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77
트로츠키는 아락투무르의 앞에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고 설명을 이어 간다. 이건 룩, 상하좌우로 이동한다. 이건 비숍, 대각선으로만 이동하고. 또….
“말판 위의 전쟁과도 같소. 대사는 잔뼈 굵은 무장인 만큼 쉬이 적응할 것이오.”
얼마간 설명을 이어 간 뒤, 몇 번 대국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당연히 능숙하게 트로츠키가 리드했지만 가면 갈수록 실력이 늘어난 아락투무르는 한 끗씩, 한 끗씩 트로츠키를 따라잡아 간다.
하루, 그리고 이틀이 지나 마침내.
“이를… 체크메이트라고 하던 것이 맞습니까?”
“그렇소. 그대의 승리요.”
트로츠키는 즐겁게 웃으며 다시 말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떨리는 손이 폰과 비숍을 몇 번 놓치자 아락투무르가 배치를 돕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게임이 시작한다. 트로츠키는 백색, 아락투무르는 흑색.
“그쪽은 명의 새로운 황제로 누구를 점찍어 놓았는지 물어도 되겠소?”
폰을 두 칸 앞으로 움직임과 동시에 트로츠키가 말한다. 장고하던 아락투무르는 나이트를 전진시키며 답한다.
“…대왕(代王)이 적임자로 보입니다.”
“몽골 정부의 의지 표명이오? 아니면 전권 대사가 아닌 개인으로서 그대 본인이 낸 의견이오?”
“둘 다입니다.”
특명 전권 대사. 유럽인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일지 몰라도 동양에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사절이란 중앙의 의지를 드러내고 전달하는 전령일 뿐 결정권자가 아니었기에.
그러나 소련과의 오랜 외교 관계는 예케 몽골 울루스에도 영향을 미쳐, 이제 트로츠키와 마주선 아락투무르는 당당히 카간이 지닌 외교권의 대리자로서 이 자리에 왔다.
지금 두 사람의 대화는 곧 두 나라의 대화와도 같으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과 예케 몽골 울루스는 결정을 나눌 것이다.
아락투무르가 트로츠키의 그다음 발언이 무엇일지 생각하는 가운데, 트로츠키가 아까 폰을 움직여 트인 길 사이로 비숍을 전장에 내보낸다.
트로츠키의 백색 비숍이 아락투무르의 흑색 폰을 살해한다.
본격적으로 둘 사이의 전투가 시작된다.
“분명 몽골이 대나라 왕을 밀게 된 연유는 단순할 것이오. 해 봐야 더 많은 조건을 제시하고 더 많은 공물을 가져와서겠고, 잠정적인 판단이겠지.
그런 우선순위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소. 다른 친왕들에게서 더 좋은 조건을 얻어 낸다면.”
트로츠키가 몽골의 결정에 대한 논평을 내놓자, 아락투무르의 눈썹이 호기심을 담아 치켜 올라간다.
“그래서 소련은 누구를 지지합니까?”
흑 나이트가 싸움을 걸어온 백 비숍을 집어 삼킨다.
“우리는 단순히 누군가를 향해 지지를 표명하지 않소. 모두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내보일 뿐이오.”
백색 폰이 다시 전진하여 나이트의 진로를 견제한다.
“우리는 미래에서 왔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대들이 발간한 역사서는 몽골 내에서도 유통된 지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에서 일어난 반란 하나하나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오. ‘녕왕의 난’이라든가.”
어쩔 수 없이 아락투무르는 나이트를 후퇴하며 혀를 찬다. 초장부터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나오자 눈에 힘을 주고 말판을 내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녕왕의… 난?’”
“그렇소. 지금은 모르겠지만 원래 녕왕의 가문은 중앙에 대해 불만이 팽배했었지.”
파죽지세로 백색의 말들이 전진하며 영토를 넓혀 간다.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불만이.”
* * *
“이건 기회가 아닙니까?”
“조선에서 그래도 가장 많이 대접받고 돌아온 것이 저희 사신단이라고 합니다. 암묵적인지지 의사가 있다 보아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당장에라도 나서야 합니다!”
대녕(大寧)의 왕이었던 주권(朱權)은 명 태조 주원장의 17번째 아들이자 서자로서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을 때 그 반란에 동참한 주역 중 하나였다.
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지모로써 영락제에게 큰 힘이 되었던 만큼 주권은 새 황제의 즉위에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신에게 영락제가 돌려준 대가란 참혹했다.
천하를 그와 함께 나누어 다스리겠다던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버려졌고, 온갖 권한을 빼앗긴 채 대녕에서 쫓겨나 낙후한 남창(南昌) 지역의 왕으로 봉해진 것이다.
그 후손들은 대대로 배신에 대해 칼을 갈았고, 덩달아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린 각지의 번왕들 역시 숨죽인 채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천하가 마침내 둘로 쪼개졌다.
기나긴 숙청의 와중에 남조의 천순제는 어쩔 수 없이 종친들을 등용했고, 그 가운데 녕왕의 일가 역시 이런저런 권리들을 되찾았다.
허나 주권의 4대손인 주균근은 그 잠깐의 달콤함에 속지 않았다.
당장의 필요가 해소된다면 황제는 다시 번왕들을 내버릴 것이다. 그의 고조부 또한 쓰라린 배신을 겪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천순제의 뒤를 이은 성화제 역시 슬슬 번왕들을 내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제 그는 죽었다.
성화제의 시신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 그의 조정에서 봉사하던 조신들 역시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이건 기회다.
“…몽골에도 사절을 보내 보지. 그리고 조선에도 조만간 다시 사행길을 떠날 채비를 하게.”
내가 황제가 될 수 있다. 수십 년간 대를 이어 내려온 조상들의 원한을 풀 수 있다.
그 생각에 녕왕의 눈이 빛난다.
* * *
“녕왕을 차기 황제로 지정하는 것은 어떻겠소? 만일 다른 황제를 내세운다면….”
“본래 역사에서 그랬듯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원래는, 서기 1519년에 일어난 반란이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0여 년 뒤의 일이지. 허나 그 정도는 ‘모종의 이유’로 앞당겨질 수도 있소.”
모종의 이유라면.
소련의 개입이라든가.
아락투무르는 다시 고민을 이어 가다가, 힘겹게 폰들을 움직여 백색 말들의 쾌속 전진에 대해 방어막을 구축한다.
“…소련 정부의 의지에 대해 잘 알겠습니다. 귀중한 정보 공유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귀국의 판단에 소소하게나마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오.”
트로츠키의 말들이 쾌속 전진을 이어 간다.
중앙으로 뻗어 나간 요새는 이제 굳건히 선 채 전방위에 포격을 개시하고, 졸들은 방진을 단단히 짜내어 적습을 막는다. 백색의 기사들은 좌우에서 적진을 휩쓸고, 사제들은 피 묻은 칼과 방패를 축성하며, 여왕은 전장을 지휘한다.
바야흐로 백색의 우위가 점쳐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오.”
트로츠키는 캐슬링(Castling)으로 남겨 두었던 룩을 가운데로 옮기고 킹을 안전한 구석에 옮겨 놓으며 말을 이었다. 순식간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룩이 흑색 진영의 중심부를 위협한다.
“우리에게는 북경이 있소.”
혼란한 상황 속, 중국 전역에서 소련 유학생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
* * *
“이를 보시오! 귀물이니 손자국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며 옆사람에게 돌려 가면서 보시오!”
바람잡이의 외침에 사람들이 그 ‘귀물’이라는 작은 종이 쪼가리를 받아 든다. 그리고 구경꾼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짐과 동시에 왁자지껄한 소음이 좌중에 퍼진다.
“그림이 참으로 정교하구려!”
“귀물이라 할 만하오. 이 사람들의 터럭과 옷자락이 세밀한 것 좀 보시오?”
“이는 그림이 아니오!”
“그림이 아니라니… 그럼…?”
“사진이라는 물건이오. 색채가 들어간 것은 소련에서도 귀하디귀한 물건인데, 내 조선국에 갔을 때 어렵게 구하였소.”
더 정확히는 소련 정보총국의 요원들이 그에게 건넨 것이지만, 그 역시 ‘어렵게 구한’ 과정에 속하니 거짓은 아니었다.
“이곳은 한양이라오. 조선국의 서울 되는 곳이지.”
“조선이라면 해동 땅이 아니오? 변방의 번국이 이리도 부유하다는 말이오?”
“여기 성벽보다도 높다란 건물들이 즐비하고 마차 수천 대가 나다니는 곳이 정녕 한양이란 말이오?”
“그렇소! 선황 폐하의 유고를 다들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선황 폐하께서 아조의 문물을 갈고닦으시며 상공업을 높이신 이유가 무엇이오? 모두 조선을 배움이 아니었소?”
“마, 맞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폐하께서 손수 관원들에게 글귀를 내리시면서 소련과 조선을 배우라 누누히 말씀하시었습니다!”
주첨선 치하에서 일하던 하급 관원이 바람잡이의 말을 긍정하자 의구심이 대중의 눈에서 말끔히 씻겨 나간다.
선황 폐하의 유고라니! 그들이 봉기한 이유가 바로 선황 폐하의 복권이 아니었던가?
“조선이 이리 번성한 것은 모두 그 문물이 발달하고 제도가 선진하며 인민들이 뛰어난 탓이오. 폐하께서는 이를 배워 온 백성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 하시다 역적 주견심에게 살해당하셨소!”
“이, 이 개새끼들!”
“그렇소! 참으로 개새끼들이오! 우리는 선황 폐하의 유고를 받들어 다시금 소련을 향해 나아가야 하오! 자, 여기 책자들을 받으시고. 내일 이 자리에서는 그를 강독하는 시간을 가져 보겠소.”
“공… 산당… 선… 이게 뭐요?”
“이거 말이오?”
홍치제 주첨선이, 패망 직전까지 사비를 탈탈 털어 소련으로 내보냈던 유학생들이다.
그중 꽤나 많은 수가 소련 정보총국과 접선해 훈련받았으니, 그 수는 적더라도 유자광과 스피리도노바의 감독하에 한 몸처럼 조직되었다.
북경에 이만큼 체계적으로 조직된 정치 결사는 없다. 그저 홍치제 시절을 추억할 뿐이던 상공업자들은 어느새 거리에서 피어나는 붉은 대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오.”
선동가들, 직업 혁명가들이 북경 곳곳에 흩뿌려졌다.
* * *
“북경은 이미 우리의 것이니, 이미 명국의 수도로 오랫동안 기능한 바 있고 녕왕의 봉지(封地)인 남창과도 비교적 가까운 남경을 새로운 황제를 위한 수도로 삼는 것은 어떻소?
그리고 그에게 이전의 황제들이 지켜 온 몽골과의 관계를 계승하도록 하는 것이오. 아니, 더 많은 공물과 더 확고한 우열 관계를 확립할 수도 있을지 모르오.”
트로츠키의 말투가 설득 투로 바뀌기 시작한다.
승자의 태도다. 그의 룩이 둘 모두 싸움에 참여하면서 승기를 확실히 잡아 왔기 때문일 테다. 상대에게 배려를 건넬 만큼의 여유를 챙긴 것일까?
백색의 말들이 끊임없이 나아가면서 적들을 포위한다. 아락투무르는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고는 빠르게 흑과 백의 전장을 훑는다.
“그 제안은 참….”
그때 트로츠키는 아락투무르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본다.
그의 입가에 만족감 어린 미소가 번져 나가고 광대뼈가 움찔거린다. 승부에 집중한 아락투무르가 비숍의 날카로운 꼭지에 손을 올리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이내 흑색의 비숍이 날카로운 예각을 그리면서 백색의 여왕을 암살한다.
트로츠키의 진영에 크게 구멍이 뚫리자 처음으로 트로츠키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북경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삼아 몽골의 남진을 견제하고, 몽골로부터 저 멀리 남쪽으로 떨어진 남경을 명국의 수도로 삼겠다니 너무하십니다.
만일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검은색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일제히 전방으로 자신의 몸을 쏘아 낸다. 백색의 말들을 하나하나 주살하며 강철처럼 견고해 보이던 포위망을 쉽사리 끊어 낸다.
그제야 트로츠키는 아락투무르가 이 순간만을 고대해 왔음을 깨닫는다.
“몽골 역시 움직일 수 있는 번왕들이 있습니다.”
이제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것은 아락투무르였다.
* * *
―“경왕(慶王) 주수병(朱邃塀)의 서신에 대원황제(大元皇帝) 위랍특(衛拉特) 홀아홀답손(忽兒忽答孫)이 답한다.”
주수병은 부푼 가슴을 안고서 카간 호루크다슨의 친서를 읽어 내려간다.
―“그대의 공물은 짐이 잘 받았다. 대국의 황제를 섬기는 예가 극진하고도 아름답구나. 짐은 그대에게 더 많은 선물을, 더 많은 약속을 줄 수 있으리라. 허나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말라.”
“아, 그야 물론입니다.”
싱글벙글 웃음 짓는 주수병의 시선 끝에는 북경이 자리한다.
그곳의 반쯤 불탄 자금성, 농민들이 이놈 저놈 앉아 보고 더럽힌 옥좌.
그깟 것들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언제 자신이 제위를 넘볼 정도로 그리 부유하고 강력했다고? 언감생심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노리다가는 뒤를 맞아 죽기 딱 좋다.
그저 지금처럼 몽골과의 협력을 이어 가며 카간 폐하께서 떨궈 주시는 달콤한 떡고물을 받아먹고, 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리면 그만이다.
아마 몸도 마음도 병들어 골골대고 있을 숙왕(肅王) 주록비(朱祿埤)나, 서안(西安)에 똬리 튼 진왕(秦王), 성도(成都)의 촉왕(蜀王) 또한 모두 마찬가지 생각일지라.
그들도 비슷하게 카간에게 공물을 보내고, 다시 그와 비슷한 답신을 받았을 테니.
카간의 군세를 봉지 내로 받아들이고, 카간의 다소 귀찮은 내정 간섭도 참아 낼 것이다.
그러면 아주 달콤한 보상을, 저 드넓은 몽골의 귀족들이 아주 비싼 값에 그 지역의 산물을 사들여 주는 은혜를 받을지어다.
* * *
“내륙으로부터, 우리는 뻗어 나갈 것입니다. 황제가 부재한 동안 중원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나날이 막강해지고 있습니다. 북방의 여러 번국들에는 다루가치들 역시 파견될 예정입니다.”
다루가치를 파견한다? 사실상의 속국화가 아닌가?
급히 유자광을 불러 이야기를 나눠 보나 별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럴 수밖에. 중원에 대한 소련의 첩보는 해안가의 여러 항구 도시들과 남경, 북경에 뻗쳐 있을 뿐이니.
한숨이 나오려던 것을 트로츠키는 참는다. 그사이에도 아락투무르의 말들은 전진하면서 기껏 승기를 잡아 놓은 판도를 어그러뜨린다.
사제는 배교를 강요당하고, 기사들은 포로로 사로잡히며, 졸들은 척살된다.
꾸준히 트로츠키는 흑색의 군세에 피해를 강요해 보지만 이미 판세가 역전되고 있다.
아락투무르는 앞으로 푹 고꾸라뜨리고 있던 상체를 갑작스레 일으키면서 승전의 희열을 만끽한다. 그 모습이 트로츠키의 머릿속 한쪽의 오랜 기억을 되살려 낸다.
―“료바, 내가 이겼나? 내가 이겼겠지?”
…저런 습관을 가진, 성질 더럽고 편집증적이고 천재적이던 단벌 신사 직업 혁명가가 있었다.
레닌이라고.
추억 속의 흥분을 되살려 낸 트로츠키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당황한 마음을 다잡고 대오를 정비한다. 예상외로 거칠어진 반격에 아락투무르도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생존한 말들을 그러모은다.
두 사람은 하나씩 하나씩 서로의 말들을 잡아먹어 간다. 전투의 희열과 흥분과 긴장 속에서.
북경의 처우, 차기 제위의 향방, 중원에서 두 나라가 누릴 특권의 종류와 수위, 어떻게 두 나라의 세력권이 나뉠지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가닥이 잡힌다.
아락투무르가 방심한 틈을 타, 트로츠키가 폰 셋을 잃어 가면서 흑색 퀸을 잡아 낸다.
두 사람의 수중에는 적의 시체가 한가득이고 말판 위에는 외로운 왕들과 아직 죽지 않은 기사 하나와 사제 하나뿐이다.
서로를 매섭게 노려볼 뿐 죽음만이 남은 전장에서 두 사람의 왕, 두 개의 국가, 두 거대한 세계는 승리를 쟁취할 수단을 모두 잃었다.
남은 건,
“…이런 상황은 뭐라고 해야 하오?”
“이런 대국은 아주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가벼운 악수와 미소뿐.
“기물 부족(Insufficient materials). 무승부요.”
트로츠키가 손을 내밀자 아락투무르는 얼떨떨하게 그를 맞잡고서 흔든다.
체스판 위에서의 승부는 영원한 교착 상태로 끝났다. 왕과 그 수하 한 명씩 외에는 모두 스러졌다.
허나 더 커다란 판 위에서는 많은 것이 매듭지어졌다.
훗날의 (1)
하얀 사기그릇으로 푸르스름한 빛의 찻물이 흘러 들어간다.
녕왕 주근균은 찻잔의 한가운데서 잎 조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 넘치기 직전에 찻주전자를 내려놓는다.
축문 외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근균은 천천히 신위를 향해 잔을 들어 올린다.
향연이 피어오르고 그 냄새가 옷깃에 깊이 배어들 때까지 주근균은 사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