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26
“나는 처음에 자네가 떠나라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나?
‘아하, 이 빌어먹을 가짜 예언자 같으니라고.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우리가 도시를 떠나면 우리 가문을 겁쟁이라 모욕하고 격하시킨 뒤, 권력을 온전히 제 손에 움켜쥐려고 하는 게로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네. 나라면 그리 행했을 테니까. 그런 협잡질로 이뤄진 것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었네.”
“….”
“한데 내 앞의 멍청이는 뭘 하는 거지? 왜 정말 우리를 우직하게 섬기고 있냐는 말일세. 자네, 말해 보게. 정말로 내 아들이 공화국의 수호자였나? 로렌초가? 아니면 줄리아노가?”
“제게는 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을 듯합니다.”
“그렇겠지. 나는 자네의 권리를 존중하겠네, 서기장 각하. 하지만 한 가지만 더 질문하겠네.”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숙인다. 사보나롤라는 루크레치아의 말하려는 바를 짐작하지 못한다.
“자네는 자네가 한 예언들을 스스로 믿나? 지어낸 것들은 아니었던가? 정말로 주님께서 피렌체를 보우하사 승리만이 그 앞길을 장식할 것이라 믿나?”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해방을 위하여! 마르크스 만세!”
붉은 깃발의 무리들이 행진한다. 오랫동안 그늘 아래 숨어 있던 그들도, 이제 도시와 운명을 함께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감춰 두었던 무장을 손에 쥐고서 나타났다.
낯설고 알쏭달쏭한 곡조와 가사의 노래들은, 어느새 피렌체 시민들 모두의 흥얼거림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모두가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인터내셔널’이니 뭐니 하는 말들을 읊조렸다.
모두가 싸우러 가고 있다.
“용감한 이들이 죽으러 가고 있군요.”
그 광경을 내다보던 사보나롤라의 한마디가 곧 대답이 되었다.
“…자네 말대로 메디치가는 피사로 떠나겠네.”
“감사합니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대가 살아 있기를 바라겠네. 그리고서 우리를 비겁자라고 공박하든 매장하든 마음대로 하게. 영웅이 되어 있게나.”
루크레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사보나롤라 역시 그러했다.
루크레치아가 걷자 사보나롤라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메디치 궁 바깥으로 나서자 시민들이 두 사람을 보고 환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디치 궁은 비워졌고 루크레치아는 떠났다. 사보나롤라는 떠나지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떠나지 않았다.
피렌체에 황제군이 도래할 때까지.
깃발 아래서 (8)
저 북쪽에서 바람같이 달려온 무적의 군세.
그들에 대한 소문에는 으레 그렇듯 이런저런 살이 붙는다.
―“타타르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했다고 하더군!”
―“타타르의 주술을 외치면 몸에는 칼이 안 들고 화살은 빗겨 간다지?”
시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그 소문의 반 정도는, 당연히 황제군 본진에서 제작하여 퍼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피렌체가 떨기를 바랐다.
오금이 저리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공포에 깊이 잠기기를 바랐다.
그들은 소문처럼 악마와도 같은 위용을 자랑하며 이 도시의 성문 앞에 당도하였고.
단 한마디만을 외쳤다.
“포이어(Feuer, 발포)!”
독일인들의 외침과 함께 재와 불꽃의 거인들이 저 멀리 손을 뻗어 성벽을 두드린다.
―쿵. 쿵. 쿵.
손님이 왔으니 문을 열어 맞이하라는 듯 자상하게.
그러나 산을 부수고, 강줄기를 틀어막는 그들의 손은 작고 연약한 인간들이 감당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쿵. 쿵. 쿵.
마치 어항 속에 든 관상어에게 가장 거대한 공포가 어항벽을 두드리는 인간의 손길이듯이.
저 포탄의 굉음은 도시의 종말을 노래하며 피렌체 시민들의 다리를 떨리게 하였다.
“응사하라!”
“란치아(Lancia, 발사하라)! 란치아!”
그러나 대포쯤은 피렌체인들도 지니고 있다.
점화되고, 발사.
―콰쾅! 쾅! 쾅!
공성자들에게 되돌아간 대포들은 집안이 좋은 기사 몇몇의 대가리를 박살 내었고, 어느 뜨내기 병사들의 팔다리를 찢어발겼다.
미쳐 버린 병사 몇몇이 두려움에 칼을 휘두르거나 진 바깥으로 뛰쳐나가면 이내 아군의 창과 화살에 죽었다.
그러나 황제군은 그렇게 죽어 가는 인명들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열 명이, 스무 명이, 쉰 명이 죽어도 상관 없었다.
그들에게는 5만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한 시간에 하나씩 5만을 센다면 5년 8개월이 지난다.
한 시간에 한 사람씩 죽더라도 그들은 5년을 버틸 수 있다.
만일 병사들 한 사람당 피렌체인 한 명씩만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피렌체의 병사들을 모두 해치우고도 시민들은 반만 겨우 살아남을 테니까.
그들은 승리한다.
바다가 언젠가 모든 강물을 빨아들이듯이.
태양이 뜨면 별빛은 당연하게 사그라들듯이.
그런 확신이 황제의 군세에는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런 절망이 피렌체에는 있었다.
“마, 맙소사… 제발 살려 줘! 성벽 잔해에! 잔해에 깔렸어!”
“주님께옵서 피렌체를 보우하신다. 주님께옵서 피렌체를 사랑하신다. 피렌체는 이긴다. 피렌체는 불패다….”
“지금 서쪽 외곽에 불이 났다! 화공이다!”
시민들은 혼비백산하여 집 안으로 숨거나, 아니면 어디서 솟아올랐는지 모를 용기로 무기를 들고서 성벽 위로 올라가 적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다.
둘 모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으나, 그 두 가지가 모두 실성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면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뿌리를 가졌듯이.
보티첼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 역시 당연했다. 이 벽화 작업을 위하여 지난 수개월 동안 단 한 순간도 광장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환희로 찬 피렌체 시민들의 얼굴도, 격정적으로 연설하는 사보나롤라 서기장의 몸짓도, 지금 구석에 웅크려 울고 있는 아이들이나 독일인에 대한 모욕을 내뱉으며 자신의 도축용 칼을 챙겨 드는 푸줏간 주인의 모습까지 전부 그는 눈에 담았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 보니, 보티첼리는 피렌체에서 인간의 영혼을 가장 많이 관찰해 본 사람이 되었다.
그 관찰 결과가 가져다준 깨달음은 뇌리에서 손끝으로, 다시 벽화로 전해졌다.
어느 노인 남성의 평온한 얼굴은 힘이 빠져 가는 로렌초의 눈썹을 그려 내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다른 귀부인의 자존심 강한 콧대가 로렌초의 것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생전 로렌초의 얼굴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사뭇 다른 초상이 보티첼리의 붓끝에 피어올랐다.
수없이 많은 피렌체인들의 얼굴과 신체가 그 속에 녹아들었다. 그 허공을 향한 손짓은 흙장난 치던 아이로부터, 아련한 눈빛은 얼마 전 아내를 잃은 남편으로부터 따왔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 서기장 각하께서 자신에게 왜 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 데 메디치는 더 이상 하나의 사람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도, 피렌체의 제일가는 은행가도, 도시의 지도자이자 사보나롤라의 후원자인 정치인도 아니었다.
그는 피렌체 그 자체여야 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두려움과 고통과 쓰라림을 안고서 나아가는 피렌체 시민 모두가 곧 로렌초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라는 한 사람이 산드로 보티첼리에게 부탁한 바였다.
그런 그가, 피렌체 그 자체가, 마치 예수처럼 성혈을 흘리며 죽어 있다.
저 악독한 파치의 자식들에게 공격을 당하여. 불길한 붉은빛의 옷을 두르고, 움켜쥔 단도가 마치 머리와 몸에 돋은 뿔처럼 보이는 저 암살자들에게 암습을 당하여.
그들이 걸친 붉은 옷은 곧 로마 추기경들의 망토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배반자이자 압제자의 지친한 벗들이었다. 자유를 말살하고 불평등이 만연한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그들은 피렌체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하여,
―쾅! 콰쾅!
“저, 스, 스승님? 지금 성벽 일부가 무너진 듯합니다…. 독일인들이 밀려오고 있….”
“너는 일단 가 있거라. 나는, 조금만 더 있다 가겠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꿈은 방해받는다.
그러나 그런 순간의 패배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끌어안고 있는 루크레치아는 암살자들을 아들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도망치는 암살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복수를 말하고 있는가?
로렌초라는 위대한 남자를 죽인 파치 가문과 로마 추기경들의 암살자들을 향한?
아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암살자가 아니라, 암살자들이 비루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그 자체다.
그는 눈물 흘리며, 아들의 죽음에 비통해하면서도 훗날 다가올 궁극적인 승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천사들은 비통해하며 지상의 비극을 내려다보고.
새들 역시 그 날개로서 로렌초의 상처를 쓰다듬으러 날아들지만.
그의 죽음은 곧 재생이다.
보티첼리는 붉은 칠을 덧대어 로렌초의 피에, 그리고 그 열린 가슴께의 상처에 더 짙고 풍부한 혈색을 더한다.
그 사이로 슬며시 들여다보이는 심장.
그 심장은 아직도 싱싱하게 뛰고 있다.
죽은 자의 몸에 있음에도 그러하다.
인간의 이상은 죽지 않는다.
“시뇨레.”
익숙한 목소리에 보티첼리는 돌아본다.
중무장한 예언자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무수한 깃발들이 그의 등 뒤에서 휘날렸다.
“시 정부는 당신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셔야 합니다.”
무표정하게, 아무런 리듬 없이 이야기하는 사보나롤라의 목소리는 연설 때의 풍부하고 호소력 짙던 언설과는 몹시도 커다란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보티첼리는 안다.
예언자 역시 두려워한다.
자신이 보았던 자유의 승리, 피렌체의 승리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흔들린다.
“서기장 각하?”
“듣고 있습니다, 시뇨레.”
“지금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다들 칼을 쥐고 싸우고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다시 벽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작이다. 어서 저 하얀 천을 걷어 내고 시민들에게 이 위대한 역사의 장면을 마주하라고 자랑하고만 싶다.
“저는 칼 대신 붓을 쥐기로 하였습니다. 허락 없이 후퇴하는 병사들은 처형당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덧칠했다.
사보나롤라의 눈에 비친 그 광경은 몹시도 신기했다.
이미 완성된 그림인 듯하면서도, 보티첼리가 한 겹의 칠을 더하면 로렌초의 얼굴에는 보다 생생한 혈색이 돌았고 그 반대급부로 그의 죽음 역시 선명해진다.
하늘을 칠하면 벽화 바깥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궁창과 연결되려는 듯 더 푸르르게 역동한다.
“시뇨레 지롤라모께서 떠나시면 저도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제게도 전투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 말에 사보나롤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병력들을 이끌고 성벽으로 향했다.
익숙한 거리들.
이곳을 평화로웠다 말할 수는 없으리라. 파치가의 반란 이후로 피렌체는 줄곧 평화와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바로 얼마 전에 사보나롤라 본인이 민병대를 이끌고 파치 가문과 로마의 용병들에 맞서 싸운 게 이 근처 아닌가?
그러나 혼란과 두려움이 피렌체의 중심부를 채운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이 도시가 낯선 외지인인 사보나롤라로서도 마치 해가 서쪽으로부터 떠오르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져 왔다.
아무튼 그에게는 또 다른 의무가 있었기에, 보티첼리는 그 경로에서 잠시 마주친 한 화가에 불과했기에.
그는 한 장소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곳에는 도금된 글씨가 멋들어지게 양각된 현판이 걸려 있다.
―‘주 피렌체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문지기들은 사보나롤라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잠시 머뭇거릴 뿐 빠르게 문을 열었고, 사보나롤라는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 2층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로밀리 대사는 기다리고 있었다.
“서기장 각하.”
“대사 각하, 급히 부르시는 기별은 막 받아서 찾아왔습니다만.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지금 전투가 한창일 때입니다만….”
“전투가 한창일 때이기에 불렀습니다.”
로밀리는 손으로 뭔가를 보지도 않고 휘갈기더니 사보나롤라에게 내밀었다.
“방금 제 서명은 넣은 증서입니다.”
“위에 적힌… 이 기묘한 동양 문자는 무슨 의미입니까?”
“‘망명 신청서’입니다.”
망명.
사보나롤라는 잠시 흠칫 놀라더니 대사에게 답한다.
“저를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게 맞습니다. 지금 저희 정부에서 판단하기에 피렌체의 승산은 없습니다. 우선 수사님께서도, 아니 서기장 각하께서도 피사로 몸을 피하십시오. 그러면 공화국은 계속 조직적으로 항전을 이어 갈 수 있을 터입니다.”
이미 작전은 성공했다.
제국은 이탈리아에 거대한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이탈리아의 해적들은 서지중해 근방을 향한 개척 사업을 멈추고 전쟁에서 서로를 잡아 죽이고 있다.
신대륙 가장 깊숙이 뻗어 나가던 카스티야와 아라곤 역시 지중해로 눈을 돌렸다.
포르투갈 또한 유럽 세계의 혼란에 숨을 죽이고 사세를 지켜본다. 누구도 함부로 유럽 바깥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유럽의 대외 진출은 가로막혔다. 소련의 선박들이 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대를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동안에.
여기에 더해, 사보나롤라라는 상징을 살려 둔다면?
최소한 소련령 스페인으로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앞으로도 소련의 대유럽 전략에서 꽤나 유용한 무기로 삼을 수 있다.
그가 이번 전쟁에서 지니게 된 영향력과 힘을 생각한다면… 일단 일을 저지르고 사후에 보고하더라도 괜찮다.
물론 로밀리의 개인적인 판단이고. 판단 근거에 개인적 자비심이 끼어들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로밀리가 건넨 종이를 되돌려 줄 뿐이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없이도 조직적인 항전은 가능합니다. 그러라고 만든 전위당 조직이 아닙니까? 피사에도, 피렌체 공화국 곳곳의 모든 도시에도 공화당의 지부는 있습니다. 그들이 남은 전투들을 지휘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유무에는 차이가 큽니다. 특히 서기장께서는 상징이 아니십니까?”
“제가 ‘예언자’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놀란 것은 로밀리였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예언에 대하여 먼저 언급한 적이 없던 사보나롤라였다.
“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렇죠. 하느님께서 그분의 목소리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옮기셨을 뿐이니….”
“하느님은 제게 목소리를 들려주신 적 없습니다.”
그야 당연히 그럴 것이다. 세상에 예언은 없다. 그리고 로밀리가 배우기로는 세상에는 기독교적 신도 없다. 그 모순으로 가득한 신격, 구약과 신약에서조차 묘사가 서로 상반되는 신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