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48
이토록 드넓게 뻗어 있다면, 마치 걸어서 전 세계를 다 돌아보고 올 수 있을 듯 세상이 평탄해 보인다면.
옛 칭기즈 칸부터 오늘의 에센 칸까지 그토록 세계를 경략하려던, 세계를 한 손에 쥐려던 정복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알 수 있을 듯하였다.
…대략 그런 한가로운 잡상과 졸음에 빠져들어 있던 신숙주를 누군가 툭툭 깨운다. 이 늙은 몸이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며칠이나 강행군을 펼치는데, 고작 이 정도 여유도 허락해 주지 않나 싶어 눈을 부라리자 그를 깨운 비서관이 목례를 한 뒤 저 앞을 가리킨다.
신숙주는 창을 열어 바깥 풍경을 내다본다.
갑자기 지평선 위로 두드러기처럼, 아니면 한 치씩 조용히 자라나는 석순(石筍)처럼 우둘두둘하게 무언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정사(正使) 동지, 가까이 왔습니다.”
비서의 속삭임과 함께 신숙주는 절로 흐트러져 있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침을 삼키게 된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번성하는 도시는 한양과 원산이다.
그렇다면… 가장 경이로운 도시는 어디인가?
말이 한 걸음을 내딛고, 마차의 차륜이 다시 한 바퀴씩 돌아가면서 그 풍경이 가까이 오니.
머리 모양, 눈의 색깔, 복식을 이루는 천의 재질, 몸에 깊이 스민 체향과 입사법까지 각기 다른 족속들이 성곽 주위를 거닌다.
한 수천 걸음씩은 듬성듬성 떨어져 있던 천막들이 갑자기 수백 걸음에서 수십 걸음까지 서로 가까워지며 점차 빽빽하게 자리 잡는다.
낯선 냄새들, 낯선 노래들, 낯선 언어와 건축물들.
신숙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답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도시는 카라코룸이다.
* * *
에드워즈와 권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을 통과한 지 거의 20년 정도가 지났다.
20년이면 아장거리던 부드러운 살결의 갓난아이가 굳은살 배긴 두 손으로 칼과 철퇴를 쥐고, 다리 사이에는 군마를 낀 늠름한 장수가 되어 갈 세월이다.
어느 흥성하던 제국이 그동안 멸망해 궁궐의 주춧돌만 남기고 사라질 수도 있을 긴 시간이다.
그 20년, 만주국의 독립을 확정 짓던 조약을 맺으러 왔을 때 이후로는 10여 년.
다시 마주한 카라코룸과 제국은 멸망은커녕 더욱 흥성하여 크게 자라나 있었다.
극진한 환영 연회와 함께 안내받은 숙소에서도 신숙주는 제국의 현황을 알아볼 수 있었다.
대(對)폴란드 전쟁의 와중에도 북해와 흑해 등지에서 이뤄진 밀무역의 성과 덕에 육상 무역로의 서쪽 말단은 끊기지 않았다.
한자 동맹과 제노바 상인들은 각각 몽골이 유통하는 유라시아 전역의 사치품들과, 러시아가 위탁 관리하는 몽골령 동유럽에서 나온 곡물들을 끊임없이 날라 댔으니.
유럽의 뭇 왕공은 입으로는 성전을 부르짖으면서는, 침소에 들 때는 몽골 치하 북중국에서 재배된 엽차를 달였고, 몽골이 끌고 온 한족 도기장이들이 빚어낸 도기 잔에 그를 따라 마셨으며, 몽골이 유통하는 일본산 향목을 한쪽에 태워 놓고서, 몽골령 노브고로드에서 생산된 털가죽을 깔고 누워 잤다.
그는 조선도, 명도, 오스만과 그 외 기타 등등 유라시아에 속하는 모든 나라가 그러하였으니.
제국 치하의, 또는 제국과 무역 관계를 맺은 각 민족이 생산한 바를 몽골인들은 사실상 독점적으로 유통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유통되는 재화들 중 가장 상등품들은 카라코룸에 쌓여 귀족들을 즐거이 하였고.
신숙주는 조선에서도 보기 어려운 가장 세밀히 세공된 이탈리아의 유리 공예품과 정교한 페르시아 양탄자를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곧이어 펼쳐진 이런저런 연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조선이 전 세계로부터 사치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 반절 이상은 몽골로부터 들어오는 것들이다. 그러니 그 식자재의 다양성과 각지에서 스며온 화려한 요리들은 따라잡을 수 없는 바였다.
…물론 신숙주는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들을 견디지 못해 한동안 배앓이를 겪었으나, 그럼에도 감탄스러운 경험이었다.
특히 그러한 ‘국제적인’ 감각은 전 세계의 축하 사절들이 하나둘씩, 차근차근 도착할 때마다 점증된다.
마침내 즉위식이 가까워 오고, 몽골의 가장 우대받는 동맹에서 온 사절로서 지근거리에 자리를 잡은 신숙주는 눈앞의 다부진 체격을 갖춘 황태자와 늙은 카간을 비교하며 바라보았다.
마침내 옥새와 이런저런 상징물들이 옮겨 가고, 카간 또는 황제가 상황이 되며 황태자가 만인지상의 지존이 될 때.
“만세! 만세! 만만세!”
신숙주는 전 세계가 그들 부자를 향하여 만세성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새 카간 페하의 즉위를 진심으로 송축드리오매, 저희 명에서도 이리 비단과 약재를 보내옵니다.”
“그대의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겠다.”
황태자, 아니 새 카간은 긴장한 기색을 약간 엿보이며 명 남조의 정사 상로(商輅)의 말에 답하였다. 상로이 자리로 돌아가자 북조의 사신들이 들어앉은 자리에서는 한차례 소란이 오간다.
“남경에서 사신을 보내다니? 무슨 길이 있어서?”
“아마 황해를 통해 직접 움직인 다음 조선이나 만주, 또는 직접 몽골 영토를 경유하여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드시 후자여야 하네. 전자의 경우라면 소련이 저들의 사행을 파악하고 묵인한 바니.”
북조의 사신단들은 긴장에 휩싸인다.
자신들은 ‘형님 나라’의 지도자가 바뀌는 중차대한 순간에 참석하다는 것이 당연하다 쳐도, 그들과 적대하는 동시에 몽골에게도 치를 떨어야 할 저들이 어째서 자발적으로 이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말인가?
또한 카간과 상황의 반응 역시 심상찮다. ‘그대의 황제’라니? 명조의 황제는 당연히 북경의 한 분뿐이어야 한다. 북조의 천자는 자신들의 ‘아우’이고, 남조의 천자는 참칭자가 아니던가?
그들은 급히 쪽지와 소곤거림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남조의 사신은 그들을 슥 흘겨보더니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자신들을 빼놓고 어떤 흐름이 급작스레 이어지고 있다. 비록 굴욕적으로 맺은 동맹, 아니 종속 관계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멀어진다면 곤란하다.
분명, 왕조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중원에 불어닥칠 한바탕 폭풍을 생각하며 모두의 동공이 흔들린다. 북조의 사신들 중 누구도 화려한 검무에 감탄하지 못했고, 성대한 잔칫상에 젓가락을 가져다 대지 못했다.
* * *
“맙소사, 타타르 황제의 즉위식까지 오게 되다니.”
“말씀 낮추십시오, 공작 전하!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누가 듣겠나? 여기 카라코룸에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이 그리 많은가 보지?”
그렇게 빈정거리며 바이에른의 공작 알브레히트 4세는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켠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그의 잔에 빈자리를 허용치 않겠다는 듯 무섭게 다가와 다시 따라 낸다.
그 민첩함에 저도 모르게 놀란 알브레히트는 저 멀리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러시아의 사절과 상황 에센의 모습을 지켜본다. 중간중간 그 사절은 뒤에서 쪽지 같은 것을 받으며 그 내용을 훑으며 에센과 뭔가를 속닥거린다.
“저자가 그 로베르트 에드워즈(Robert Edwards)라는 자인가? 러시아의 악마왕이 여기까지 직접 왕림하셨군.”
“소문으로 듣던 바에 비해서는 너무 유순하게 생겼군요. 사람의 심장을 구워 먹는 식성과 어울리지 않게… 풉.”
“뭐, 시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반은 허풍이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브레히트의 시선은 두 사람이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를 직접 타타르 황제의 대관식에 보내는 특사로 임명하였다.
선제후인 그를 굳이 대사로 보내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하여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근처에 끄나풀을 붙여 이 외교적 장에서의 실수를 구실 삼아 후에 공격할 빈틈을 찾아내려는 술책이리라.
그는 흩어진 바이에른 공국을 다시 통합하고, 더 나아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이 선제후의 권리를 얻길 바랐다. 그를 위해선 강력한 제후들을 모조리 짓밟고 있는 황제를 견제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장악을 위해 황제는 프랑스와 부르고뉴를 거래하였고, 황태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바랐던 부르고뉴의 공녀 마리와의 결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 분개했다.
두 사람의 의지가 맞아떨어지니,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 동안 둘은 일종의 ‘역모’를 기획했다. 부르고뉴를 치고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인 게오르크를 부숴 두 사람의 숙원을 이룰 기획.
그건 실패했다.
황제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탈리아를 접수하자 겁에 질린 황태자가 음모를 고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알브레히트는 패배를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마리아 장벽을 넘었다. 아무리 몽골에서 먼저 사절이 왔다지만 죽음까지 각오한 여정이었다.
헌데 놀라웠다.
어떤 타타르의 군세도 그를 습격하지 않았고, 그 소문난 ‘악마총’ 역시 발사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타타르와 유럽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어 감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알브레히트 그 자신의 역할은 그 평화를 확고히 하고, 타타르 제국 내부의 정세를 살피는 것… 이라고는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황제의 끄나풀들이 알아서 착실하게 수행할 것이고 알브레히트는 그저 서명 몇 개 남기고 행사에 얼굴 비추면 그만이다.
그러나, 저 모습은 신경 쓰인다.
유럽 전체를 폐허로 만들 만한 무력을 가진 몽골과 루스의 지도자들은 무얼 위해 대화를 나누나?
저 에드워즈라는 자가 끊임없이 전달받는 쪽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저들은 향후 유럽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허나 알브레히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들은 유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 * *
“지금, 그 말씀이 사실이십니까?”
“듣지 못한 척하여 주시오. 예사로운 이야기를 들은 척 웃어 주면 되시지 않겠소?”
“하오나 태상황 폐하, 말씀을 듣기로는….”
“러시아 수반 ‘동지’, 소련으로부터 건네받는 쪽지에는 뭐라 적혀 있소?”
에드워즈가 의문을 가지자 에센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린다. 에드워즈는 작게 한숨을 내쉰 채, 신숙주가 보낸 쪽지를 펼친다.
“…유럽 방면에서의 점차적인 군대 철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다고 합니다. 일단은 지금과 같이 저희 러시아를 통해서 소련과 간접적인 교류만을 이어 가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쓰여 있습니다.”
“아주 좋은 말씀이오. 이번 즉위식과 축하 연회들이 어느 정도 갈무리된다면, 로마의 황제가 보내온 특사와 평화 조약을 체결할 것이니 에드워즈 동지 또한 참가해 주었으면 하오.”
아마 예의 그 ‘장벽’ 가까이에서 양 제국 간의 경계가 획정되리라.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가 제국의 봉신이 되어 버린 뒤에는 협상의 주체가 붕 떠 버려서 걱정했으나 이제 제국이 전쟁 지휘국의 지위를 인계받았으니. 본격적으로 조건을 교섭하고 전쟁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
에드워즈는 그 전쟁 당사국의 지도자로서 그 매듭짓기에 참가할 주체였고.
그렇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방금 에센으로부터 슬며시 언질을 받은 바에 따르면… 앞으로 벌어질 일이 꽤나 큰 파란을 불러올 듯싶었다.
그는 잠시 연회의 상석에서 죽, 세계 각국의 사절단들을 둘러본다.
서쪽에서부터 스페인, 프랑스, 제노바,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다시 백양 왕조의 여러 후계자들과 티무르의 후계자들, 그리고 인도 여러 공후들과 마자파힛 제국의 인접국들.
마지막으로 소련과 일본 여러 나라들까지.
그야말로 세상 모든 왕국과 공화국들에서 모인 이들이다.
그리고 이 한가운데서….
“새 카간 폐하의 즉위를 축하드리오니, 저희 티무르의 자손들 역시 기쁨을 감출 길이 없사옵니다!”
일이 시작된다.
에센은 만족스레, 자신의 아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요리해 낼지 지켜볼 뿐이다.
에드워즈는 신숙주와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숨을 들이켠다.
* * *
연회 도중 새로운 카간 호루크다슨의 앞에 무릎 꿇은 사신들은, 티무르 제국의 옛 칸, 울루그 벡의 후예들이 보낸 이들이다.
울루그 벡 칸이 아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한 뒤 갈갈이 찢어진 제국은, 백양 왕조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 점차 쪼그라들었다.
본래 제국의 숨통을 본격적으로 끊어 놓았을 우즈베크인들은 이미 몽골 제국의 말발굽 아래 고개 숙였으니, 그들은 지방 반란과 분열 속에서 조약돌처럼 서서히 깎여 나갈 뿐이었다.
허나 서방의 분쟁들을 정리하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메흐메트 2세의 제국은 백양 왕조와, 그 너머 티무르의 후예들이 자리 잡은 페르시아 땅까지 눈독들이고 있다.
그런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페르시아에 자리 잡은 왕공들은 결정을 내렸다.
“티무르 대제께서 제국의 영광을 건설하신 이래 저희의 근원은 언제나 몽골이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점차 잊혀져 가던 몽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들먹이며, 사절들은 고개 숙인다.
“나누어졌던 시내는 다시 바다에서 합하여지고, 결국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들은 한 지붕 아래 모여야 합니다. 푸른 늑대의 자손들이 다시 하나로 뭉침 또한 신의 섭리입니다.”
경전 귀절을 외듯 그들이 경건한 긴장감으로 외치자, 점차 각국 사절들 사이의 한담이 멎어가고 이목이 집중된다.
오직 저 멀리, 그들을 영향력 아래 두려 공들이던 오스만 제국의 사절단만이 심상찮은 사태에 눈을 부라릴 뿐.
에센이 바라던 바로 그대로다.
“무엇을 바라는가?”
새 카간이 말하자, 옥좌 앞에 엎드린 티무르의 자손들은 말한다.
“이는 바람으로부터 오는 행위가 아닙니다. 저희는 순리에 따라 행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순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인지 말하라.”
“복속코자 합니다. 저희는 카라코룸에서 제국의 성세를 보았습니다. 모든 신앙이 그 위대한 보호자를 떠받들며, 모든 족속이 자신들의 지배자를 공경합니다. 저희 또한 신앙으로서 떠받들고, 족속들이 모여 함께 폐하를 공경하고플 뿐입니다.
저희의 영토와 충성을 받아 주소서.”
페르시아가 몽골의 영역이 된다.
200년 만에.
웅성임 속에서 오스만과 백양 왕조의 고관들은 하나둘씩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만세성을 외친다.
“카간 폐하 만세! 푸른 늑대의 자손 만세!”
“만세!!!”
새로운 제관에는, 새로운 보석을.
다시 새로운 정복과 전쟁을.
어떤 바보도 이 결정이 즉흥적인 것이리라 생각지 않았다. 고작 카라코룸의 흥성함만을 보고 사절들이 독단적으로 나라를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래 기획된 행사다. 옥새와 의관을 이어받던 허울뿐인 양위식이 아닌 지금 이 자리가 진정한 새 카간의 탄생이다.
“새로운 나의 백성들은 고개를 들라!”
호루크다슨이 일어나 에센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대들의 위협은 무엇인가? 그대들이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저희가 바라는 바는 오직 페르시아 땅의 평화뿐입니다.”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평화라면 내가 주겠다. 칼과 피로써.”
몽골은 위대한 정복자들의 제국이다.
허면, 마땅히 그 제국의 대관식 또한 정복으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젊은 제국이 동유럽에서 그 이빨을 떼어 내고 시선을 돌렸다.
페르시아로, 그를 ‘위협’하는 백양 왕조로.
어쩌면, 더 나아가 오스만 제국까지.
* * *
/ 작가의 말
소제목 상양고무(商羊鼓舞)는 고대 중국의 전설에서 따왔습니다. 발이 한쪽만 달린 전설 속의 새 상양이 춤을 추면 곧 홍수나 수해 등 재앙이 닥칠 조짐이라는 의미의 고사성어입니다. 옛 제나라에 발 하나 달린 새들이 궁궐에서 춤을 추자 제나라 제후가 공자에게 그 의미를 물어보았는데, 공자가 이를 수해의 징조라 알려 주어 재앙을 예비할 수 있었다 합니다.
델포이의 신탁 (1)
“신숙주 동지를 뵙습니다. 극동인민위원에 오르신 일 축하드립니다.”
“한참 늦었지만, 에드워즈 동지야말로 민족인민위원에 위촉된 것을 경하드리오.”
연회들이 마무리 지어진 뒤, 주몽골 소련 대사관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역시나, 몽골 전통 가옥 구조를 반영한 중국식 건축 구조에, 천장에는 유럽식 샹들리에에 촛불들이 매달린 기묘한 형태의 응접실이다. 한편에는 소련과 조선의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그 역시 이 방의 오묘한 감각을 한층 더하는 소품 같았다.
흑단으로 만든 묵직한 탁자 위로, 에드워즈는 손수 가죽 부대를 내려놓고서 유리잔 두 개에 내용물을 나눠 따른다.
두 잔 중 하나를 신숙주에게 내밀며 에드워즈는 말했다.
“아, 아이락(Айраг, 말젖으로 빚는 몽골의 전통주)입니다. 드시지요.”
“흠, 맛은 심심하구려.”
“조선에서 만드는 위스키나 이런저런 증류주보다는 도수가 덜할 겁니다. 대신 부드럽죠. 마시다 보면 아실 겁니다.
…그건 그렇고, 민족인민위원이라뇨? 전 아직 후보일 뿐인 게 아니었습니까?”
신숙주가 무심결에 꺼낸 이야기에, 에드워즈의 표정이 급변한다.
“아, 조선이나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이나 만주인 등 소수 민족들이 많아지니, 트로츠키 동지께서 관련 사무를 처리하라고 창설하셨소. 그래도 약속한 바가 있으니 동지가 명목상 인민 위원이고 그 아래 공직자들이 대신 번갈아 인민위원평의회에 참석하오. 몰랐소?”
“모, 몰랐….”
20년 동안 조선 땅을 못 밟은 에드워즈는 코끝이 찡해 오는 감각과 함께 복잡한 표정을 신숙주에게 선보였다.
내가, 내가 인민 위원….
근데 원산에 돌아가질 못하니 이게 뭔 소용인가.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동지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게요. 너무 그러지 말고 한번 머리를 모아 봅시다.”
그런 그를 신숙주가 달래 가니 에드워즈는 잠시간의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다루기 쉽군.’
역시 트로츠키 동지가 20년 동안 짱박아 놓을 만하다고, 신숙주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르는 채로.
“크흠, 일단 이번 사태는 생각해 보면 예견된 위기였습니다.”
“예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