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19
오늘도 조반니는 지지부진한 전투들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시민들은 거리 위에서 모포를 깔고 아무렇게나 누워서 잤다. 언제 달려들지 모를 적군을 걱정하며 창대를 꼬나쥔 채로.
얼마 뒤, 피렌체군이 시에나 성벽의 북쪽 문을 통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설적인 예언자라는 사보나롤라의 얼굴을 구경 나갔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시끄러워서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대강 군중을 따라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그 나흘 뒤에는 로마군이 남쪽 문으로 당도했다.
다시 전투가 이어진다.
* * *
종소리가 울린다.
전쟁을 알리는 피사의 종소리.
새들은 멀리 이 땅에 몰아닥칠 파란을 피해 도망하나, 도리어 시민들은 모여든다.
그들에게는 도망칠 날개가 없기에.
그렇기에 이 땅에 충성을 맹세하고, 이 땅에 삶과 죽음을 바치기로 약속했기에.
피사의 시민들은 비록 정복당한 처지일지라도, 한때 자유와 번영을 누리던 자신들의 처지를 잊지 않았다.
또한 피사가 사보나롤라의 대평의회에서 정당한 몫의 의석을 얻었음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화국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기에 그들은 챙겨 두었던 무기를 들고 제각기 향해야 할 곳으로 향한다.
“적들이 상륙을 시도하려 접근한다!”
“포격을 준비하라! 포격을 준비하라!”
보통 지중해에서 갤리선보다 범선이 더 많은 광경은 보기 어렵다.
물론 신대륙의 소위 ‘서지중해’와의 교류가 점증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갤리선은 지중해의 주류였고 전통 있는 함선이었다.
그러나 지금 피사에서는 아니었다.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몰려오는 배들의 반수 정도가 서지중해의 범선이었고, 그들이 청동 대포를 이빨처럼 선수에 달고서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금속과 목재로 된 상어들이 해안으로 몰려드는 듯했다.
“해, 해적 조합의 선박들입니다! 서지중해 무역 헌장이 파기되었습니다!”
“피렌체와 피사의 깃발을 달지 않고 해안으로 다가오는 선박들은 무조건 적선으로 간주하라! 어서 움직여!”
서지중해에서 날뛰던 선박들, 포르투갈과 메시카의 상선을 노리던 해적들이 그들을 낳은 지중해로 다시금 돌아온 것이다.
사랑하는 조국에 해적 조합 내에서의 패권을 안기기 위해서, 베스푸치의 해상 패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란치아(Lancia, 발사하라)!”
“란치아! 란치아!”
그러나 피사 역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 빠르게 건설된 포대들에서, 불들이 뿜어지고 사석탄들이 바다 공기의 고요를 부순다.
거대한 질량으로 다가오던 돌덩이들이, 화약의 폭발력에 힘입어 추상적인 힘 그 자체로 화하여….
―콱크르직.
“날아온다! 막아! 피사놈들이 쏜….”
―콰트드득.
목재로 된 상어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그들을 침몰시킨다.
물론 피사 해안에서 쏘는 포가 몰려오는 적선들에 닿는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고, 병사들이 그곳을 돌아보면 노인의 잇몸과 이빨처럼 들쑥날쑥 황폐해진 포대들이 보였다.
그 돌조각 사이에 낀 동료 시민들의 찢겨진 사체는 모골을 송연케 했으나, 그들은 도망갈 수 없었다. 이곳은 그들의 땅이었다.
“4번 포대가 무너집니다!”
“옆으로! 옆으로 옮겨서 계속 항전하라! 곧 적들이 상륙을 시도해 올 거다!”
“발사!”
피사의 선원들 역시 급히 삭구를 쥐고 닻을 올린 채 응전을 위하여 나선다. 그러나 급히 한 척씩, 한 척씩 나아가다 보니 적들의 대함대에 던져지는 일종의 시간 벌이용 미끼밖에 되지 못하고 침몰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출항했다.
적들이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도록 몸과 배를 버려 가며 물길을 밀치고 나아간다.
“선미에 포를 맞았습니다! 침몰합니다!”
“닥치고 노나 더 저어! 충각이다! 피사 만세!”
―우두두두둑
아주 둔중한 소리. 거인이 이빨을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척의 배는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다. 피사와 피렌체의 시민들은 칼을 뽑아 들고 괴성을 지르며 적선으로 넘어간다.
카스티야어와 아라곤어를 쓰는 적들에게, 선원들은 그들이 배운 이베리아의 온갖 욕설들을 퍼부으며 미친 사람처럼 날붙이를 휘둘렀다.
그들은 싸웠다.
이미 뒤엉켜 부서진 두 배가 모두 가라앉을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이 모든 몸부림이 무의미하게, 저 바다 밑에 잠길 것임을 알면서도 창칼을 휘둘렀다. 적의 내장이 쏟아지고, 자신의 어깨가 베어지고, 피아를 알 수 없는 혈액이 분수처럼 뿜어지는 속에서 그들은 죽음과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용맹히 싸우는 전사들의 발목으로, 무릎으로 점차 물이 차오른다.
허리로, 어깨로 차오를 때까지도 그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곧 두 척의 배는 수면에서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물거품만이 초라하게 올라올 뿐이었다.
누구도 그 선박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으나, 오직 넵투누스(Neptunus)만이 망자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그 품에 품었다.
…그래도 전투는 지속되었다.
아니, 지속되었다기보다는 진전되고 있었다. 침략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였다.
그들은 포탄 세례와 견제를 위해 돌격하는 선박들을 물리치고 조금씩 피사의 해안으로 전진했다.
“저기… 대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적선들이 속도를 늦추지 않습니다!”
“어, 어어….”
수많은 해적 깃발들이 달려들어 온다. 그 외에도 카스티야, 아라곤의 붉은색과 노란색 줄무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하, 항구로 들이받는다!”
“피해라! 피해라!”
원래대로라면 보트를 통해 상륙하거나, 항만의 선착장을 통해 육지에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보트는 이 난리 속에서 적선에 부딪혀 뒤집힐 수 있고 선착장은 지금 피사 시민들이 필사적인 방어를 펼치고 있으니.
그들은 돌진했다.
땅을 한 조각씩 삼키러 온 바다의 이빨들처럼.
―크그거거거거거걱… 쿵.
그들은 육지를 크게 한 입 베었다.
그렇게 ‘상륙’한 각 배의 선장들은 딱 두 마디를 외쳤다.
“육지다!
쳐라!”
“우와아아아아아아!!”
해적들은, 포르투갈인들과 메시카인들을 죽인 그 칼을 앞세우며 피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곳을 폐허로 만들고 그 시민들의 비명을 자신들의 아름다운 무용담 한 자락의 배경음으로 삼기 위하여.
피사의 시민들 역시 준비하였다.
“저들이 도시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우와아아아아아!”
해안은 그렇게 난전이 펼쳐졌다. 처음에 상륙군은 열세였다. 시민들은 아직 조금씩 밀려올 뿐이던 침략자들을 수적 우위로 둘러싸고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척씩, 두 척씩 해안으로 돌진해 오자 상륙자들의 열세는 점차 극복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상륙 지점을 마련하기에 이르자 그들은 육지로의 무모한 돌진을 멈추고 보트를 통해 수백의 선원들을 내보냈다.
아직 뜨거운 태양이 땅을 데우고 있을 낮이라, 불어닥치는 해풍을 타고 해적들과 카스티야 해군은 기세 좋게 전진하였다. 피사 시민들의 저항을 꺾고서 몇몇 포대들을 빼앗아 동료들을 향해 겨눠지던 대포들을 탈취하였다.
그 모든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피사는 항구를 빼앗길 처지였다.
적들을 저주하며, 주님을 부르짖으며 무장한 시민들은 빌었다.
사보나롤라가 이야기하던 그 신의 가호라는 것이 다가오기를, 주님께서 적들에게 폭풍과 같은 시련을 내리기를.
그러나 적들에게 시련을 내린 것은 신이 아니었다.
“저기 깃발이다!”
“해적 조합기를 달고 있다!”
적들의 함대 뒤로 다른 선박들이 다가온다.
검은 배경에 해골이 그려진 해적 조합의 작은 깃발 아래, 거대한 돛에는 말벌과 해골이 그려져 있다.
해적기와 베스푸치 가문의 문장이 합해진 깃발.
“너희는 피렌체의 시민이다!”
해적 조합의 창설자이자, 한 해적단의 단장은 그렇게 외친다.
“멀리 바다를 떠돌지라도 너희의 심장은 이곳에 메여 있다. 피렌체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너희들도 그러하다! 선장과 선원과 배는 한 몸이니까!”
“와아아아아아!!!”
“저들은 조약을 어겼다! 자신들의 손으로 써내고 거기에 서명과 인장을 남긴 서약을 배반했다!
해적 조합에서 배반에 대한 형벌은 무엇이냐!”
“죽음!!!”
“그래! 적들에게 죽음을 안겨라!”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손을 뻗었다.
적들의 함대를 향하여 조준을 명했다.
수십의 함선에 실린 청동 대포에 화약이 채워지고 점화된다.
불꽃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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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아래서 (3)
“죽음을 두려워 말라! 밀라노가 너희의 용맹을 지켜보고 있다!”
포대의 가퀴들 위로, 한 남자가 우뚝 서서 쇄도하는 피사와 피렌체의 방어 병력들을 바라본다. 맹렬한 증오심으로.
그는 접근하는 한 피사 병사의 손목을 베어 버리고는 전투 중에도 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옷자락을 펄럭이며 자신의 해적단을 지휘한다.
남자의 이름은 주세페, 밀라노의… 이제 사라진 어느 가문의 삼남.
다른 나라들에서 귀족 가문의 삼남과 사남들이 방랑하는 기사가 된다면, 이탈리아에서 그들은 용병들을 이끄는 ‘콘도티에로(Condotiero, 용병대장)’가 되었다.
영지를 얻지 못하는 대신 용병일을 통해 명예와 부를 쌓고, 운이 좋다면 그 공로로서 다른 작위를 얻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탈리아 귀족들의 인생 경로는 바로 몇 해 전부터 급격히 변화하였다. 바로 해적으로서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 시대적 흐름에 따라 주세페는 용병단 대신 ‘무역단’을 이끌며 지난 수년 동안 서지중해를 누볐다. 새로운 인생을 찾느라 고향으로 돌아갈 여유도 없었다.
가족들이 사보나롤리스타 정부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신생 공화 정부는 국내외에 작위가 있는 숱한 귀족가를 추방하였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은 처형하였다.
거기에 원한을 품게 된 이는 주세페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밀라노계 해적단들은 조합에서의 탈퇴와 피렌체를 향한 피의 복수를 부르짖었다.
물론 공화 정부가 성립되기 직전까지 암살과 쿠데타로 도시를 무너뜨린 게 그들임을 생각한다면, 개중 많은 이들이 공화정에 대한 전복 음모를 꾸리다 체포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사보나롤리스타들의 판단이 크게 불합리하거나 잔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보나롤리스타들은 분노에 찬 군중의 의지를 대평의회 진출을 통해 중화하는 데 가까웠다.
그들이 만일 잔혹한 행위를 했다면, 아마 밀라노에 다른 정부가 있었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그 사실을 주세페는 머리로 알았다.
하지만 주세페의 가슴은 가문의 복수를 부르짖었다.
그는 가슴을 따랐다.
자신의 배를 부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선봉으로서 이 땅에 발 디디기 위하여 그는 해변으로 돌진했다. 다른 밀라노 귀족들 역시 그리하였다.
그가 이끄는 해적들은 적들의 포대를 넘어 싸웠고, 수많은 원수들을 베어 넘겼다.
사보나롤라의 정부를 수호하는 모두가 적이었다.
피사인이든, 피렌체인이든 상관없다. 설령 상대가 밀라노인일지라도 그렇다.
그는 적들을 죽였다.
“버텨라! 곧 후방에서 우방의 함대들이 온다! 우리를 구원하러 온다!”
“다, 다, 단장님….”
“왜 그러나?”
견시수(見視手)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는다.
그는 주세페가 등지고 선 곳, 해안 너머 수평선을 가리켰다.
“아, 아군 함대들이….”
문득 불길한 예감과 함께 주세페는 몸을 틀어 시선을 뒤로 향했고.
익숙한 조합장 베스푸치의 선단에, 무너져 가는 아군 함대들을 보았다.
“….”
“다… 단장님?”
“좀… 더 오래 버텨야겠군. 나 역시 직접… 전방으로 싸우러 가겠다.”
그 말에 놀란 견시수가 뭐라 지껄이며 뜯어말린 듯싶었으나 주세페는 이미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제 세상의 어떠한 소음도 무의미했다.
그는 칼을 겨누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수십 분 만에 사투하며 피사인 셋, 피렌체인 둘을 베었다.
그리고 세 번째 피렌체인에게 가슴이 베여 죽었다.
살아남은 그의 단원들은 모두 항복하였으니. 해안의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편 바다는 그리 간단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메리고는 자신이 끌고 온 선단이 자신의 옛 동맹들을 살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합의 반역자들, 신성한 서지중해 무역 헌장의 위반자들.
그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해안가에서도 다시 피사와 피렌체의 깃발들이 휘날린다.
그러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안심하지 못했다.
“저 배들은….”
“카스티야의 것들이다.”
개중에서도 해적선이 아닌 것들.
그들은 패배를 이미 인정한 듯 포의 사거리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꽤나 많은 함대를 보전하고서, 지금 부서져 가는 우방 해적선은 쳐다도 보지 않고 후퇴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보니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고르고나(Gorgona)… 그리고 카르파이아(Carpaia)….”
두 섬을 장악하고서 그들을 기착지 삼아 피사 인근의 해역을 봉쇄하려는 속셈이리라.
“배 두어 척을 피사에 상륙시켜라. 더 많은 함대가 필요하다고 전해야 한다. 저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부관은 잠시 당황한다. 이제 곧 피사 시내로 들어가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며칠 푹 쉴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겠지.
안타깝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당장 남은 함대들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날파리처럼 피사를 끈질기게 괴롭힐 예정이다.
아메리고는 저도 모르게 엄지 손톱을 씹으며 남쪽을 바라본다.
로마….
저들을 어떻게 이겨야 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