 것은 무리다.
제일검과 또 다른 검사는 탁좌량의 검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파앗!
그가 허공을 향해 도약했다. 대붕전시!
아니다! 대붕전시가 아니다. 허공으로 향해 솟구치는 순간, 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눈앞에서 팍! 증발해 버렸다.
“위험! 파공사일보!”
제일검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땅에서 펼쳐지던 파공사일보가 허공에서 펼쳐졌다. 순간,
슈각!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이 단단한 얼음 강벽을 부셨다. 그리고 가차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슈아악!
제일검이 반사적으로 검을 쳐냈다.
상대가 마음껏 검법을 구사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사제(師弟)와 일 대 일의 승부가 벌어지게 내버려둘 수 없다. 계속 그런 승부를 요구하려면 대가를 치러라.
바바바박!
얼음 강벽도 훨씬 단단해졌다.
이 정도…… 이미 예상했다.
순간적인 급습이지만, 그들은 어느 새 대응하고 있다.
삐삐빠빡!
무엇인가 억지로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붉은 피가 허공에 확 뿌려졌다.
파아앗!
피가 흩뿌려진다.
한상검법을 펼치던 검사가 비틀거리면서 물러선다.
그의 가슴은 피범벅이다. 제일검의 검이 탁좌량의 옆구리를 길게 갈랐듯이, 그의 검은 검사의 가슴을 길게 가로 그었다.
철벽처럼 단단하다던 한상검법이 깨졌다.
탁좌량은 일검이 성공하자마자 즉시 파공사일보를 전개했다.
파앗!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팟! 꺼져버렸다.
제일검의 쾌검이 빈 허공을 가로 긋고 있었다.
새로운 무공! 무공의 진수!
한상검법은 해과월이 처음 보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검법들과는 전혀 다른, 완벽하게 새로운 검법이다.
한상검법은 비성팔검초에 포함되지 않았다.
헌데 초식을 쓰는 모습이 아주 눈에 익는다. 아니, 생각할 것도 없다. 비성팔검초의 검초다. 진기는 전혀 다른데, 초식은 비성검문의 검초를 쓴다.
초식은 아는 것들인데 한상검법…… 검에 서린 한기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면에서 제일검은 눈여겨 볼 것이 없다.
그가 펼치는 초식은 매우 낯익다.
솔직히 그가 싸웠다면 한상검법을 쓰는 자보다는 제일검이 훨씬 상대하기 숴웠을 게다.
그의 눈은, 그의 감각은 빠름을 인식한다.
어떠한 빠름도 지켜볼 수 있으며, 그에 적합한 대응을 즉시 할 수 있다.
빠름이나 변화는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선 진기는 상대하기 벅차다. 한상검법을 보자면 강한 힘으로 짓눌러 오는 것 같은데, 그런 검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허나 여기에도 요령이 있다.
탁좌량이 그런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한상검법을 장난감처럼 부셨다.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힘을 힘으로 짓눌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힘으로 누른 게 아니다. 요령껏 한상검법의 허점을 파헤치고 있다.
날카로운 부분으로 약한 부분을 가르면서 들어간다.
한상검법은 강벽을 쳐놓았지만…… 인간의 진기가 세상천지를 단단한 벽으로 쌓을 수는 없는 법이다. 벽처럼 느껴지지만 그 역시 인간의 움직임으로 만든 것이다.
허점은 반드시 나온다.
그는 대라쌍검문의 절초도 주시했다.
탁좌량이 보여주는 변화는 실로 눈부시다. 그는 상체 삼(三), 하체 칠(七)의 움직임을 보인다.
상체보다 하체를, 손보다 발을 훨씬 많이 쓴다.
그렇게 발 빠른 움직임이 그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의 신법을 손과 발로 국한해서 보면 안 된다. 그러면 변화를 쫓다가 당한다.
그의 움직임은 손과 발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몸, 몸에서 나온다.
그는 몸으로 움직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수족이 뒤쫓는 형국이다.
몸은 나무 기둥이다. 손과 발은 잔가지다.
사람들은 잔가지만 본다.
그런 실수를 비성검문 수호자도 저질렀다. 초일류고수인 제일검조차도 손과 발에 현혹되어서 질질 끌려간다.
‘왜 저러지?’
그는 제일검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수호자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자신의 눈에는 환히 보이는 변화를 저들은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녕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데…… 좌우지간 그런 싸움을 한다.
저런 수법이 통한다면…… 빠름으로는 당할 자가 없는 비성섬문 검사들과 싸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배웠다. 그 방법을 탁좌량이 가르쳐 주었다.
대라쌍검문의 검초를 말하는 게 아니다. 힘을 상대하는 방법, 검을 흘리는 방법…… 숱한 싸움을 겪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 경륜을 얻었다.
그렇다. 그는 수련은 했지만 비무를 해본 적이 있다.
비무를 건너뛰고 곧바로 실전으로 들어섰다. 비성검문 검사들하고만 네 번 싸웠고, 네 번 이겼다. 그것이 그가 남과 손발을 맞춘 경험의 전부다.
그런 미천한 경험이 십의 무공을 오의 무공으로 전락시켰다.
검을 맞지 않아도 되었는데, 생명이 경각에 달린 순간까지 치몰렸다.
이제 모두 봤다.
스읏! 스슷! 스스슷!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도 느낀다.
생명력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언제 일어설지는 요원하다.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 지, 일 년이 될 지…… 하지만 생명은 끊어지지 않는다. 굶어죽지 않는다면, 짐승에게 물려가지 않는다면.
‘일어서야 해.’
그는 온 신경을 생명 복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